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아는 만큼 보인다 - 개정판 손철주의 그림 이야기
손철주 지음 / 오픈하우스 / 2011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고람 전기가 스물 네살에 그렸다는 계산포무도이다. 추사의 제자였던 그는 30살을 채 넘기기도 전, 그림 몇 점 남기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초가집 옆으로 나부끼는 풀은 그령이라고 한다.

 

 

 

마치 싸리 빗자루로 마당을 쓸어 놓은 것처럼 몽땅한 붓끝이 종이 위를 듬성듬성 훑고 간 자취는 보는 이의 마음까지 스산하게 만든다. 진저리 치는 세상사에 어떤 애증도 품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표표한 심회가 이런 것이다. 꾸밈이라고는 한점도 없는 이 그림이 가슴을 치는 것은 까마득한 허무와 알지 못할 적요, 그리고 덧없는 삶이 거기 있기 때문이다.


 

반납 전에 건진 문장이다. 한꺼번에 많이 읽을 욕심에 잔뜩 빌려다 놓은 오석주와 손철주의 책들을 두고 긴 여행을 다녀오니, 반납일이 몇일 만료되었다. 여러 권을 한꺼번에 체납하여 대출중지기간이 한 달이 넘는다.

 

처음 펴낸 효형출판은 운명을 달리했는지, 오픈하우스에서 2011년 개정판을 냈다. 다행이다. 반납 기일을 넘겨 채 읽지 못한 책을 훑어 보는 순간 '어머 이건 사야 해'라며 마음이 다급해져 급찾아보니 절판되었으나 개정판이 있다. 그래도 어쩐지 1998년도 판을 갖고 싶다. 저작권 없이 쓴 도판이 개정판에서 사라졌을 수도 있을테고..


이 책은 말 그대로 미술의 세계 저 편 깨알같은 일화들을 알알이 정성껏 모아 쓴 손철주의 손때묻은 글들이다. 지금이야 많이 알려졌겠지만, 당시 쉽게 접할 수 있는 미술계의 스토리들을 엮은 책들이다. 때때로 예술 속에 깃든 이야기들과 품고 있는 사연들은 별 의미없는 그림을 빛나는 예술로 탈바꿈시키기도 한다. 그림 속에 숨어 있는 이야기들, 의미들, 거기서 캐치해낸 멋진 필체와 별난 감성으로 빚어낸 글타래들.. 그림이라고는 어릴 적 미술 시간에 쭐떡쭐떡 그려본 것이 전부인 이 무지랭이도 미술이라는 세계에 쉽게 텀벙텀벙 걸어들어가 맘껏 휘저어 볼 수 있도록 쉽고 재미있게, 그러나 가끔은 절절히 가슴에  품을 것들을 제공하며 그렇게 예술 세계로 인도한다.

 

손철주가 뽑은 미술들은 한국 미술 서양 미술 할 것 없이, 현대 미술과 고전을 가를 것 없이, 르네상스와 낭만파와 행위예술 등을 자유자재로 넘나든다. 보고 느끼는 시각적인 예술을 가르는 어떠한 사조도 시대적 구분도 동서양도 없이, 시공간을 넘나들며 펼쳐지는 미술의 세계 속 깨알같은 사연들을 만나는 재미는 손철주 특유의 풍부한 어휘가 카푸치노 거품처럼 녹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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