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책방 길벗어린이 문학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 길벗어린이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작게 삶으로 060 보리 한 톨과 글 한 줌



《작은 책방》

엘리너 파전 지음

에드워드 아디존 그림

햇살과나무꾼 옮김

길벗어린이

1997.1.30.



내가 어릴 적에 내 손은 책보다 흙을 더 만졌다. 공기놀이, 제기차기, 땅따먹기, 그림 그리기를 마당이나 흙길에서 했다. 경북 의성 멧골자락 시골집인데, 예전에 이런 시골에서 집안에 책을 쌓아놓고 볼 어버이가 있었을까. 우리 어버이조차 흙을 일구는 삶이었고, 우리는 책을 읽고 싶을 나이에 책은 우리한테 너무 멀리 있었다.


《작은 책방》을 쓴 엘리너 파전 님은 “책 없이 사는 것보다 옷 없이 사는 것이 더 자연스러웠다”고 이야기한다. “책을 읽지 않는 것은 밥을 먹지 않는 것만큼이나 이상하게 생각하던 시절”을 보냈다고도 한다. 이런 이야기를 읽으니 어쩐지 이 책을 쓴 분이 부럽다. 글님은 어린날 책을 읽는 재미가 얼마나 달콤했을까.


나는 시골에서 태어나 살았기에, 또 우리 어버이 살림이 넉넉하지 않아서, 어버이도 거의 배우지 못 한 삶을 보내셔서, 이래저래 책하고는 담을 쌓으며 자랐다. 여태 못 읽은 책에, 새로 나온 책에, 온통 못 본 책뿐이다.


우리 아들은 한때 책에 파묻혀 보낸 나날이 조금 있었다. 쭉 이어지지는 못했지만, 책을 만지고 밟을 만큼 책을 쌓아놓았다. 책하고 가깝게 지내라고 책을 도서관에서 빌리기도 하고, 이웃집에서 빌리기도 했다. 바닥에 웅크리고 책을 보는 아들을 보면 그저 배가 불렀다. 내가 하지 못 한 일을 아이가 하고,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아이가 해주는 듯했다. 나중에 집을 조금 큰 곳으로 옮기고 난 뒤에는, 마루를 통째로 책방처럼 꾸렸다. 다만, 셋째인 아들에 앞서 첫째랑 둘째 아이를 돌볼 적에는 그만 두 아이한테 책을 읽히는 버릇을 들일 때를 놓쳤다. 셋째하고 나만 책방을 누리는 셈이다. 


세 아이는 다 자라서 저마다 이 집을 떠났다. 이제 나는 ‘내 작은 책방’을 호젓이 누린다. 《작은 책방》을 천천히 읽었다. 글님은 온갖 책을 골고루 책을 읽으며 살아온 티가 물씬 난다. 이 책을 읽다 보면, 나는 여태 ‘작가 흉내’를 내려고 했구나 싶어 부끄럽다. 엘리너 파전 님이 쓴 글에는 내가 뛰어놀던 시골 모습이 마치 그림처럼 잘 녹아든다. 이 책만 읽어도 골짜기와 바람과 풀꽃나무가 자라는 들숲이 흐르고 강이 흐르고 바다가 흐른다. 숨결이 살아나는 글이란 이런 책을 놓고 말하는구나 싶더라. 글줄마다 노래처럼 싱그럽고 매끄럽고 촉촉하다. 아! 나는 여태까지 참으로 메마른 글만 읽었구나. 왜 진작 이런 글과 책을 읽을 생각을 못 했을까?


두 대목을 손꼽아 보고 싶다. 〈보리와 임금님〉 꼭지에서는, 임금님이 아버지 보리밭을 불태우고 마는 바람에 살아갈 일이 아득하지만, 손바닥에 붙은 이삭 몇 알을 밭 한가운데 심으면서 따뜻하게 품고 앞날을 그리는 보리 낱말 이야기가 뭉클했다. 


또 하나는 〈일곱째 공주님〉 꼭지가 좋았다. 성 밖을 나가서 춤도 추고 싶은데 나가지 못하고 날마다 지붕에 올라가 날이 저물 때까지 동쪽 푸른 풀밭과 남쪽 잔잔한 강, 서쪽 언덕과 북쪽 시장을 내려다보았다지. 임금님은 일곱 공주 가운데 머리칼이 가장 긴 공주를 여왕으로 삼겠다고 하자, 여섯 공주가 머리 손질에 마음을 쓰는 동안 왕비는 일곱째 공주를 데리고 지붕으로 올라가 머리를 짧게 자르고 강으로 언덕으로 풀밭으로 시장으로 다니라고 했다. 왕비가 하고 싶던 대로 공주를 키운 대목이 마음에 든다. 글님이 어릴 적에 몸이 아파서 그만 집에 오래오래 머물러야 하던 즈음 마음껏 읽었다고 하는 책은, 바로 글님 스스로 여린 몸이 튼튼하게 살아나서 신나게 들판을 달리고 싶은, 그야말로 숲빛으로 빛나는 꿈이었구나 싶다.


풀꽃나무와 비바람과 해달별이 감도는 이 책은 한글판이 나온 지 서른 해가 지나도 빛난다. 그러고 보니, 1997년에는 《작은 책방》으로 나왔지만, 1970년대에는 《보리와 임금님》이란 이름으로 이미 나와서 널리 읽혔다고 한다. 나는 1970년대 어릴 적에는 《보리와 임금님》을 못 보았지만, 2023년이 저물려는 이맘때에 《작은 책방》이란 이름으로 나온 책을 읽는다. 2024년 새해를 앞두고 새로운 출판사에서 새롭게 옮긴 판이 나왔는데, ‘보리와 임금님’을 ‘왕과 보리밭’으로 바꾸어서 아쉽다. ‘보리’가 ‘임금’보다 아름답지 않을까?


글이 늙지 않는 까닭은 숨결이 싱그럽게 흐르기 때문인지 모른다. 요즘 나오는 동화책을 보면, 숲이 사라지고 잿빛으로 커다란 도시 얘기가 아주 많다. 상상력이라는 이름으로 억지스럽게 꾸미는 동화가 많다. 자꾸 싸움을 부추기거나, 서로서로 겨루거나 다투면서 피를 흘리고 괴롭히는 재미로 쓴 동화가 너무 많이 보인다. 시인들은 일부로 삶(서정)을 지워 버리는 글을 쓴다. 숲을 밀어서 집을 짓고 길을 닦고 흙마저 보기 힘느는 판인데, 이제는 시도 동화도 모든 글도 숲이 사라져간다. 앞으로 우리 아이뿐 아니라, 새로 태어날 아이들은 숲을 어떻게 떠올릴까.


《작은 책방》은 참으로 훌륭하다. 겉치레라고는 찾을 수 없다. 억지스런 말조차 없다. 엘리너 파전 님은 “어린이가 어떤 어조에 반응한다고 생각하지 말고, 어린이한테 맞추어 쉽게 쓰겠다는 생각 버리고, 어린이 수준에 맞추려고 애쓰지 말고, 어린이가 모른다고 생각되는 언어와 사건을 쓰는 것을 겁내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눈을 감아 본다. 나는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내가 어린 날을 떠올려 본다. 우리 아이들 어린 날을 떠올린다. 아이들한테 물려줄 글은 어떤 모습이어야 할는지 실마리를 푼다. 《작은 책방》은 옮긴 말씨도 한몫 부드러이 거든다. 글과 말빛을 살리며 밑바탕에 깔린 마음을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이 건네주는 책은 뭔가 다르다. 우리가 살아가는 별 이야기가 가득하다.


2023.12.06.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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