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 포럼] 불공정 게임과 치수 맞추기
바둑의 관점에서 보면 세상살이는 굉장한 불공정 게임이다. 세상살이에 접바둑은 없다. 살아가는 기술이 1급이건 18급이건 프로건, 화려한 가문을 배경으로 지닌 하버드 박사든 대학 문턱에도 못 가본 빈털터리 시골 청년이든 다같이 맞바둑을 두어야 한다.
바둑용어로 말하면 '세상은 총 호선(互先)'이다. 바둑은 경기를 제외하고는 치수에 따라 상수가 하수를 접어준다. 내기바둑을 두었는데 만약 한쪽이 치수를 속여 부당이득을 크게 취했을 때는 법정에서 사기죄로 처벌받는다. 그러나 세상살이에선 치수 걱정은 안 해도 된다. 머니게임에서 9단의 실력을 갖춘 외국의 금융회사가 IMF 사태를 맞아 비몽사몽이 된 한국 땅에서 하수(?)들을 상대로 돈을 죄 쓸어가도 사기죄를 떠올리는 사람은 없다. 그런 점에서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최강자들에게 '세계화'는 참으로 근사한 변화일 거라는 생각이 든다.
바둑의 관점에서 본다면 세상살이는 약자가 강자를 거꾸로 접어줘야 하는 아주 특별히 불공정한 게임이다. 서민은 국회의원을, 중소기업은 대기업을, 국내 기업은 외국 기업을 접어준다.
바둑엔 '세력'과 '실리'라는, 서로 갈등하는 양대 축이 있다. 비유하자면 세력은 학벌이나 신용.가문 등 나중에 힘을 쓰게 되는 것이고 실리는 눈앞의 현찰을 의미한다.
그런데 세상에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부터 세력과 실리를 잔뜩 가지고 출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아예 마이너스로 출발하는 사람도 있다. 강자들은 법과 제도, 인맥의 도움을 받아 전력이 더욱 증대되고 상대적으로 약자는 더욱 약해진다. 전력의 차이는 한없이 벌어진다. 바둑이라면 9점 깔아도 상대가 안 된다. 물론 이런 양 극단의 처지에 있는 사람들이 TV 드라마에서는 종종 맞대결을 펼친다. 약자가 때로는 대 역전승을 거두며 신데렐라의 환상을 이어간다.
현실에서 약자는 강자를 이길 수 없다. 그건 토끼가 사자를 이길 수 없는 것만큼이나 명백하다. 그러므로 바둑이든 세상살이든 사자를 피하고 토끼를 상대하는 것보다 더 영리한 방법은 없다. 혹자는 운(運)을 얘기하지만 동네 바둑꾼이 조훈현 9단과 호선으로 바둑을 둔다면 대운이 따른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지만 바둑은 치수가 너무 맞지 않으면 아무 재미가 없다. 석 점 이상의 차이가 나면 그야말로 부처님 손바닥이요, 어린애 손목 비틀기가 된다. 저항할 수 없는 상대에 대한 일방적인 폭력이 된다. 세상살이도 마찬가지 아닐까. 죽어라고 뛰어봐야 평생 부처님 손바닥을 벗어나지 못한다면 재미는 고사하고 하수의 처지가 너무 처량하다. 그런 사람들을 상대로 용 한번 쓸 필요 없이 쉽게 이기는 것도 자랑은커녕 너무 뻔뻔스러운 감이 있다.
세상살이는 어차피 불공정을 피할 수 없게 되어 있다. 그러나 세상살이라는 불공정 게임에도 불문율이랄까 치수에 대한 인식이 존재한다면 좀 더 재미있지 않을까 싶어 재미로 적어본다.
▶기본적으로 맞수와의 대결을 원칙으로 한다
▶두 수 위의 강자와 싸우는 것은 무모하다
▶한 수 위의 강자에게 도전하는 것은 명예롭다
▶어린애 손목 비틀기 식의 승리는 가문의 치욕으로 여긴다
네 번째가 룰의 핵심이다. 불공정 게임의 어두운 산물이라 할 학원의 '일진'들에게 맨 먼저 이 대목을 말해주고 싶다.
박치문 바둑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