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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살 면접
박정현 지음 / 블랙페이퍼 / 2021년 11월
평점 :
자살 면접 (2021년 초판)
저자 - 박정현
출판사 - 블랙페이퍼
정가 - 14000원
페이지 - 268p
거칠지만 낯설고 새롭다
들어 본적 없는 작품에서 뜻하지 않은 재미를 발견하곤 한다. 특히나 사전 정보가 전혀 없는 신인작가의 작품은 미지의 세계를 탐구하는 것 같은 설레임을 주기도 한다. 21년 2월에 포스팅했던 [인간교]와 이번 작품 [자살면접]이 바로 그런 류의 책이다. 박정현이라는 작가에 대해 전혀 아는 바 없이, 자살면접이라는 책의 줄거리조차 거들떠 보지 않고 오직 제목이 주는 호기심에 이끌려 책을 들었다. 저자의 약력조차 적혀있지 않은 미스터리한 작가의 이야기는 말 그대로 미스터리였다. 아직 거칠지만 독창적인 아이디어로 빚어낸 다섯 편의 단편은 내게도 창작 욕구를 불러 일으켰다.
1. 세희에게
매일마다 날아오는 편지. 편지는 직접 손으로 쓴 편지를 복사한 복사지였다. 나는 편지에 적힌 내용을 보고 숨을 삼켰다. 오직 나와 죽은 남편만이 알고 있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이 적혀있는 편지는 대체 누가 보내는 건가.
2. 자살 면접
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도 타인에게 어마어마한 민폐를 끼치는 일. 이에 타인에게 민폐를 끼치지 않고 '깔끔하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찾아주는 단체가 암암리에 성행한다. 하지만 거쳐야 할 관문이 있으니. 그것은 단체에서 시행하는 자살 면접이었다.
3. 알루미늄
집안 청소부를 뽑는 면접자리에 나선 3인방. 면접관 석에 앉은 자들은 인간이 아닌 안드로이드이다. 3인방은 안드로이드의 눈에 들기 위해 저마다 혼신의 힘을 다해 면접을 보는데....
4. 호셰크, 오르
나는 신이 될 거야. 어릴적부터 신이 되고 싶었던 나의 눈에는 인간이 풍기는 기운이 눈에 보인다. 악인은 호셰크를 등에 지고, 선인은 오르라는 나무가 어깨에 자라난다. 어느날 운전을 하던 난 드디어 곤경에 처한 오르가 보이는 사람을 구하고. 마침내 영웅으로 거듭난다.
5. \ 1,478,629,972
인스타 인플루언서로 온라인 쇼핑몰을 운영하는 나는 절친한 친구와 매주 로또를 사고 당첨금을 절반으로 나누기로 약속한다. 그리고 몇 개월 뒤. 홀로 로또 번호를 맞추던 나는 깜짝 놀란다. 생각지도 않던 로또에 당첨된 것이다. 당첨금은 정확히 1,478,629,972원. 하지만 정말로 친구와 나눠야 할까. 머리속이 복잡해진다.
[세희에게], [호셰크, 오르]는 미스터리 장르이고 [자살 면접], [알루미늄]은 SF. [\ 1,478,629,972]은 뭐랄까. 사회풍자? ㅎㅎㅎ 어찌됐던 다양한 장르의 이야기에 적절한 컬러 삽화가 어우러져 꽤나 공들인 흔적이 보이는 작품집이다. 물론 다섯 단편 모두가 만족스러운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작가가 그려내는 세계를 충분히 즐길수 있었고 소소한 반전의 재미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었다.
[세희에게]의 반전의 포인트는 본인도 두 번이나 써먹은 설정으로 이렇게 보니 또 새롭게 느껴진다. 흐흐흐. 또 다르게 변주해서 마르지 않는 샘물처럼 계속 써먹어도 될 것 같은 희망을 얻었다. [호셰크, 오르]는 각각의 두 가지 단편을 묶은 이야기인데 [호셰크]에서 독자에게 정보를 주지 않은 상태에서 반전의 묘미를 준 뒤. [오르]에서 앞서 못다한 이야기를 마무리 하는 식으로 이어지는데 이런 구성도 괜찮다는 걸 읽으면서 느꼈다. 표제작 [자살 면접]은 뼈대가 되는 설정은 좋았지만 자살을 주체하는 단체의 정체는 납득하기 힘들어 조금 아쉬웠다. [알루미늄]은 인간과 AI 안드로이드의 전복된 사회를 풍자하는 방식을 청소부 면접으로 그리는 것이 좋았다. [\ 1,478,629,972]은 중반까지 좋았다가 다소 개연성이 떨어지는 결말이 아쉬웠다.
읽으면서 아이디어가 샘솟는 책이다. 본인이 말하기엔 뭣하지만 아직 다듬어 지지 않은 거친 느낌의 작품들 그 자체로 매력적이다. 더불어 본인도 이렇게 정성을 쏟아부은 단편집 하나 내봤음 하는 소망이 무럭무럭 샘솟았다. ㅠ_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