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려 뽑은 가사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고전
박연호 지음 / 현암사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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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동영상이 존재하지 않는 먼 과거로 가는 방법은 기록밖에 없다. 기록물의 종류에 따라서 과거를 보는 형태가 다르다. 조선왕조실록과 같은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찬란한 문화유산을 가졌음에도, 아쉬운 건 우리 선조들이 무엇을 하며, 무엇을 생각하며 살았을까, 어떤 가치를 중요시하면서 무엇을 마시고 무엇에 웃고 울었으며 무엇에 감동하였을까 하는 점이다. 

 


가사는 시조와 더불어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고전 시가이며 4음보의 율격 속에 시적 정서를 담아내어, 전기에는 노래 가사로, 후기에는 읽을 거리로 전해져왔다(작품해설). 짧고 압축적인 아름다움이 특징인 시조와는 달리 가사는 운율이 있으되 장시의 개념으로 길게 내용을 전한다. 사대부들은 여행 후기도 가사로 썼고, 집들이 축하글도 가사로 썼고, 유배지에서도 가사를 썼다. 책은 크게 강호가사, 유배가사, 기행가사, 교훈가사와 민요의 사설과 후렴구와 같은 민요의 형식을 차용한 가사의 갈래교섭으로 구성되어 있다. 


매일 보는 자연이 늘 새롭고 늘 노래말에 담을 만큼 아름다울까. 강호가사를 쓴 사람들은 깊은 숲 속에서 홀로 집을 짓고, 그곳에서 살면서 매일 보는 들과 산과 강과 꽃과 나무와 계절의 변화를 노래한다. 이런 것을 원림문학이라고 하는데, 원림문학의 정의는 '거처와 그 주변의 자연 사물을 통해 자신이 추구하는 삶의 양태와 거처하는 공간의 의미를 만들어' 내는 것이라 한다. 강호가사의 대표적인 작품은 정극인의 상춘곡, 정철의 성산별곡과 면앙정가 등이고, 그 밖에도 누황사, 탄궁과 우활가, 봉산곡 월선헌십육경가가 실려있다.  모두들, 현실과는 먼 이상향을 동경하며, 자연을 벗삼아 안빈낙도의 생활을 추구하는 성리학적 이념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강호 가사는 일반적으로 정치 현실을 매우 부정적으로 인식하고 외부와 차단된 은둔을 지향하는 데, 책에 실린 면앙정가와 성산별곡은 사대부가 희구했던 이상적인 세계상을 담는다. 즉, 누정 주변에 존재하는 자연적인 사물들에 유가적 이상세계라는 의미를 부여한 것이다. 면앙정가와 성산별곡에서 찬양 대상 원림인 면앙정과 식영정은 광주에서 가까운 담양, 소쇄원 근처에 있고, 그 주변으로 가사문학관이 있다. 대부분이 자연의 주변 원림을 조금은 지나치게 찬양하는 느낌이 드는데, 그것이 사대부의 이상향을 담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해하니, 지금은 많이 변했지만 그래도 가옥 자체와 산세는 남아있는 그곳들은 소쇄원과 더불어 누가 오면 볼 것 없는 광주 대신 관광지로 데리고 다니는 필수 코스 중 하나기에, 머리속으로 시를 짓던 풍경을 꽤나 선명하게 시각화해볼 수 있었다. 


유배가사도 그렇지만, 대개는 가사문학이 다소 자유로운 형식이라고는 하나, 대략 자연을 먼저 노래하고, 그 다음에 개인의 서정과 그리움과 같은 감정을 담는데, 거의 모든 가사에서 느낀 점은 작가들의 임금에 대한 충정이었다. 한 마디로 말해 많은 가사문학들이 기승전왕에대한충성인데, 설명에 의하면 그것은 아부가 아니라 군주에 대한 충성심의 표출이 하나의 관념적 미학이었다는 것이다. 특히, 사미인곡과 속미인곡은 그리움과 애절함이 절절히 넘쳐나기 때문에, 아 시적으로도 아름다움을 충분히 느낄 수 있는데, 그 임이 왕을 말한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음에도, 당시 사대부들의 유교적 관념이라는 것의 실체를 희미하게나마 상상할 수 있었다. 


교과서에서는 상춘곡을 비롯해 관동별곡 속미인곡 사미인곡 등을 많이 언급했지만, 가사 문학은 조선전기의 유교적이고 관념적인 형태에서 조선후기로 갈 수록 현실적인 묘사나 내용으로 좀더 생생한 시대적 분위기를 전달해 주므로, 내게는 상대적으로 이름을 들어본 적 없는 작가의 후기 문학이 훨씬 더 흥미로왔다. 우리가 그림을 보더라도 산수문경화보다는 생생한 씨름판과 목욕하는 모습, 훔쳐보는 모습들을 재현한 풍속화를 더욱 좋아하는 것처럼 가사를 통해 과거 시대를 만나는 데 있어서도 관념적이고 이상적인 유학자들의 사상을 만나는 것보다는 가난하고 고단하지만 그들의 먹고 일하고 생활하는 생생한 일상을 만나는 방법이 더욱 흥미롭지 않을 수 없다. 


기행가사인 관동별곡과 권섭의 영삼별곡의 예를 보자. 정철과 권섭은 모두 화룡소라는 같은 곳을 노래하고 있다. 


<관동별곡> 중

원통골 가는 길로 사자봉을 찾아가니

그 앞의 너럭바위 화룡소가 되었어라

천년 노룡(용)이 굽이굽이 서려 있어

밤낮으로 흘러내려 바다로 이었으니

풍운을 언제 얻어 삼일우를 내릴까

음지에 시든 풀을 다 살려 내었으면 


<영삼별곡>중

뫼 밑에 서린 용이 변화도 무궁하여

음심한 오랜 소에 소굴을 삼고 있어

층층 절벽 백 척에 비단 한 필 걸어 두고

한 낮의 천둥소리 골짜기에 가득하니 

구부리고 보던 것이 내 일이 싱겁구나


정철이 현실에 용의 이념적 의미에 초점을 맞추어 풍운을 얻고 삼일우를 기원하는 데 비해, 영삼별곡은 용과같은 변화무쌍한 자연, 깊은 소(웅덩이)와 높은 폭포, 천둥같은 폭포물 쏟아지는 소리, 구부리고 보는 화자 자신이 구체적으로 설명되어 있는 것이다. 권섭(1671~1759)은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여행으로 일생을 보냈다고 한다.다른 기행 가사들이 부임지로 가면서 지은 데 비해, 권섭의 가사는 개인의 순수한 여행 체험을 작품으로 옮겼다. 영삼별곡은 여행을 하게 되는 계기부터가 병이 나 초가를 닫았는데 오지랍넓은 병이 자연에 든 병이라 떠나게 되었다는 다소 코믹하게 시작되어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사람들의 풍경, 귀리밥에 풋나물 삶아 데쳐 싫도록 권하는 인심좋은 산골집 고즈넉한 저녁 풍경, 앞 내에 빠진 옷을 쥐어 짜서 손에 쥐고 벌불에 쬐는 것 같은 자잘한 기행 풍경을 세세하게 담아내었다. 


기행가사에서 특히 탐라별고 일동별유가 연행가는 각각 제주도, 일본, 북경 여행기를 담고 있는데, 전혀 새로운 풍경을 완전히 다른 가치관으로 바라보는 시대의 시각이 재미있었다. 연행가는 꽤나 조선 후기에 쓰여졌는데도 여전히 명을 숭상하고, 청을 멸시하는 가치관이 엿보였고, 일본에서 호화로운 거리와 가옥들을 보면서도 여전히 미개한 것들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이 재미있었다. 



홍진에 묻힌 분네 이내 생에 어떠한가

옛사람 풍류를 미칠까 못미칠까

천지간 남자 몸이 나만 한 이 많건마는

신림에 묻혀 있어 지략을 맡겠는가

...

이봐 이웃들아 산수 구경 가자스라

답청을랑 오늘하고 욕기 일랑 내일 하세

아침에 나물 뜯고 저녁에 낚시 하세

...

<상춘곡>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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