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믿고 추락하던 밤
시리 허스트베트 지음, 김선형 옮김 / 뮤진트리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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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Iris)는 작가 시리(siri)의 철자를 거꾸로 읽은 것이다. 작가의 페르소나가 투영된 것이리라. 그런데 시리는 폴 오스터의 부인이다. 부부가 같이 살면 닮는다는데 시리의 문장과 폴 오스터의 문장은 많이 달랐지만, 전체적 분위기에서 폴 오스터의 소설들과 유사점이 많다고 느껴졌다. 폴 오스터를 말할 때, 도시적인 분위기라는 말이 줄곧 떠도는데 시리의 이 소설 역시 그렇다. 어떤 면에서 도시적이라는 거냐 하면, 하나는 문자 그대로  이야기 자체가 도시 밖을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문체가 아침에 도시의 지하철에서 출근하는 영업사원들처럼 깔끔하고 세련된 느낌을 준다는 것이다. 그들의 예의바른 인사말과 잘 다려진 수트 속에 어떤 심장이 뛰고 있는지 모르는 것처럼, 간결한 문체를 통해 아이리스가 전달하는 이야기 속에는 전하지 않은 생략과 구멍들이 있음을 눈치챈다. 그건 독자의 몫이다. 독자가 자신의 삶의 이유로 채워넣을 것들이다.


첫번째 이야기, 주인공은 어렵게 알바 자리를 찾아 만능 작가 모닝씨의 아파트 작업실 문을 두드린다. 상자에서 어떤 물건을 꺼내 그것에 대해 자세히 묘사하여 녹음 하는게 일이다. 죽은 소녀의 유품 같은 거다. 그 소녀에 대해 아무런 정보도 제공되지 않는다. 이름조차도 모른다. 상자 하나당 60 달러씩 받기로 한다. 상자를 들고 집으로 가서 물건을 꺼내 요리조리 뜯어본다. 물건의 생김새와 쓰임새를 유추해보고 그걸 사용했던 사람의 신체적 정신적 특징들을 추리해보고 물건이 가진 세월의 흔적들을 살펴 꼼꼼히 기록한 후 목소리로 속삭이듯 그것을 옮긴다. 모든 감각을 이용하여 일에 전념하지만 첫번째 물건은 냄새를 묘사하지 못했다는 지적을 받고 그 이유 때문인지 어째서인지 23달러만 받는데 이 점에 대해 아무 설명도 없고 주인공도 불만이 없다. 낡은 장갑, 솜뭉치 이런 물건을 접하며 그녀는 죽은 소녀에 대한 정체가 궁금해서 견딜 수 없고, 점점 모닝씨가 그녀를 죽였다는 마음에 확신을 굳혀가고, 비밀을 추격하기 시직하는데..


두번째 이야기. 스티브는 남자친구인데 비밀이 많아 아이리스를 조바심나게 만든다. 아이리스는 스티브의 친구인 사진작가 조지와 함께 어울리다가 어느날 조지가 거리에서 어떤 여자가 발작하는 장면을 보고 미친듯이 카메라를 들고 나가 사진을 찍는 장면을 목격한다. 발작을 하던 여자가 오줌을 싸는 장면까지 카메라에 담아내는 모습을 보고 부당함을 호소한다.  어느 날 조지가 자신의 사진을 찍고 싶다는 제안을 하는데, 함께 있던 남자 친구 스티브가 으쓱 하는 반응에 오기 같은 마음으로 승낙을 한다. 검은 원피스를 입고 조지의 집에 간 화자는 조지의 리드에 광적으로 휘말려 미친듯이 포즈를 바꾸고 조지는 춤추듯 뛰어다니며 셧터를 누른다. 하지만 그 수천장의 사진 중 그가 내민 한장의 사진은 존재가 부재하는 듯한 모습으로 그녀를 당혹시킨다. 한장의 사진은 학교 전체에 돌고 돌아 그녀가 어디로 가건 그녀를 알아보며 나타나고,  아슬거리던 스티브와의 관계마저 끝난다. 책을 돌려준다는 핑계로 스티브의 집을 찾은  그녀는 그 문제의 사진이 부재중인 스티브의 집에서 책상 위에 있는 것을 목격하고 열받다가 기절한다. 한편 스티브와도  전시회에 출품된 문제의 사진은 도난을 당하고 조지는 이를 알리러 와서는 예상치 않았던 말을 한다.


세번째 이야기. 편두통에 시달리던 아이리스는 정신병원에 입원을 하게 되고 병실에서 ,수다스럽고 음험한 M 부인과, 정신이 완전히 나간 O 부인과 병실을 공유한다. 매일매일 전혀 다른 페르소나를 보여주는 O 부인은 병실에서 의사의 손을 물어뜯거나 혹은 밤새 전체 병동을 난장판으로 만드는 등의 일탈을 벌이기도 하는데 대개는 몸도 못움직이고 누워 있다. 어느 날부터 O 부인은 잠든 그녀 옆에 서서 그녀를 바라보고 있더니 다음번엔 자는데 침대로 들어와 혀를 들이민다. 이 스토리에서도 남친이 위문 방문하는데, 두번째 스토리에서 헤어졌던 스티브로 배경 시간이 첫번째 이야기가 쓰여진 이전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네번째 이야기. 중편 소설 정도 분량이다. 지독한 로맨스이기도 하다. 앞의 세 이야기를 어우르는 시간대에 일어나는 일로, 모닝씨도, 스티븐도 등장하고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퇴원하는 이야기도 짧게 서술되어 있다. 돈이 떨어져 월세가 밀리고 밥을 굶는 처지가 되었는데도 집에 얘기하지 않고, 알바 자리를 구하기 위해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다가, 어느날 학과 교수인 로즈 교수의 연구 보조원으로 일하게 된다. 독일어 서적 한 권을 번역하면서 작품 속의 주인공 클라우스의 페르소나에 빠지게 된 아이리스는, 로즈 교수와 작품을 통해 교감하게 된다. 교수가 휴가로 떠나있는 방학 동안 아이리스는 아파트에서 어떤 여자가 강간을 당했던 사건을 계기로 할로윈 파티때 입었던 친구 남동생의 양복을 입고다니며, 교수와 함께 번역했던 작품의 주인공 클라우스의 페르소나로 변신한다. 작품 속에서 ‘착한’ 클라우스는 악의 충동을 받다가 조금씩 그 악을 실행한다. 아이리스 역시 남자 양복을 입고 남자 외피를 쓴 아이리스는 어두운 골목길도 싸구려 술집도 두려울 것이 없다. 초췌한 모습으로 저속한 술집에서 남장을 한 채 술취해 다른 이름으로 있는 그녀를 우연히 발견한 교수는 그녀를 그 타락의 구렁텅이에서 건져내고 둘은 사랑에 빠진다. 가정이 있는 늙은 교수와 아이리스의 사랑 이야기는 예정된 갈등을 통과하고 예정된 결말을 맺지만, 그녀는 그 이야기를 평소 그녀를 스토킹했던 어떤 남자에게 털어놓게 되는데… 로즈 교수와의 사랑 이야기 그 뻔한 스토리지를 절절하고 지적으로 승화시킨 작가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재킷을 걸치고 내게 다시 키스를 하고 문으로 걸어갈 때 그는 이미 추억이었다.( 320)


제목과 내용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다. 주인공 아이리스는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을 경계하지만 순간적인 끌림에 굴복하여 그를 믿고 자신을 맏기고 추락한다. 그 추락이 의미하는 것은 모호하다. 검은 드레스를 입은 사진이 마치 누드 사진처럼 인화되어 학교 전체가 그 사진을 알게 된 사실 이상으로 한 장의 사진이 갖는 의미는 미묘한데, 청춘의 불안을 떠안은 아이리스에게는 피해의식의 시작 지점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 그녀의 주변에는 유독 남자들이 많이 꼬이는데, 1인칭 화자의 시점에서 객관화가 담보되지 않았기에, 그 남자들이 실제로 어떤 관계를 원한건지도 알 수 없다. 스티븐의 경우는 확실하게 아이리스 쪽에서 주로 조바심내고 좋아했던 관계라는 걸 알 수 있는데,  아이러닉하게도 몇개월 이상 지속된 공인된 관계는 그 뿐이다. 아무튼 그녀가 누구에게건 일단 마음을 열었을 때, 열게 되는 계기는 순간적이고 감정적인  판단이고, 이내 후회하게 될 사건에 얽메인다. 이러한 사건들은 그녀를 다소  피해망상적으로 변하게 한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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