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보와 추녀야말로 서울대에 가라..."
는 이야기를 누군가 공공연히 한다면 돌무덤에 파묻히기 십상일 것이다.
학벌지상주의, 외모지상주의 등등 욕먹고 죽겠다고 결심한 사람이 아니라면 쉽사리 하기 어려운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들은 또 어떤가?
"사회에는 룰이 있다
그 위에서 살아야만 해
그렇지만 말이야 그 룰이라는 것은 전부 머리 좋은 놈들이 만든다
그건 다시 말해 어떤 의미인지
그 룰이란 전부 머리 좋은 놈들의 편의에 따라 만들어졌다는 거야
반대로 그렇지 않은 것은 알지 못하도록 잘 숨겨놓지
그렇지만 룰에 복종하는 놈들 중에 현명한 놈들은 그 룰을 잘 이용한다
예를들어 세금 연금 보험 의료제도 급여시스템
전부 머리 좋은 놈들이 일부러 알기 어렵게 해서
변변히 조사하지도 못하는 머리 나쁜 놈들한테 많이 뺏으려는 구조로 만들어놓았다
다시말해 너희들처럼 머리 쓰지않고 귀찮다고만 지껄이는 녀석들은
평생 속아서 돈을 뜯기기만 한다
현명한 놈들은 속지않고 이득을 얻고 이긴다
바보는 속고 손해를 보고 계속 진다
이게 지금 세상의 구조다
그러니까 너희들 속고 싶지 않다면 손해보고 지고 싶지 않다면 너희들 공부해!
가장 손 쉽고 빠른 방법을 알려주지 서울대에 가라.
특별진학반은 대학수험을 목표로 공부하고 싶은 녀석들이라면
조건없이 들어올 수 있다
다만 목표로 하는 대학은 서울대학교 하나 뿐
이번년도 5명의 서울대 현역합격을 목표로 한다
이건 너희들의 인생의 전환점이다"
대통령이 잘못된 통계자료까지 들이대며 서울대에 대한 반감을 공공연히 드러내는 2005년 대한민국에서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한다면 과연 어떤 반향을 불러 일으킬까?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로 오싹오싹하다.
그런데 이 말들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다. 이웃 일본의 TBS 방송국에서 여름시즌에 방송중인 '드래곤사쿠라'(일본식 이름은 드래곤자쿠라)라는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들이다. 위의 대사는 원대사에 등장하는 '동대(=동경대)'만 우리 식으로 서울대로 살짝 바꾼 것이다.
"너희들이 갈 대학은 서울대 뿐이다. 다른 대학은 생각도 하지 마라"
"서울대를 가는 것은 너희들 인생의 터닝포인트다"
이런 대사들이 아주 뻔뻔스럽게 또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드라마가 한국의 어느 공중파 방송국에서 방송된다면 어떻게 될까? 그리고 전인교육, 학생의 인성을 운운하는 교사들은 모두 자기 월급만 챙기고 실력 닦기에는 관심없는 무능력한 교사들로 그려진다면? 실제로 드래곤사쿠라는 이런 내용의 드라마다.
모르긴해도 난리가 날 것이다. 전교조는 드라마 방영 중단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방송국에 몰려가 시위를 벌일 것이고, 청와대에서는 방송국에 압력을 넣어 드라마를 조기 종영시킬 지도 모르고, 드라마를 제작한 피디와 출연 배우들은 당분간 공식 석상에 얼굴을 내밀기 힘들어질 것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는 이웃 일본에서 아주 인기리에 방영중이고, 또 국내의 일본드라마팬들(어둠의 경로를 통해 일드를 감상하는....)에게도 대단한 화제를 불러 일으키고 있다. 이 드라마의 원작은 같은 제목의 만화이다. 이 만화 역시 일본에서는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모았다. 동경대 입시의 아주 효과적인 전략과 학습법을 가르쳐준다고 해서 베스트셀러 반열에 올랐고, 심지어 서점에서는 동경대 입시수험서들과 나란히 놓여 날개 돋힌 듯 팔린다고 한다.
2005년 대한민국에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이 얼토당토않은(?) 드라마는 도대체 무슨 이야기인가. 대략적인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편차치 36의 류잔고등학교는 동경 도내에서도 아주 소문난 '바보 학교'다. 동경대 합격자를 단 한명도 못내는 것은 물론 전교생 모두가 바보에 문제아로 낙인 찍혀 있다. 갈수록 신입생은 줄어들고 방만한 학교 경영 탓에 도산위기에 처한다. 채권단은 이 학교를 문닫기 위해 변호사를 파견한다. 바로 이 인물이다.
한심하게 돌아가는 학교 꼴을 지켜본 사쿠라기 변호사는 학교 재건 계획을 발표한다. 바로 동경대 진학이다. 다음해에 동경대 합격자를 5명 내고 그 다음해에는 10명... 이런 식으로 학교를 명문진학고교로 탈바꿈 시키겠다는 계획이다. 그리고 자신이 지켜본 문제아들을 긁어모아 동경대 특별진학반을 구성한다. 바로 이 친구들이다.
그리고 사쿠라기 변호사는 외부에서 동경대 입시 전문 명강사들을 초빙해 이 문제아들과 함께 동경대 합격 1년 벼락치기에 돌입한다. 그 과정에서 여러가지 사건들이 벌어지고 시간은 흘러흘러 동경대 입학 본고사가 닥쳐온다. 총 11화로 방영예정인 이 드라마는 이상과 같은 줄거리로 현재 10화까지 방영되었다. 동경대 입학 본고사와 그 결과는 오는 9월 16일 최종화에서 드러날 예정이다.
이 드라마 중간중간에는 수험과 학습에 관련된 수많은 팁들이 등장한다. 영어는 이렇게 공부하라! 수학은 어떤 시간대에 어떻게 공부하라! 국어 시험은 이렇게 풀어라! 휴일의 학습법은 이렇고, 암기과목은 이렇게 외워라!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그 수많은 입시의 비법들 앞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이 드라마에는 쪽집게 같은 문제 집어내기는 등장하지 않는다. 그야말로 기본에 충실한, 가장 효과적인 학습법들이 소개된다.
게다가 심지어 "진정한 교육은 주입식이다!"라는 선언까지 등장한다. 전교조 선생님들과 한때 교육부총리를 지내셨던 이해찬 총리께서는 거품을 물고 쓰러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학벌지상주의에 대한 찬송으로 도배된 듯한 이 드라마는 전혀 불쾌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수많은 일드팬들이 모두 학벌지상주의에 물든 탓인가? 그렇지 않다. 이 드라마를 보고 있노라면 때로는 가슴이 훈훈해지고 때로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극중에서 밤을 지새우며 공부하는 아이들에게 응원을 보내게 된다.
그것은 이 드라마에서 그려지는 '동경대'라는 목표가 자폐아 배형진군에게 주어진 마라톤 풀코스 완주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극중에 등장하는 문제아들은 모두 나름의 아픔을 지니고 있다. 누구는 아버지가 거액의 고리대금 빚을 지고 도망치는 바람에 매일 야쿠자에게 시달리며, 누구는 명문고에 다니는 쌍둥이 동생과 늘 비교당하며 스스로 움츠려든다. 어머니에게 늘 '바보'소리를 듣는 누군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면 어머니가 꾸리는 술집 장사나 도우라고 강요당하며, 또 누구는 잘나가는 기업체 대표인 아버지로부터 아예 투명인간 취급 당한다. 아이들이 자신에게 지워진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기 위해 선택하는 것이 바로 '동경대'다. 그리고 고3이 될 때까지 아무 공부도 하지 않았던 그들은 그야말로 피를 말리는 1년간의 벼락치기에 돌입한다.
그래서 이 드라마는 아예 매번 시작할 때 마다 다음과 같은 나레이션을 깐다.
"이 드라마는 폭주족 출신의 가난한 변호사가 편차치 36의 구제불능의 고교생들을 학력사회의 최고봉 동경대학에 현역합격시킬 때까지를 그린 기적과 감동의 기억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드라마는 대단히 위험하다. 꽃미남꽃미녀들을 내세워 한줄세우기, 학력중심, 학벌중심 이데올로기를 포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라고 비판할 사람이 있을지도 모른다. 자...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대사 하나를 더 살펴보자.
"지금의 너로서는 아직 모르겠지
왜냐면 너희들 꼬맹이들은 사회에 관해 아무것도 모르니까
아니 모른다기보다 어른들이 일부러 알려주지 않는거야
그 대신에 미지의 무한의 가능성이라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무책임한 망상을 너희들에게 심어주지
그런 것에 놀아나서
개성을 살려서 남들과 다른 인생을 보낼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야
사회는 그런 시스템으로 되어 있지 않아
그걸 모른채 방치된 너희들에게 기다리는 것은
불만과 후회의 소용돌이와 현실 뿐이야"
2005년 대한민국에서 이런 이야기들이 버젓이 공중파 TV 드라마로 방송된다면? 아... 상상만으로 식은땀이 몽골몽골 솟는다.
좋다. 모두 다 좋다. 나 역시 이 드라마의 이데올로기에 100% 동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딱 한가지는 이야기하고 싶다.
한국의 교육은 꿈을 상실했다. 아이들에게 목표와 소망, 동기를 실어주는 것에 실패했다. 한국의 학교 교육만 실패한 것이 아니다. 한국의 가정 교육도 실패했다. 아이들에게 공부하라 공부하라고 이야기해도 왜 공부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아이들을 납득시키지 못한다. 게다가 학교에서는 이미 학생들에게 공부하라는 당연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죄악시된다. 그리고 부모들이 늘어놓는 좋은 직장, 사회에서의 성공은 아직 어리디 어린 아이들에게는 체감하기 힘든 너무나 먼 미래의 이야기다. 그러나 드래곤사쿠라에서 동경대 합격을 위해 내달리는 문제아들에게는 확실한 동기가 있다.
"야지마, 요즘 뭔가 잊고 있는 것 같은데 나한테 빚이 있지 않았냐?
거기다 집의 빚은 어쩔 거냐?
미즈노, 넌 싸구려 술집의 싸구려 마담이나 할래?
류잔高 졸업하자마자 '어머, 어서오세요~'
그러면서 단란 주점 마담이나 할 거냐고?
오가타, 이제 범인 취급 당하는 거 지겹잖아? 넌덜머리가 나지?
오쿠노.. 슈메칸高 다니는 동생한테 보란듯이 되갚아 주고 싶지 않냐?
코바야시..네 외모로 탤런트를 하자면
도쿄대라는 브랜드 없인 그야말로 꿈 같은 얘기 아니냐?"
누군가 드래곤사쿠라를 비판하고자 한다면 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먼저 던질 것이다. 당신은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자신을 불태워 본 적이 있느냐고.... 그리고 당신이 서 있는 곳은 저 하늘의 구름 위인가, 이 대지 위인가 라고......
이제 일본드라마 드래곤사쿠라는 대망의 최종화를 앞두고 있다.
드래곤사쿠라가 던지고 있는 문제의식들은 결코 가볍지 않다. 빠른 속도감으로 자못 가볍고 경쾌하게 흘러가는 드라마지만 그 내용만큼은 특히 우리 사회에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꼭 이 드라마를 보시라. 일본드라마나 영화에서 소재를 빌어와 한국에서도 간혹 리메이크판이 나오지만 이 드라마만큼은 참으로 어려울 것 같다. 사회적인 반발은 둘째치고, 정말 정권과의 목숨을 건 혈투를 각오하지 않고서는 제작 자체가 불가능할 것이다.
이 드라마의 주인공 사쿠라기 변호사는 폭주족 출신이며 동경대를 나오지 못했고 2차례 낙방 끝에 사시에 합격한 인물이다. 그리고 동경대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동대같은 브랜드...거룩히 여기는 놈들을 보면 구역질이 나
지들이 동대에 갔다는 것만으로
인생 성공했다고 생각하는 녀석들,
눈앞의 상대가 동대를 나왔다는 것을 아는 순간에
비굴해지는 녀석들 모두 천박한 것들이야"
그렇지만 그는 동경대를 없애야 한다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동경대와 학벌지상주의가 일본 사회의 큰 문제라고 이야기하지 않는다. 대신에 그는 이렇게 외친다. 이 외침에 대한 당신의 답은 무엇인가?
"바보와 추녀야말로 동대에 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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