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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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59 돈과 바꾼 목숨줄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

로맹 가리 지음

김남주 옮김

문학동네

2001.11.10.



집에 있는 어느 책을 찾다가 못 찾았다. 이것저것 집다가 몇 줄 읽고 덮다가 문득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펼친다. 짧게 쓴 글을 모으면서 첫 글로 책이름을 땄다. 몇 쪽 읽을 즈음 짝한테서 전화가 온다. 운동을 한다며 나갔는데 갑자기 가슴 쪽이 아파서 꼼짝을 못 한단다. 책은 얼른 덮고서 바삐 태우러 간다. 언덕에서 짝을 태워 바로 대학병원 응급실로 갔다. 


처음에는 거짓인 줄 알았다. 가슴이 아픈 사람이 말을 너무나 씩씩하게 하더라. 게다가 아침에 무를 깎다가 엄지손가락을 베어 피가 조금 났다. 다친 손이라고 그런지 모르지만, 아침에 나가다가 다시 들어와서 “내가 이따 와서 쓰레기 버릴게.” 하고 말하고 간 사람인데, 병원에서 하루를 묵을 줄 몰랐다. 병실이 없다기에 응급실에서 하룻밤을 보내는데 피를 묽게 하더라. 병원에 온 지 열두 시간이 지나고서야 들여다본다. 날핏줄(동맥)로 무얼 넣어서 핏줄을 뚫고 넓힌다더라. 짝은 미리 몸을 풀지 않고서 갑자기 운동을 거세게 하느라 핏줄이 막혔단다. 큰일이 날 뻔했다.


하루를 가라앉히고서 《새들은 페루에 가서 죽다》를 마저 읽는다. 그러나 왜 새가 페루에서 죽는지는 안 나온다. ‘새 노릇’이 끝나면 오는 곳이라는데, 새가 태어나서 맡은 일은 무엇일까. 왜 이렇게 먼 곳까지 가서야 죽는다는 소리일까. 궁금하지만 풀지 못 했다.


짧막한 글에 전쟁 이야기가 슬쩍 나온다. 페루란 나라가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 마추픽추와 잉카제국이 사라진 자국이 있는 곳이다. 한때 빛나면서 잘살던 나라가 하루아침에 무너졌다고 하는데, 이슬처럼 사라진 나라와 사람들 발자취를 새처럼, 새가 죽었다고 빗대는 말처럼, 안개가 자욱하게 끼듯 풀어낸 글인가.


그런데 책을 읽는 내내 헷갈리고 어지러웠다. 옮김말 탓일까. 영생, 고독, 위험, 희망, 과학, 욕구, 안색, 영혼, 시적, 몽상적, 사랑, 유혹, 물욕, 아름답다, 슬픔, 집요, 존재, 흡족, 퇴페적, 전쟁, 희극적, 냉소적, 운명, 환상, 지옥, 저주, 조롱, 원한, 세계 같은 말이 뒤죽박죽 흩어지는데, 어떤 삶과 끝을 말하려는지 갈피를 잡기 어려웠다. 머리에 아무 그림이 안 나왔다. 


내가 우리말을 모르는지, 우리말이란 워낙 이러한지 모르겠다. 이 낱말 저 낱말 자꾸 쪼개고 또 쪼개어 놓으면, 줄거리도 모르겠고 이야기도 갈피를 못 잡겠다. 그렇지만 나도 한때 이렇게 낱말을 쪼개고 늘어놓고 흩뜨리는 글을 시랍시고 곧잘 썼다.


이제 숨을 돌리고 잘 자는 짝을 들여다보다가, 덮은 책을 다시 들추다가, 글에 왜 한자말을 자꾸 넣는지 헤아려 본다. 한자말을 안 쓸 수 없겠지만, 구태여 끼워넣는 한자말이 많지 않을까. 더 쉽게 우리말로 쓰기만 해도 잔잔하게 마음을 달래고 밝힌다고 본다. 


옮김말을 다시 찬찬히 본다. 꾸미는 말이 많다. 글이 무겁고 겹말이 많다. 언제 어디서 무엇을 왜 어떻게 하였는가 하는 여섯 가지에 맞추어 쓰라는 얼거리를 되돌아본다. 속뜻을 살리려는 길에서 먼, 꾸미는 치레가 없어야 이야기가 환하다는 얼거리도 되새긴다.


새는 사람처럼, 오늘 우리 짝처럼 갑자기 가슴이 아프지는 않을까. 그럴 때에는 어김없이 다른 큰짐승한테 먹이감이 되어 주는가. 스스로 죽을 자리를 찾아가는 새로서는, 죽음자리를 앞으로 다시 태어날 자리로 삼는가.


짝이 누운 병원에는 몸이 늙고 잘 걷지도 못하고 마음도 잘 쓰지 못하는 사람들이 한동안 거쳐 가는 곳 같다. 가래가 끓는 소리가 넘친다. 목구멍에 줄을 길게 서넛 달고서 통에 담긴 바람으로 숨을 겨우 쉬는 사람을 본다. 드러누워서 끝내 일어나지 못하는 사람이 많다. 오줌을 가리지 못하는 사람에, 이곳저곳 아파서 쫓아오는 마지막 자리로 가는 길에 선 사람을 본다.


어쩌면 우리는 살면서 땀흘려 그러모은 돈을 병원에 몽땅 바치고서 빈털터리로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새는 페루에 가서 죽는다면, 사람은 병원에 가서 돈을 다 쏟아붓고서 죽는 듯하다. 새는 새몸으로 가려고 페루로 간다면, 사람은 돈하고 목숨줄을 바꾸면서 겨우겨우 버티는지 모른다. 이제 그만 읽자. 책을 덮는다.


2023.11.04.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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