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은 자유다 - 삶의 가장자리에서 만난 희망의 인문학 수업
얼 쇼리스 지음, 박우정 옮김 / 현암사 / 2014년 7월
평점 :
절판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 마약과 폭력에 삶을 저당잡힌 자들. 이들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을까. 선의를 가진 많은 단체와 개인이 다양한 각도로 접근하지만 항상 한계에 부딪힌다. 막대한 부의 대부분이 극히 일부분의 사람들에 의해 소비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빈곤을 구제하는 일은 어쩌면 한낮 몽상일 지도 모른다.  소외된 곳에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일. 중독에서 벗어나도록 심리적 상담소를 지원하는 일. 의료 봉사를 하는 일. 각종 방법으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펼치는 행사들. 가난하지 않은 우리는 그런것들에 무감각하게 노출되어 있고, 때로 약간의 기부금으로  혹은 나와는 상관없는 다른 세계에 대한 무심한 시선으로 대처하며 살아가고 있다.

 

얼 쇼리스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했다. 그가 가난한 사람을 돕기 위한 방법으로 선택한 것은 교육이었다. 교육 프로그램은  한 끼 끼니나 금전을 제공해주는 것보다 빈곤의 근본적 구제를 위해 적절한 선택임에 누구나 동의한다.  흔한 갱생 교육은 자립할 수 있는 조건을 돕는 기술교육과 직업교육이 대부분이고 피상적으로는 그게 최상의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그의 교육은 다르다. 돈이 되지도 빵이 되지도 않는, 당장 그걸로 돈벌이가 될 수 있는 직접적 기술을 가르치는 것도 아닌, 세상에서 가장 쓸모없어 보이는 철학을 필두로 한 인문학 교육이었다.

 

수료증 외에는 아무것도 보증하지 않는 수업이었다. 휘몰아치는 가난의 폭풍우를 뚫고 교실로 가는 길은 험난하기 짝이 없다. 당장 버스비도 없고, 밥 값도 없고, 아이를 맡길 곳도 없는 가난과 소외의 끝쪽에 서서 마약 중독과 폭력으로 스스로를 방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인문학을 배워보라고 학생을 모집한다. 때로 텅빈 교실에서 수업을 받기 위해 학생들 스스로가 자신이 앉을 의자를 이고 지고 등교해야만 했다. 희망이라고는 죽어 천국에 가는 것밖에 없는 사람들이 대상이다.  미국, 호주, 멕시코 등지에서,  한 때 문명을 탄생시킨 마야인의 후예였고, 한 때 자연과 교감하던 용감한 인디언이었고,  원주민들이 수천년동안 살아왔던 터전을 온몸으로 지키고 버티다 20세기의 마지막 바늘 구멍을 피와 멍에로 통과해 겨우 살아남은 한 줌도 되는 남겨진 사람들이 소외의 시간들을 지키던 자리였다.

 

인문학이 어떻게 가난을 구제한다는 거지?  책을 읽기 전에도, 책을 읽는 중에도, 그리고 책을 읽은 후에도 나는 의심한다. 태생적으로 부자이든 가난하든 학부모들의 높은 교육열이 신분(?) 상승의 계단을 이끄는 환경에서 자라고 살고 아이를 키우는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선뜻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책을 덮은 후에도, 그 교육, 클라멘트 코스에 대해 생각해본다.

 

우리 아이들에게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을 가르쳐 주세요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 시내 중심가 사람들의 정신적 삶.... 그게 무엇이지? 철학? 그 어렵고 한심한 철학이 가난을 구제해준다고? 그의 생각은 옳았다. 미국 한 도시에서 시작한 클라멘트 코스는 세계 각국의 여러 도시로 퍼져나갔고, 졸업생의 상당수가 새로운 삶을 살게 되었다. 이 책은 얼 쇼리스가 함께 한 클라멘트 코스가 세계 각국 도시 도시의 그늘에서 맨땅에 헤딩하듯 한 사람씩 운영진을 모으고 기금을 모으고 학생을 모집하고 교수를 불러 자리를 잡는 과정, 그 과정에서 고수했던 원칙과 수용했던 변화들을 기록한 10년의 다큐멘터리이다.  

 

그가 방문하고 설립한 각 코스마다 환경적, 문화적 차이가 있었고, 학생들이 처한 상황과 종교적 관습, 생활방식들이 달랐다. 얼 쇼리스는 기본적으로 필요한 다섯 개 과목, 철학, 미술, 역사, 문학 등에 각 지역 운영진과 교수들이 요구하는 커리큘럼 사이에서 수많은 논쟁을 거쳐 그 곳 상황에 가장 적합한 학습과정을 결정했지만, 교수법에 있어서는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에서 유래된 토론식 수업을 고수하였다. 

 

그 외에도 몇 가지 원칙이 있었는데,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수는 최고 수준의 대학에서 풍부한 경험을 갖춘 교수를 채용하고, 조금이라도 보수를 지급하는 것이었다. 보수를 지급해야, 교수의 수업이 어긋날 때에 바꿀 수 있고, 학생과 운영진이 교수에 대해 마땅한 권리를 요구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교수들은 보고서를 썼다. 실제로 얼 쇼리스가 이 책 <인문학은 자유다>에 토론에서 누가 어떤 이야기를 했는지와 같은 아주 세세콜콜한 이야기까지 기록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교수에 대해, 학습 평가와 보고서를 요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고 판단된다. . 각문화와 지역 특수성, 교수들에 따라 커리큘럼과 과정이 변형된다.

 

클레멘트 코스에서 교수들의 역할은 소크라테스의 산파술처럼, 자신의 생각을 끌어내도록 이끌어주는 것이지, 지식을 불어 넣어주는 것이 아니다. 길을 찾아주는 것이 아니라 어둡고 컴컴한 골목에서 스스로 길을 찾아 앞으로 한걸음 디디고 또 디디어 나아갈 수 있도록 불을 밝혀 주는 것이다. 게다가 클레멘트 코스에서는 아무것도 약속하지 않는다. 인문학을 공부한다고 빈곤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는 보장이 있는 것이 아니다.

 

얼 쇼리스는 빈곤의 원인을 하루종일 일해도 생계비에도 못미치는 낮은 급여와 단순노동으로 보았다. 그래서 제소자나 중독자들을 그러한 단순 노동과 저임금으로 이끄는 단순 기술교육이 아닌, 인문학을 선택했다. 그의 고백에서처럼, 어쩌면 참으로 몽상가와 같은 아이디어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 발 뒤로 물러서서 바라봐 보자. 한 사람당 너무나도 많은 비용이 들어간다.  절반 이상의 학생이 떨어져나간다. 게다가 학생 모집은 될 성 싶은 떡잎을 골라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있다. 서양 철학으로부터 모든 것을 시작하다 보니 가는 곳마다 문화적 제국주의라는 각국 지역의 클레멘트 코스를 담당하는 운동가들과 언쟁을 벌여야 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포위하고 있는 무력이 대처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져서, 가난해지는 것 말고는 그 어떤 일을 할 시간도 힘도 남지 않게 되는 지점이 있다. 대개 그런 사람은 클레멘트 코스에 입학시킬 수 없었다. 입학시켜도 곧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노숙자, 제소자, 원주민, 매춘부, 중독자 등 빈곤과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 거리고 있지만, 어떤 아주 작은 희망의 끈이라도 붙잡을 의지가 있어야 했고, 기본적인 읽고 쓰기 능력을 가져야 했다. 이민자나 영어 구사에 어려움이 있는 사람은 애초부터 열외였다. 코스는 4년제 대학과 제휴를 맺어 일정 부분을 만족시키는 학생에게 학점을 인정해주고 장학금을 주고 대학으로 끌어들였다. 중도 포기자가 절반이나 되었지만 그들 중 일부는 박사 과정을 이수했고, 대다수가 4년제 대학을 진입하였다. 

 

얼 쇼리스는 계속 이동하며 클레멘트 코스의 설립을 도왔다. 그가 가는 곳마다 지역의 특수성이 존재했고, 그는 맨땅에 헤딩했다. 한사람 한사람씩 코스를 지원할 사람들의 머리 수를 늘려가며 사람을 모으고, 기금을 모으고, 장소를 물색하고, 교수와 학생들을 모집하였다. 폭력과 적대감으로 가득한 가나의 피난민 수용소에서도, 마야 제국의 영광을 기억하는 멕시코의 어느 작은 마을에서도, 한국의 산동네에서도 누군가가 그의 아이디어, 그의 몽상을 따라하려는 자들이 그를 불러들였고, 그렇게 해서 백여개곳에 클레멘트 코스가 생겼다.

 

첫 챕터를 읽을 때는, 얼 쇼리스가 여러 도시를 돌며 클레멘트 코스를 설립한 기록이려니, 쉽게 읽어질 줄 알았다. 그런데 별 재미도 없는 이 책에 나는 거의 일주일 동안 빠져 들었다. 세계 구석 구석에서 폭력의 역사 속에서 탄생한 수없이 많은 동류의 빈곤과 소외에 대해 그 다양성을 알게 되었고, 그것과 싸우기 위해 자신만의 신념을 가지고 몽상가처럼 계획을 세우고, 도저히 안될 것 같은 일들을 하나씩 하나씩 이루어가는 그 과정 속에서, 절망과 희망을 동시에 읽었다.

 

이 책은 얼 쇼리스가 자신의 치적을 알리기 위해 쓴 책이 절대로 아니다. 많이 알려진 것처럼 클레멘트 코스가 모든 가난한 사람의 희망의 등불이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게 아니다.  어쩌면 그 반대인지도 모르겠다. 우리에게 알리는 것. 이렇게 많은 소외가 존재하지만, 우리가 최선을 다해 그 숱하게 많은 조직과 기금과 노력을 통해 구제할 수 있는 가난이 이렇게 조금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려주려는 것 같다. 얼 쇼리스는 책을 통해 자신의 신념에 조금 동조하거나 비슷한 방향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숱한 논쟁과 타협을 통해 실천해나가고 있는 모습을 다양한 각도에서 보여준다.

 

클레멘트 코스는 별도 없는 어둡고  캄캄한 곳 군데 군데를 밝히는 아주 아주 작은 등불이다.  가난 속에서도 특별한 능력과 기회를 가진 사람들 중 지극히 일부는 이 코스를 통해 구제 되었다. 드넓은 사막 모래밭에서 한 줌의 모래를 건져올린 것 같은 숫자의 사람들에게 성찰을 통해 삶과 권리를 되찾게 해준 것에 들어간 기금과 노력을 생각해 보면 한숨이 나오지만, 책 속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의 삶이 아름다운 건 그렇게 매일 드라마같이 변화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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