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방 길벗어린이 문학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작게 삶으로 060 보리 한 톨과 글 한 줌



《작은 책방》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길벗어린이

1997.1.30.



내가 어릴 적에 내 손은 책보다 흙을 더 만졌다. 공기놀이, 제기차기, 땅따먹기, 그림 그리기를 마당이나 흙길에서 했다. 경북 의성 멧골자락 시골집인데, 예전에 이런 시골에서 집안에 책을 쌓아놓고 볼 어버이가 있었을까. 우리 어버이조차 흙을 일구는 삶이었고, 우리는 책을 읽고 싶을 나이에 책은 우리한테 너무 멀리 있었다.


《작은 책방》을 쓴 엘리너 파전 님은 “책 없이 사는 것보다 옷 없이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던 시절”을 보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니 어쩐지 이 책을 쓴 분이 부럽다. 글님은 어린날 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달콤했을까.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살았기에, 또 우리 어버이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버이도 거의 배우지 못 한 삶을 보내셔서, 이래저래 책하고는 담을 쌓으며 자랐다. 여태 못 읽은 책에, 새로 나온 책에, 온통 못 본 책뿐이다.


우리 아들은 한때 책에 파묻혀 보낸 나날이 조금 있었다. 쭉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책을 만지고 밟을 만큼 책을 쌓아놓았다. 책하고 가깝게 지내라고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고, 이웃집에서 빌리기도 했다. 바닥에 웅크리고 책을 보는 아들을 보면 그저 배가 불렀다. 내가 하지 못 한 일을 아이가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아이가 해주는 듯했다. 나중에 집을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난 뒤에는, 마루를 통째로 책방처럼 꾸렸다. 다만, 셋째인 아들에 앞서 첫째랑 둘째 아이를 돌볼 적에는 그만 두 아이한테 책을 읽히는 버릇을 들일 때를 놓쳤다. 셋째하고 나만 책방을 누리는 셈이다. 


세 아이는 다 자라서 저마다 이 집을 떠났다. 이제 나는 ‘내 작은 책방’을 호젓이 누린다. 《작은 책방》을 천천히 읽었다. 글님은 온갖 책을 골고루 책을 읽으며 살아온 티가 물씬 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는 여태 ‘작가 흉내’를 내려고 했구나 싶어 부끄럽다. 엘리너 파전 님이 쓴 글에는 내가 뛰어놀던 시골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잘 녹아든다. 이 책만 읽어도 골짜기와 바람과 풀꽃나무가 자라는 들숲이 흐르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흐른다. 숨결이 살아나는 글이란 이런 책을 놓고 말하는구나 싶더라. 글줄마다 노래처럼 싱그럽고 매끄럽고 촉촉하다. 아! 나는 여태까지 참으로 메마른 글만 읽었구나. 왜 진작 이런 글과 책을 읽을 생각을 못 했을까?


두 대목을 손꼽아 보고 싶다. 〈보리와 임금님〉 꼭지에서는, 임금님이 아버지 보리밭을 불태우고 마는 바람에 살아갈 일이 아득하지만, 손바닥에 붙은 이삭 몇 알을 밭 한가운데 심으면서 따뜻하게 품고 앞날을 그리는 보리 낱말 이야기가 뭉클했다. 


또 하나는 〈일곱째 공주님〉 꼭지가 좋았다. 성 밖을 나가서 춤도 추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고 날마다 지붕에 올라가 날이 저물 때까지 동쪽 푸른 풀밭과 남쪽 잔잔한 강, 서쪽 언덕과 북쪽 시장을 내려다보았다지. 임금님은 일곱 공주 가운데 머리칼이 가장 긴 공주를 여왕으로 삼겠다고 하자, 여섯 공주가 머리 손질에 마음을 쓰는 동안 왕비는 일곱째 공주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강으로 언덕으로 풀밭으로 시장으로 다니라고 했다. 왕비가 하고 싶던 대로 공주를 키운 대목이 마음에 든다. 글님이 어릴 적에 몸이 아파서 그만 집에 오래오래 머물러야 하던 즈음 마음껏 읽었다고 하는 책은, 바로 글님 스스로 여린 몸이 튼튼하게 살아나서 신나게 들판을 달리고 싶은, 그야말로 숲빛으로 빛나는 꿈이었구나 싶다.


풀꽃나무와 비바람과 해달별이 감도는 이 책은 한글판이 나온 지 서른 해가 지나도 빛난다. 그러고 보니, 1997년에는 《작은 책방》으로 나왔지만, 1970년대에는 《보리와 임금님》이란 이름으로 이미 나와서 널리 읽혔다고 한다. 나는 1970년대 어릴 적에는 《보리와 임금님》을 못 보았지만, 2023년이 저물려는 이맘때에 《작은 책방》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을 읽는다. 2024년 새해를 앞두고 새로운 출판사에서 새롭게 옮긴 판이 나왔는데, ‘보리와 임금님’을 ‘왕과 보리밭’으로 바꾸어서 아쉽다. ‘보리’가 ‘임금’보다 아름답지 않을까?


글이 늙지 않는 까닭은 숨결이 싱그럽게 흐르기 때문인지 모른다. 요즘 나오는 동화책을 보면, 숲이 사라지고 잿빛으로 커다란 도시 얘기가 아주 많다.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억지스럽게 꾸미는 동화가 많다. 자꾸 싸움을 부추기거나, 서로서로 겨루거나 다투면서 피를 흘리고 괴롭히는 재미로 쓴 동화가 너무 많이 보인다. 시인들은 일부로 삶(서정)을 지워 버리는 글을 쓴다. 숲을 밀어서 집을 짓고 길을 닦고 흙마저 보기 힘느는 판인데, 이제는 시도 동화도 모든 글도 숲이 사라져간다. 앞으로 우리 아이뿐 아니라, 새로 태어날 아이들은 숲을 어떻게 떠올릴까.


《작은 책방》은 참으로 훌륭하다. 겉치레라고는 찾을 수 없다. 억지스런 말조차 없다. 엘리너 파전 님은 “어린이가 어떤 어조에 반응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린이한테 맞추어 쉽게 쓰겠다는 생각 버리고, 어린이 수준에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어린이가 모른다고 생각되는 언어와 사건을 쓰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눈을 감아 본다. 나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내가 어린 날을 떠올려 본다. 우리 아이들 어린 날을 떠올린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는지 실마리를 푼다. 《작은 책방》은 옮긴 말씨도 한몫 부드러이 거든다. 글과 말빛을 살리며 밑바탕에 깔린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이 건네주는 책은 뭔가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별 이야기가 가득하다.


2023.12.06.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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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작게 삶으로 059 돈과 바꾼 목숨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1.11.10.



집에 있는 어느 책을 찾다가 못 찾았다. 이것저것 집다가 몇 줄 읽고 덮다가 문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펼친다. 짧게 쓴 글을 모으면서 첫 글로 책이름을 땄다. 몇 쪽 읽을 즈음 짝한테서 전화가 온다. 운동을 한다며 나갔는데 갑자기 가슴 쪽이 아파서 꼼짝을 못 한단다. 책은 얼른 덮고서 바삐 태우러 간다. 언덕에서 짝을 태워 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다. 가슴이 아픈 사람이 말을 너무나 씩씩하게 하더라. 게다가 아침에 무를 깎다가 엄지손가락을 베어 피가 조금 났다. 다친 손이라고 그런지 모르지만, 아침에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서 “내가 이따 와서 쓰레기 버릴게.” 하고 말하고 간 사람인데, 병원에서 하루를 묵을 줄 몰랐다. 병실이 없다기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피를 묽게 하더라. 병원에 온 지 열두 시간이 지나고서야 들여다본다. 날핏줄(동맥)로 무얼 넣어서 핏줄을 뚫고 넓힌다더라. 짝은 미리 몸을 풀지 않고서 갑자기 운동을 거세게 하느라 핏줄이 막혔단다. 큰일이 날 뻔했다.


하루를 가라앉히고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마저 읽는다. 그러나 왜 새가 페루에서 죽는지는 안 나온다. ‘새 노릇’이 끝나면 오는 곳이라는데, 새가 태어나서 맡은 일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 먼 곳까지 가서야 죽는다는 소리일까. 궁금하지만 풀지 못 했다.


짧막한 글에 전쟁 이야기가 슬쩍 나온다. 페루란 나라가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 마추픽추와 잉카제국이 사라진 자국이 있는 곳이다. 한때 빛나면서 잘살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슬처럼 사라진 나라와 사람들 발자취를 새처럼, 새가 죽었다고 빗대는 말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끼듯 풀어낸 글인가.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헷갈리고 어지러웠다. 옮김말 탓일까. 영생, 고독, 위험, 희망, 과학, 욕구, 안색, 영혼, 시적, 몽상적, 사랑, 유혹, 물욕, 아름답다, 슬픔, 집요, 존재, 흡족, 퇴페적, 전쟁, 희극적, 냉소적, 운명, 환상, 지옥, 저주, 조롱, 원한, 세계 같은 말이 뒤죽박죽 흩어지는데, 어떤 삶과 끝을 말하려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머리에 아무 그림이 안 나왔다. 


내가 우리말을 모르는지, 우리말이란 워낙 이러한지 모르겠다. 이 낱말 저 낱말 자꾸 쪼개고 또 쪼개어 놓으면, 줄거리도 모르겠고 이야기도 갈피를 못 잡겠다. 그렇지만 나도 한때 이렇게 낱말을 쪼개고 늘어놓고 흩뜨리는 글을 시랍시고 곧잘 썼다.


이제 숨을 돌리고 잘 자는 짝을 들여다보다가, 덮은 책을 다시 들추다가, 글에 왜 한자말을 자꾸 넣는지 헤아려 본다. 한자말을 안 쓸 수 없겠지만, 구태여 끼워넣는 한자말이 많지 않을까. 더 쉽게 우리말로 쓰기만 해도 잔잔하게 마음을 달래고 밝힌다고 본다. 


옮김말을 다시 찬찬히 본다. 꾸미는 말이 많다. 글이 무겁고 겹말이 많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여섯 가지에 맞추어 쓰라는 얼거리를 되돌아본다. 속뜻을 살리려는 길에서 먼, 꾸미는 치레가 없어야 이야기가 환하다는 얼거리도 되새긴다.


새는 사람처럼, 오늘 우리 짝처럼 갑자기 가슴이 아프지는 않을까.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다른 큰짐승한테 먹이감이 되어 주는가.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새로서는, 죽음자리를 앞으로 다시 태어날 자리로 삼는가.


짝이 누운 병원에는 몸이 늙고 잘 걷지도 못하고 마음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거쳐 가는 곳 같다. 가래가 끓는 소리가 넘친다. 목구멍에 줄을 길게 서넛 달고서 통에 담긴 바람으로 숨을 겨우 쉬는 사람을 본다. 드러누워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에, 이곳저곳 아파서 쫓아오는 마지막 자리로 가는 길에 선 사람을 본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땀흘려 그러모은 돈을 병원에 몽땅 바치고서 빈털터리로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새는 페루에 가서 죽는다면, 사람은 병원에 가서 돈을 다 쏟아붓고서 죽는 듯하다. 새는 새몸으로 가려고 페루로 간다면, 사람은 돈하고 목숨줄을 바꾸면서 겨우겨우 버티는지 모른다. 이제 그만 읽자. 책을 덮는다.


2023.11.0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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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니스의 황금새 1 - 시프트코믹스
하타 카즈키 지음 / YNK MEDIA(만화)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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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8 글을 쓰는 여자



《카이니스의 황금새 1》

하타 카즈키 지음

정혜영 옮김

YNK MEDIA

2020.10.10.



만화책 《카이니스의 황금새 1》를 읽었다. 예전 영국에서 소설을 쓰는 여자를 다룬다. 주인공 리아가 앨렌으로 꾸민다. 여자라는 몸을 남자처럼 바꾼다. ‘여자는 글을 쓰면 안 된다’고 여길 뿐 아니라, ‘여자 주제에 소설을 쓸 수 없다’고 얕보던 무렵이라, ‘여자인 리아로 쓴 소설’이지만 ‘남자처럼 꾸민 앨런이 쓴 글’이라고 숨겨서 내놓는다.


글을 쓰며 살아가는 꿈을 키우고 싶은 리아는 시골을 떠나서 런던으로 가려고 한다. 소설이든 글이든 누구나 쓸 수 있고, 그야말로 누구나 배우며 꿈을 펼 수 있는데, 성별로 가르고 따돌리는 굴레가 너무 단단하기에 남자처럼 꾸미기로 한다. 머리카락을 짧게 치고, 앞가슴을 가리고, 바지를 입는다. 나중에 소설이 널리 읽히면 그때에 비로소 ‘나는 여자이지만, 이렇게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소설을 쓸 수 있습니다’ 하고 밝히자고 생각한다.


그제 짝하고 주고받은 말을 떠올린다. 밥을 먹던 짝은 “내가 먼저 죽으면 시골 물려받은 땅 팔지 말고 아들한테 그대로 물려줘라” 하고 말하더라. “당신은 나보다 더 오래 살 거예요. 운동도 그렇게 부지런히 하잖아요. 나는 머리가 자주 아프니 언제 불이 꺼질지 몰라. 내가 먼저 갈 테니 걱장 마소.” 하고 대꾸했다. 그때 말은 이렇게 했지만 짝답지 않아 보이더라.


혼자 속으로 생각했다. 나는 ‘류씨 집안’이 아니지만, 왜 내가 아닌 셋째 아이인 아들한테 시골땅을 물려주려고 하는지 섭섭했다. 첫째하고 둘째는 딸인데, 왜 첫째하고 둘째 몫은 생각을 안 하는지 서운했다.


친정에서는 딸이 나 혼자이다. 아버지가 돌아가실 적에 마당 담벼락 한 평짜리 땅이라도 받고 싶었다. 나도 아버지 딸인데, 나만 없는 사람 같더라. 그렇지만 엄마는 딸인 내 몫은 없고 아들 넷 몫으로 나누어 놓았더라. 나는 엄마한테 한 평도 못 주냐고 말을 못 했지만 속으로 섭섭했다. 고작 한 평을 받아서 어디 쓰겠냐마는, 고작 한 평을 받더라도 우리 시골집을 통째로 받은 오빠한테 바로 돌려줄 마음이지만, 나는 우리 엄마가 시골땅을 어떻게 나누려는 마음인지 듣고 싶었는지 모른다.


짝이 ‘류씨 집안 시골땅’을 막내인 아들한테만 물려주려는 줄 우리 두 딸이 안다면, 이다음에 섭섭하게 생각할는지 모른다. 나도 그랬는걸.


아직도 남녀 차별은 구석구석 밑바탕에 깔렸다고 여긴다. 반쪽씩 만나 오롯이 하나를 이루며 집안을 꾸리고 마을이 되고 나라가 되는 동안, 힘과 돈과 이름은 모두 남자 쪽이 쥔다. 맞벌이를 하면 여자는 밥줄을 걱정하느라 풀이 죽는다. 더러는 남자를 뛰어넘지만, 어떤 자리이냐에 따라 다르기도 하지만, 남자가 집과 땅과 돈(재산)을 맡아야 한다는 생각을 어릴 적부터 집집마다 딱 굳혀 놓았는지 모른다. 내가 자랄 적에도 우리 엄마아빠는 외동딸인 나는 학교에 안 보내려고 했다. 공부를 안 하겠다는 오빠는 억지로 학교에 보냈다. 


우리 엄마도 여자이면서 여자인 나를 꾹 눌렸다. 여자는 여자한테 스스로 물러났다. 나도 여자이면서 어머니이면서 남자를 치켜세운다. 남자인 짝꿍은 물려줄 돈(재산)은 고스란히 아들 몫으로만 챙긴다. 우리가 물려줄 돈이 얼마나 있으랴마는, 우리가 물려받을 어르신 시골땅은 그대로 아들 쪽으로만 물려주어야 한다는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카이니스의 황금새 1》를 곰곰이 돌아본다. 소설 하나를 쓰는 일에서도 성별을 놓고 따돌리니까, 만화에 나오는 사람은 여자인 몸을 감춘다. 남자로 겉모습을 바꾼다. 나는 ‘숲하루’라는 글이름을 쓴다. 둘레에는 나처럼 ‘남자인지 여자인지 또렷이 드러나도록 물려받은’ 이름을 안 쓰는 분이 많다. 요즘은 글쓴이 이름만으로는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기 어렵다. 남자인 줄 알았는데 여자이고 여자인 줄 알았는데 남자인 시인을 많이 봤다. 이들도 어쩌면 《카이니스의 황금새 1》에 나오는 사람 같은 마음이 아닐까. 


글을 쓰는 자리를 생각해 본다. 나는 예전에는 밤늦게 글을 쓰다가, 요즘은 일을 마치고 와서 이른저녁쯤에 쓴다. 나는 머리카락을 짧게 치면서 남자 옷을 바꾸어 입지 않으면서 나답게 가고 싶다. 요즘 둘레를 보면, 옷은 뒷배 같다. 어디에 자리를 잡느냐에 따라 이름이 하루아침에 바뀌기도 하고, 글쓰기보다 문단권력 같은 힘에 따라서 책이 뜨는 듯싶고, 책방에서도 이런 문단권력을 덩달아 띄운다고 느낀다. 나는 느리지만 내 모습 그대로 글을 쓰고 싶다.


2023.11.11.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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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리빵 2
토리노 난코 지음, 이혁진 옮김 / AK(에이케이)커뮤니케이션즈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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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7 가을 감잎



《토리빵 2》

토리노 난코

이혁진 옮김

AK 커뮤니케이션즈

2011.3.5.



《토리빵 2》을 보면 처음에 감잎이 나온다. 다시 보아도 참 곱다. 감잎은 붉은빛이 가장 돌 적에 곱다고 느낀다. 푸릇하던 잎이 발갛게 물들면서 새롭게 오는 철을 알려주는 듯하다.


올해는 감잎에 홀딱 반했다. 곱게 물든 가랑잎을 책에 끼워 놓으면 이내 바랜다. 단풍나무잎만 붉은 그대로 있지만, 여느 잎은 노랗고 빨갛게 곱던 잎이 흙빛이 되더라. 감잎을 몇 군데서 땄다. 팔공산에서 만난 감잎은 크고 아직 푸릇했다. 팔공산 미술관 옆 빈터에 감나무 한 그루 있는데, 잎이 손바닥보다 크고 붉게 물들었다. 몇 자락을 땄다. 계명대 뜰에서 만난 감나무는 잎이 몇 안 남았는데 가장 빨갛게 물이 들었다. 팔이 닿는 데까지만 감잎을 따 보았다.


《토리빵 2》을 읽다가 큰아이 어린 날을 떠올린다. 세이레 동안 젖을 먹이고서 시골집에 맡기고 일을 하러 나갔는데, 큰아이는 시골집에서 걸음마을 뗀 뒤로는 닭하고 오리하고 놀았다. 등겨를 떠서 부어 주면, 닭은 한쪽으로 몰려서 우리 딸을 지켜보곤 했다. 시골을 가까이서 보며 자란 큰딸인데, 이젠 서울티가 나는 아가씨로 자랐다. 흙을 만지고 밭에서 뛰어놀던 아이가 학교를 마치고 서울살이로 뿌리를 내리며 시골하고 더 멀어졌다.


그러나 나도 큰딸처럼 살림이나 보금자리보다 일자리를 찾아서 움직였는걸. 서울티가 나는 삶으로 나아간 큰딸도 일 때문이겠지. 큰딸은 어린날 함께한 오리랑 닭이랑 강아지랑 나락을 떠올릴까? 시골빛을 만지고 놀던 그때를 떠올릴까?


아마 내가 모를 뿐, 큰딸은 큰딸대로 시골빛을 이따금 떠올리겠지. 몸에 물든 빛은 어느 날 가만히 깨어나겠지. 아이들은 저마다 무언가 새롭게 배우려고 태어나리라 본다. 나도 우리 어버이가 못 다한 무언가를 배우려고 태어났을 테고, 우리 짝꿍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들이 어릴 적에는 아이들한테 이모저모 가르친다고 하지만, 막상 돌아보면 아이한테서 배우는 대목이 아주 많다. 큰딸이 속으로 품는 사랑을 머잖아 나도 받아들여서 좀더 따뜻하게 이 삶을 바라보고 풀어낼 수 있겠지.


며칠 동안 우리 집 모이터 물이 꽁꽁 얼었다. 비둘기가 왔다가 그냥 가고 작은 새가 왔다가 그냥 갔다. 멸치 머리를 담아 놓은 그릇을 비웠다. 물을 끓여 얼음에 부었다. 곧 다시 얼겠지만 한 모금이라도 축이기를 바란다. 헛걸음을 하고 돌아가는 새를 보면 마음이 아프다. 무언가 바라고 우리 집까지 날아왔을 텐데, 먹이도 없고 물마저 얼면 새로서도 섭섭해서 유리창에 똥만 뿌직 남기고 날아가지 싶다.


이제 《토리빵 2》을 덮는다. 그림도, 그림에 붙는 말도, 어쩜 하나하나 노래 같다. 새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조촐하게 여민 작은 만화책은 통째로 노래 같다. 시가 달리 있겠는가. 이렇게 가을빛을 이야기하고, 새가 들려주는 노래를 듣고, 하루를 곰곰이 돌아보도록 북돋우는 글이라면, 모두 노래이리라.


2023.12.03.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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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자르러 왔습니다 1
타카하시 신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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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6 시골로 떠난 서울사람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1》

타카하시 신

정은 옮김

대원씨아이

2021.9.8.



요즘은 시집보다 만화책에 흠뻑 빠진다. 엊그제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1》를 읽었다. 도무지 알아듣기 어려운 요즈음 시보다는, 이름난 시인을 흉내낸 듯한 시보다는, 우리 삶을 꾸밈없이 담아내는 만화책에 끌린다.


만화책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1》에는 ‘혼자살기’에 익숙한 젊은 아버지가 나온다. 이이는 사랑하는 짝을 만나서 도쿄에서 함께 살아왔지만, 둘이 일구는 삶을 짊어지지 못 하고 달아나려고 했다. 짝도 마주하지 못 하고, 아이도 바라보지 못 하는 채 살던 젊은이는 도쿄를 떠나 작은 섬마을로 삶터를 옮긴다. 아이는 젊은 아버지를 따라 섬마을로 터전을 옮긴다.


그러니까 서울(도쿄)에서 달아나 시골(섬)에서 새터를 일구려고 하는 줄거리를 다루는 만화책이다. 번듯번듯하고 숨을 쉴 틈이 없이 빽빽한 서울을 떠난 두 사람(아버지와 아들)은 낯선 시골(섬)에서 모든 것이 어렵고 어찌할 바를 모른다. 젊은 아버지는 더더욱 벅차다. 그러나 어린 아들은 말없이 아버지를 이끌고, 천장이 뚫린 허름한 시골집이 오히려 둘이 아늑히 누릴 보금자리라고 여긴다.


천장에 구멍이 나서 비가 샐 집인데, 아이는 오히려 밤에 별을 보기에 좋다고 여기면서 반긴다. 젊은 아버지는 서울(도쿄)에서 일할 적에 별을 본 적이 없는 줄 깨닫는다. 비록 천장 뚫린 허름한 시골집이지만, 이곳에서는 아이하고 마음을 터놓고서 살아갈 수 있겠다고 여기면서 눈물에 젖는다.


내 삶을 돌아본다. 나는 은행 일자리를 그만두고 나서는, 내가 맡을 만한 일이 없다고 여겼다. 어느 한 가지 일을 제법 잘 하던 무렵에는 딱히 걱정이 없었지만, 정작 이 일을 그만두어야 할 적에는 ‘아! 나한테는 먹고살 기술이 없잖아!’ 싶더라.


그래도 나하고 짝꿍은 둘이서 가게를 하나 차렸다. 둘이 새롭게 찾은 일자리는 모두 낯설고 어렵지만, 함께 머리를 맞대고 땀을 흘리면서 어찌저찌 오늘까지 살아왔다. 그런데 이즈음에 와서 이 가게도 접어야 할 때가 된 듯싶다. 이제 마을가게는 버티기 어렵고, 아주 커다란 가게나 편의점만 남는 철이다.


《머리를 자르러 왔습니다 1》를 보면, 두 사람(아버지와 아들)이 마을사람한테 꾸벅하고 절을 해도 대꾸가 거의 없다. 두 사람은 왜 이렇게 쌀쌀맞아 보이는지 처음에는 모른다. 그러나 ‘섬에 살려고 들어왔다’가 ‘섬(시골)을 못 버티고 떠나는 사람’을 너무나 자주 많이 보아 온 시골사람(섬사람)이기에 처음부터 마음을 열거나 말을 터주지 않는 셈이더라.


만화책을 보면, 아홉 살 아이가 젊은 아버지보다 대견하고, 집안일도 잘 꾸린다. 아홉 살이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다. 좀 서툴더라도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많고, 집안도 마을도 읽을 줄 안다. 젊은 아버지는 어린 아들을 물끄러미 지켜보면서 조금씩 마음을 열고, 천천히 깨닫고 배운다. 가위질(미용 기술) 하나밖에 없다고 여긴 삶이었지만,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리라고 속으로 생각한다. 조금 더 잘 하지 못 하더라도 이 아이하고 이 시골에서 조금 더 천천히 살아가면서 스스로 거듭날 만하겠다고 생각한다.


만화책을 덮는다. 뒷이야기가 길다. 첫 이야기만 보고 생각해 보면, 요즈음 시골이라는 곳에서는 혼자서 생각에 잠기면서 바다나 숲을 하염없이 바라볼 틈이 많을 만하다. 서울이나 대구처럼 커다란 고장에서는 멍하니 있기 어렵고, 둘레가 시끄럽다. 그러나 시골이나 섬이라면, 아이하고 오롯이 둘이서 바닷소리도 숲소리도 마음으로 맞아들일 만하겠지.


꾸미지 않아도 아름답다. 아니, 안 꾸미기에 아름답다. 삶 그대로 보여주기에 아름답다. 그래, 삶을 그대로 드러내기에 마음이 뭉클하다. 내가 나고 자란 의성 멧골처럼 이곳 대구가 시골로 바뀔 일은 없을 듯하지만, 아이한테도 어른한테도 오히려 시골이 서로한테 이바지하지 않겠느냐 싶다. 조용히 스스로 돌아보고, 조용히 푸른들과 파란바다를 바라볼 적에, 스스로 마음에 일어나는 빛이 있지 않을까. 언제나 사랑이 샘솟는 길이란 무엇일까 하고 한참 생각해 본다.


2023.12.06.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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