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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 마
아시자와 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22년 4월
평점 :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마 (2022년 초판)
저자 - 아시자와 요
역자 - 박정임
출판사 - 피니스아프리카에
정가 - 13000원
페이지 - 239p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일과 마주하게 된다. 때로는 운이 없어서 그랬다고. 재수가 없었다고 되뇌이며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자위하게 된다.
하. 지. 만.
정말 운이 없어서일까?
미스터리라는 장르는 이 우연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의심케 만든다.
'피니스 아프리아케'에서 출간된 '아시자와 요'의 작품집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마]의 첫번째 단편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을 읽고 나니 모든 우연에 의심을 하게 되는 트라우마에 걸리게 될지도 모르겠다.
'아시자와 요'의 만남을 거슬러 올라가보니 [아니 땐 굴뚝에 연기는]이란 작품이었다. 이 작품을 접할 때만해도 오컬트 호러에 미스터리를 접목한 작가라 생각했다. 물론 '미쓰다 신조'계열의 오컬트 미스터리의 클리셰를 답습하기에 익숙함을 느꼈지만, 공포 보다는 완결성있는 미스터리적 요소에 눈길이 갔다.
하지만, 국내에 연이어 출간되는 작품 목록을 보며 호러 전문이 아닌 미스터리. 그것도 이야미스 계열의 작가라는 것에 대한 놀라움과 깊이있는 작품성에 작가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계기가 됐다. 초딩 명탐정을 위시한 [나의 신]에 이어 이야미스 단편집 [용서는 바라지 않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 작품 [더러운 손을 거기에 닦지마]로 내게는 필독 작가로 등극하게 되었다.
첫번째 단편 [단지 운이 나빴을 뿐]은 시한부 판정을 받은 아내가 목수인 남편에게 이야기 한다. 당신의 걱정은 나의 죽음과 함께 가져갈테니 내가 몰랐던 고민이 있다면 털어놓아 달라고. 그리고 남편은 그동안 마음속에 담아 두었던 한 사고를 이야기 한다. 남편이 털어 놓는 이야기는 각자의 판단에 따라 사고인지, 아니면 사고를 위장한 살해인지 혼동된다. 사건의 진위 여부를 떠나 아내의 애틋한 마음과 죄책감에 시달리던 남편의 감정이 뭉클함을 자아낸다. 그리고 그 뭉클함과 반대되는 서늘한 진실이 이 작품을 더욱 돋보이게 만든다. 단지 운이 나빴을 뿐..... 과연 운이었을까?
두번째 단편 [벌충]은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소재라 감정이입하게 된다. 초등 교사인 지바는 수영장 배수펌프를 확인하지 않아 다량의 물을 손실하고 13만엔의 수도 고지서를 받게 될 처지에 놓인다. 지바는 고민한다. 과실을 학교에 고백하느냐. 아니면 속이느냐.... 결국 지바는 과실을 덮으리라 마음먹고 공작을 펼치지만.... 세상사가 그렇게 마음대로 되지는 않지 않던가. ㅎㅎㅎ
지바의 상황을 바꿔 생각해본다. 국을 데피려다 가스불을 망각하고 냄비를 태워 먹은 주부. 명령어 하나로 소도시의 인터넷 서비스를 중단시킨 통신회사 엔지니어. 식수의 정화 시설 점검을 잊은 탓에 여러 도시의 식수가 오염된 관리자. 자 삶을 살아가면서 내 실수를 덮기 위해 거짓을 말한적이 없다면 이 단편은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다.
하. 지. 만.
유사한 경험이라도 있다면, 이 단편은 남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물론 나 역시 무척이나 남다른 단편이었다.
'새카만 화면에 멍한 표정의 남자가 비치자 거의 반사적으로 전원 버튼을 눌렀다.' 62page
세번째 단편 [망각]은 노인들이 모여사는 실버타운(?)에서 한여름 에어컨 고장으로 낮잠을 자다 사망한 노인의 사건으로 시작된다. 바로 옆집에 살던 다케오는 우연히 치매 초기의 아내가 우연히 옆집 노인의 전기요금 미납 고지서를 받았고 건망증 때문에 미납 고지서를 옆집에 전달하지 않았음을 깨닫는다. 그리고 고심한다. 아내의 치매탓에 전기요금이 미납된줄 모르고 옆집 노인의 에어컨이 단전되어 사망한게 아닐까 하고 말이다.
하. 지. 만.
다케오 부부가 미처 몰랐던 사망사고의 진실은 따로 있었다.
치매는 미스터리 작품에서 빈번히 다뤄지는 소재로 나 역시 이미 세 번이나 다룬 소재이다. 하지만 이 질병만큼 자신과 주변사람들을 파괴시키는 파급력은 최고이자 최악이 아닐까 싶다.
'일을 하고 가정을 꾸리고 아들과 손자까지 보며 팔십 평생을 살았지만 마지막에는 그저 이상한 냄새를 풍기는 덩어리가 된다.' 102page
네번째 단편 [매장]은 우연히 살인사건에 휘말린 영화 감독의 이야기이다. 이제 곧 개봉할 영화를 위해 살인을 덮으려는 감독의 의도와는 달리 전혀 다른 지점에서 목격자에 의해 무고한 사람이 살인자로 내몰리게 된다. 분명 거짓을 말하는 목격자의 의도는 무얼까.
마지막 다섯번째 단편 [미모사]는 이 단편집중 가장 숨막히는 이야기를 담고있다. 스무살 초반 아내가 있는 불륜남과의 불꽃같은 사랑을 끝내고 어느덧 나이를 먹은 나는 나름 요리연구가로 성공을 거두었다. 그런 불륜남이 신간 사인회에 찾아온다. 과거의 기억이 떠오르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나. 남자는 무엇 때문에 날 다시 찾은 걸까.
'문이 닫히는 순간 미모사 화환의 조그맣게 흔들린다.' 239page
다섯 편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일상에서 얼마든지 마주할 수 있는 악의. 방향성 없는, 언제든 내게로 향할 수 있는 인간의 악의에 소름이 돋는다. 자 이쯤되면 이 작품집을 관통하는 세 가지 단어는 '일상', '실수', '예상치 못한 악의'로 요약할 수있을 것 같다.
우연과 운. 정말로 의도치 않은 악의들에 숨겨진 의미를 깨닫는 순간. 반전의 소름에 몸서리가 쳐진다. 다른 무엇도 아닌 악의의 의미가 반전인 작품집이다. 유려한 문장과 섬뜩한 반전. 역시 '아시자와 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