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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멸일기 - 윤자영 장편소설
윤자영 지음 / 몽실북스 / 2020년 4월
평점 :
파멸일기 (2020년 초판)
저자 - 윤자영
출판사 - 몽실북스
정가 - 14000원
페이지 - 334p
소년에게 있어 남아 있는 선택은 오직 파멸 뿐
번뜩이는 트릭으로 남다른 본격 추리의 묘미를 선사하며 한국형 밀실추리 '관'시리즈라 불리는 [교동회관 밀실 살인사건]과 [나당탐정사무소 사건일지] 등을 히트시킨 '윤자영'작가의 신작이 출간되었다. 사실 '윤자영'작가의 본업은 따로 있다. 바로 현직 고등학교 과학 교사인데 그런 연유로 이번 작품은 굉장히 의미있고 눈여겨 볼만 하다고 생각된다. 이번 작품의 스토리가 학교폭력을 중요 소재로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현직 교사의 눈으로 바라본 학교폭력의 실상. 그리고 주기적인 폭력이 낳은 폭력의 연쇄작용과 파멸에 이르는 아이들. 더불어 어른들의 비뚤어진 욕망과 그릇된 부조리가 맞물려 연쇄적 파국을 맞아가는 현실적인 사회파 추리였다.
[이승민]
마포대교 난간에 올라 선 이승민은 떨리는 마음을 다잡고 심호흡을 한다.
훌쩍 몸을 날린 소년.
풍덩.
중력은 소년의 몸뚱아리를 차디찬 강물 속으로 순식간에 집어 삼켰다.
때마침 지나던 유람선에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진 소년은 최소한의 처치를 받은 뒤 다시 학교에 등교한다. 소년의 친구들이나 선생님 누구도 소년의 자살시도를 모른다. 아니, 평소 존재자체도 모를 정도로 공기 같던 소년의 자살시도 따위는 애초에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소년의 자살시도를 기점으로 소년의 인생은 중대한 변화가 생기는데....
[공승민]
중학교 시절부터 이름이 같다는 이유로 이승민은 눈엣가시였다. 저렇게 음침한 놈과 이름이 같다니,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화가 났다. 그래서 괴롭혔다. 집요하고 악질적으로. 절대로 이승민의 학대에 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고 아무도 모르게 용의주도하게 괴롭혀왔다. 하루에 한번, 시원하게 이승민의 싸대기를 날리는게 일과가 돼버렸다.
여느날과 다를 바 없는 저녁.
야자를 마치고 공원에 모인 친구들과 술한잔을 하고 적당히 오른 취기에 홀로 귀가길에 올랐다. 으슥한 공원길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걷고 있는데 어느샌가 뒤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인기척을 향해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퍽!
뒷통수를 강타한 강렬한 충격이 전신으로 퍼져갔다...
공승민과 이승민. 이름은 같지만 둘이 걸어온 인생과 앞으로 펼쳐질 인생은 전혀 달랐다. 이름이 같다는 접점을 제외하고는 절대로 교차할 수 없는 평행선을 달리는 둘의 관계. 절대적 강자 공승민과 절대적 약자 이승민. 그런 둘의 관계가 반전될 단 한번의 기회가 이승민에게 찾아온다.
지긋지긋한 학대의 고리를 끊어버릴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가 당신에게 찾아온다면?
비록 자신을 파멸에 이르게 만드는 위험천만한 일일지라도 그게 당신에게 있어 남아 있는 유일한 선택지라면 당신은 그 파멸의 동아줄을 잡을 것인가? 작품을 읽으며 이승민이 겪었을 심리적 압박과 고통에 공감했고 그런 소년의 선택에 깊이 탄식했다. 학교와 가족 모두에게서 버림 받은 소년은 어쩔 수 없이 악마에게 손을 내밀 었던 것이 아닐까? 일산대교에 서서 몸을 날리는 이승민의 절망이 너무나 무겁게 다가왔다.
학대와 가학에 찌든 학생들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교사들의 이야기는 [파멸일기]를 즐기는 또다른 재미요소로 작용한다. 물론 재미를 위한 MSG가 가미되었겠지만 체벌금지 정책이 시행된 후 교사가 겪고 있는 땅에 떨어진 교권의 현주소나 선생님들 간의 위계질서, 학교 밖에서의 이야기들 그리고 항상 무섭게만 보였던 선생님의 지극히 인간적인 벌거벗은 면모 등등... 그동안 자세히 몰랐던 세계이거니와 현직 교사인 작가이기에 써낼 수 있는 생생한 이야기라고 생각됐다.
학교와 학생, 폭력과 학대, 변태적 욕망과 애증, 그리고 반전. 축소된 사회라는 학교에서 들끓는 다양한 감정의 폭풍이 오로지 파멸을 향해 치달아 간다. 궁지에 몰린 인간이 변모해가는 심리 묘사가 탁월하여 막힘없이 읽히는 가독성 좋은 작품이었다. 실제로 읽다가 정신차려 보면 분량이 휙휙 넘어가있더라는...ㅎㅎ 사실 결말의 반전을 지난 천호 교보문고에서 열렸던 추리작법강의 자리에서 들어버려 반전의 묘미를 온전히 느끼지 못한게 아쉬울 따름이다. ㅠ_ㅠ
마지막으로 충분히 이야미스로 끝낼 수 있음에도 마지막으로 다시 한번 손을 내미는 것을 보면서 잔혹한 이야기임에도 학생을 생각하는 선생님의 진한 애정을 듬뿍 느낄 수 있던 따뜻한 작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