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동화 - 삶의 지혜가 담긴 아름답고 신비한 허브 이야기
폴케 테게토프 지음, 장혜경 옮김 / 예담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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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작게 삶으로 65 한 그루 나무


《식물 동화》

폴케 테게토프

장혜경 옮김

예담

2006.11.6.



풀꽃나무를 좋아해서 한 자락 두 자락 읽고 모으다 보니 풀꽃나무를 담은 책이 시렁 몇 칸이나 차지한다. 딱딱한 이야기부터 동화까지 두루 읽는다.


지지난해 여름에 《식물 동화》를 처음 읽었다. 이 책이 나올 무렵에 글쓴이는 이미 서른 남짓에 이르는 책을 썼단다. 《식물 동화》는 풀꽃나무를 약으로 쓰는 대목을 동화로 풀어냈다. 서양 풀꽃은 잘 모르지만, 열일 곱 꼭지 가운데 몇 가지는 눈에 익다. 이를테면 바질, 민트, 라벤터, 라일락, 민들레, 로즈마리는 풀잎과 꽃잎을 떠올리며 읽었다. 


신선초 이야기가 남다르다. 마지막 남은 착한 마음이 샘에서 물을 길어 마시듯 착한 빛으로 살아난다고 한다. 풀꽃한테서 얻은 밝은 빛이 머잖아 아이들 웃음빛으로 이어간다고 한다.


내가 중학교를 다닐 적에 늘 지나가는 골목이 있었다. 우리 학년에서 키가 가장 큰 아이 집인데, 마당에 라일락이 한 그루 있었다. 보라꽃이 피는 철이면, 마을 언저리에 들어서기만 해도 라일락 꽃내음이 마을을 뒤덮었다. 그러나, 나는 라일락 냄새가 너무 짙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도, 보라꽃이 예뻐 담벼락을 지날 때면 꼭 올려다보았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알고 보니, 라일락은 우리나라 수수꽃다리를 가져가서 바꾼 꽃나무라고 하더라.


양치기가 라일락나무 한 그루를 지키는 이야기를 곱씹어 본다. 누가 이 나무를 도끼로 잘라 버리려 할 적에 바람을 가르며 떨리는 “도와줘요, 날 도와주면 후회하지 않을 거예요.” 하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양치기는 얼른 달려가서 뿌리를 파내었고, 이 나무를 지켜주었단다. 양치기는 제 나라 임금님도 살렸다. 라일락나무가 들려준 말을 그대로 따랐더니, 임금님이 앓던 몸을 고칠 수 있었단다. 그래서 임금님은 양치기한테 무엇을 바라는지 물었고, 양치기는 나무 심을 조그마한 땅을 달라고 했다. 양치기는 작은 땅에 나무를 심었다.


양치기는 언제나 나무 곁에서 나무가 들려주는 말을 귀담아들었다. 나무한테서 배우고, 나무하고 함께 살아간 나날이라고 하겠다. 이리하여 양치기는 임금님한테뿐 아니라, 그 나라 공주한테도 믿음을 사고 사랑을 지필 수 있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라일락만 사람한테 이바지하지 않는다. 뽕나무도 뿌리와 줄기와 잎과 열매가 모두 이바지한다. 모든 나무가 저마다 다르게 사람한테도 짐승한테도 벌레와 새한테도 이바지한다.


우리는 양치기처럼 나무 곁에서 나무가 들려주는 말을 귀를 기울여서 들을 수 있을까? 나무를 심을 조그마한 땅 한 뙈기를 누리는 조그마한 보금자리를 지을 수 있을까? 나무를 멀리하니까 어리석고 아픈지 모른다. 풀과 꽃과 나무를 품을 적에는 누구나 슬기로운 마음과 생각으로 자라날는지 모른다.



2023.12.19.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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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전략으로 지구를 누빈 식물의 놀라운 모험담
스테파노 만쿠소 지음, 임희연 옮김, 신혜우 감수 / 더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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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64 풀씨로 떠나는 몸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스테파노 만쿠소

임희연 옮김

더숲

2020.11.30.



며칠 앞서 엄마 집에서 하룻밤 잤다. 아침에 아버지 무덤에 갔다. 무덤 꼭대기에 입김처럼 눈이 새집을 짓고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볼도 손도 시렸다.


이 추운 날, 길가에 돋은 쑥부쟁이꽃을 보았다. 바람에 이리저리 어지러울 만큼 흔들렸다. 쪼그리고 앉아 꽃잎을 본다. 무릎에 덮은 담요에 도깨비바늘이 잔뜩 붙었다. 내가 더 멀리 가서 떼었으면 도깨비바늘이 신이 날까. 그러나 나로서는 도깨비바늘 꿈을 물거품으로 바꾸어 놓는다. 얘들아, 그냥 여기에서 살아라. 우리 집까지 가지 말자. 우리 집은 아파트라서 너희가 뿌리내릴 데가 없어.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를 읽었다. 이 책은 우리별을 누리는 여러 풀을 다룬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짐승과 풀은 서로 다르게 산다. 풀은 풀씨로 퍼져서 온누리를 덮고 모둠살이를 한다. 도깨비바늘처럼 짐승털에 붙기도 하고, 민들레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가기도 한다. 또는 도토리처럼 통째로 먹히고서 먼먼 곳에서 똥으로 나와서 싹이 트기도 한다.


화산이 터진 자리에서도 풀은 살아남는 길을 깨닫는다. 씨앗은 어미나무 가까이 떨어져 모래밭에 묻히기도 하고, 바닷물을 타고서 멀리 떠나기도 한다. 바람에 날리듯이 물에 뜨는 씨앗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섬에서 살다가도 바다밖 멀리 나가기까지 긴 나날을 버티는 힘이 대단하다. 바람이 거들지. 새도 물결도 씨앗을 옮겨주지. 더구나 원자폭탄이 터졌어도 살아남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어제 시골에서 오는 길에 불이 난 숲을 보았다. 몇 그루만 살아남고 속살을 드러냈다. 까맣게 탔던 벌거숭이숲이었는데, 곳곳은 푸릇푸릇 풀이 덮더라. 사람이 다니는 길은 가르마처럼 드러난다. 잎을 떨군 나무가 추위를 맨몸으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바라본다.


화산 곁에서, 또 산불이 난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사로잡힌 씨앗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덜덜 떨었을까. 다시 흙으로 돌아가자고 여겼을까.


화산이 가라앉고 나면, 산불이 잦아들고 나면, 어느새 자그마한 풀부터 싹이 난다. 이윽고 나무도 자란다.


내가 사는 대구는 서울보다 작지만, 무척 큰 도시이다. 대구도 부산도 광주도 서울도, 풀씨가 깃들 틈이란 아주 좁다. 아니, 없는지 모른다. 풀씨와 나무씨는 이 도시도 바꿀 수 있을까? 머잖아 모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덮고서 푸른숲으로 바꿀 수 있는가?


바다를 건너오는 씨앗은 어떤 생각을 품을까. 사람도 풀씨도 여러 나라를 넘나든다. 사람은 국경을 긋지만, 풀씨한테는 아무런 금이 없다. 바다는 긴긴 나날을 그저 물결치면서 우리 곁에 있다. 그러고 보면, 우람하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씨앗만큼은 작고 가볍다. 작고 가벼운 씨앗은 바람도 타고 물결도 타면서 어디로나 새길을 나선다.


꽃이 피고 잎이 물드는 풀꽃나무를 보면 들뜬다.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는 틈에 씨앗은 온힘으로 버티며 살 길을 찾아내고 겨울잠을 잔다. 이제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를 덮는다. 풀과 꽃과 나무가 우리별을 고루 나들이하는 줄거리를 담기는 했지만, 어쩐지 풀하고도 꽃하고도 나무하고도 너무 멀리 떨어진 채 구경만 하다가 그쳤지 싶다. 숲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들에서 지켜보기보다는, 그저 도시에서 구경한 글이지 않을까? 많이 겉돈다. 그런데 이런 책조차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뭔가 아쉽다.



2023.12.25.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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곁말, 내 곁에서 꽃으로 피는 우리말
최종규 지음, 숲노래 기획 / 스토리닷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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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63 곁말



《곁말, 내 곁에서 꽃으로 피는 우리말》

최종규 글

숲노래 기획

스토리닷

2022.6.18.



《곁말, 내 곁에서 꽃으로 피는 우리말》을 읽었다. 이 책은 두 갈래 글길로 이야기를 담았다. 앞쪽에는 우리말 이야기를 꼭지마다 열여섯 줄로 풀이를 한다. 뒤쪽은 넉줄꽃(사행시)을 노래한다. 넉줄꽃은 노래 같다. 가락이 흐른다. 넉 줄로 끊어서 쓴 글이지만, 줄줄이 읽으면 판소리처럼 길게 이어간다.


《곁말》을 쓴 분은 자가용을 안 몬다고 한다. 버스를 타거나 걸어다니면서 책을 읽고 글을 쓴다고 한다. 버스나 전철을 타면서 책을 읽거나 글을 쓰는 사람은 더러 보았어도, 걸어다니면서도 책을 읽거나 글을 쓴다니 유난하다.


나는 자가용을 몬다. 내가 차를 몰면 멀미를 안 하지만, 남이 모는 차를 타면 멀미가 난다. 그래서 나는 버스나 전철을 탈 적에는 책읽기를 어림도 못 한다. 요즘도 내 차를 스스로 몰지 않고서 다른 사람이 모는 차를 얻어타고서 멀리 가야 하면 멀미약을 한 알 먹는다.  


의성읍에서 살며 안동으로 일하러 다니던 스물두 살 무렵을 떠올려 본다. 벌써 서른 해가 훌쩍 지나간 옛일인데, 한창 젊던 스물두 살에도 멀미가 잦았다. 그때에는 알약이 있는 줄 몰랐다. 나는 물약을 잘 삼키지 못해 멀미약을 먹지 못 했다. 의성읍에서 동생하고 자취를 하며 안동으로 다니면서 버스에서 숨이 막혔다. 앉을 자리가 없고 서서 오가면 몸이 더 흔들리니 더 울렁울렁했다.


안동에서 일을 마치고서 의성으로 돌아올 즈음에는 자주 게웠다. 어느 날은 그날 먹은 짜장면을 고스란히 쏟아낸 적이 있다. 이렇게 속이 아프고 어지러우니 더는 견디기 벅차서, 일터 가까운 곳에 조그맣게 방을 얻었다.


어떻게 버스에서 글을 쓸까? 흔들리는 곳에서 어떻게 책을 읽을까? 《곁말》을 쓴 분도 어릴 적부터 고삭부리여서 자주 앓았고 멀미도 잦았단다. 그런데 글쓴이는 청소년 때부터 버스에서 책을 읽었고, 그때에도 걸으면서 책을 읽었다고 한다. 버스나 길에서 책을 읽다가 이야기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멀미가 사라지고 머리가 맑게 트였다고 하더라. 마음을 깊이 기울이면 버스가 흔들리거나 말거나 아랑곳하지 않을 수 있다지. 생각해 보면, 책에 흠뻑 빠지면 추위나 더위를 잊고, 하루가 가는 줄 잊을 수 있다.


《곁말》은 “내 곁에서 꽃으로 피는 우리말”처럼 작은이름이 붙는다. 이 말처럼 우리말이 꽃처럼 곱고 깔끔하다. 읽는 내내 개운하다. 이 책을 읽은 뒤부터 ‘낙엽’이라는 한자말을 안 쓰고 ‘가랑잎’이나 ‘가을잎’이라는 우리말을 쓴다. 글쓴이는 우리더러 ‘글발림’을 하지 말라고 이야기한다. 남한테 읽히려고 글을 쓰면 자꾸 겉치레를 하게 마련이니, 우리 스스로 되읽으면서 우리 마음에 들려줄 이야기를 우리 사투리로 쓰자고 덧붙인다.


남한테 보이기에 부끄러운 글이라면, 처음부터 남한테 보여주려고 치레하거나 꾸민 글이라고도 한다. 이런 글은 제발 쓰지 말고, 스스로 마음에 사랑으로 꽃이 피어날 글을 쓰자고 한다. ‘글씨’란 ‘글씨앗’이니, 우리 ‘마음씨’를 싹틔울 수 있는 ‘말씨(말씨앗)’를 살리자고 한다.


이 책을 읽어 보면 군더더기가 없다. 글쓴이는 아마 글쓴이 마음에 대고서 사랑씨앗을 심으려고 썼을 테지. 글쓴이 마음을 엿보듯 이 책을 읽으면, 나도 내 마음에 사랑이라는 씨앗을 품을 수 있을 테지.


내 책상맡에 《곁말》을 놓았다. 손이 곧 닿으면서 눈에 가장 잘 뜨이는 자리에 두었다. 이따금 넉줄꽃을 되읽는다. 물 흐르듯 써내려간 넉줄꽃을 읽다 보면 ‘!’와 ‘와’ 소리만 나온다. 나도 내 마음 곁에 넉줄꽃을 써 두고 싶다.


2023.11.10.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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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지음, 권진욱 옮김 / 한문화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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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62 쪽종이에 쓰기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나탈리 골드버그

권진옥

한문화

2000.6.20.



다섯 해 앞서 2018년에 어느 도서관에 가서 글쓰기 강좌를 두 달 들은 적이 있다. 두 달이 다 지날 무렵에 책나눔을 하였다. 이때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챙겨 온 분이 있었고, 내가 이 책을 받았다.


이 책을 읽어 보면, 십 분 동안 멈추지 말고 그대로 쓰라는 대목이 나온다. 요즘 어느 시쓰기 강좌를 가 보았는데, 그곳에서는 ‘무의식 글쓰기’를 한다. 종이를 나누어 주고서 십 분이나 십오 분 동안 글을 쓰라고 한다. 멈추지 말고 그대로 쓰라고 한다. 쓴 글을 되읽지 말고 지우지도 말라고 한다. 그저 쭉쭉 쓰라고 한다.


시쓰기 강좌에서 딱 한 번 십 분 글쓰기를 했다. 딱 하루를 써 보았지만 나로서는 버거웠다. 요즘은 글을 종이에 쓰지 않고 글판을 두드려서 쓰는데, 종이에 무얼 쓰자니 어려웠다. 머리가 지끈거려 그저 눈을 감은 채 시간만 보내었다.


사전을 쓰는 이웃님 한 분이 대구에 올 일이 있다고 해서 만나서 글쓰기 이야기를 한 적이 있다. 이분은 십 분도 십오 분도 아닌, 오 분만 쓰면 된다고 이야기한다. 손바닥만 한 조그마한 종이에 열 줄이 안 넘도록 슥슥 써 보면 된다고 하더라. 글이름, 오늘 날짜, 내 이름, 이렇게 세 가지만 적고서 종이를 비워도 된다고 한다.


나는 석 줄쯤 쓰다가 멈추었다. 그냥 지레 두려웠다. 글씨도 구불구불 힘이 없고 알맹이가 없는 글만 끄적인 듯했다. 그런데 알맹이가 있건 없건 몇 줄을 적어 놓으면 나중에 밑감 노릇을 한다고 한다. 그자리에서 바로 살을 보태어 글 한 자락을 새로 내놓아 주었다.


이튿날 작은 종이를 샀다. 처음 산 종이는 너무 작았다. 다시 종이를 사러 갔지만, 손바닥만 한 종이를 못 찾았다. 줄이 있는 쪽종이를 사 보았다. 종이 크기를 자로 재서 인터넷으로 켄트지를 샀다. 그런데 막상 켄트지를 잘라서 손으로 글을 적어 보자니 종이가 아까워 보이더라.


안 되겠구나 싶어서 미리 다른 종이에 써 보기로 한다. 줄이 있는 쪽종이를 하나씩 뜯었다. 글이름부터 적고, 시계로 오 분이 지나면 알리도록 맞추고서 적어 보았다. 시도 아닌 듯하고, 글도 아닌 듯한, 그냥 끄적인 셈일 텐데, 이레가 지나자 서른여섯 꼭지가 모였다.


종이에 적은 글을 따로 셈틀로 옮긴다. 서른여섯 꼭지를 손으로 먼저 쓰고서 옮기고 보니, 앞으로 몇 백 꼭지도 글이름부터 적어 놓고서 술술 쓸 수 있을 듯하다. 처음부터 빈틈없이 잘 짜서 쓰려고 하면 오히려 글쓰기가 어렵겠구나 싶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를 보면,  “나는 이야기 바깥에 있었고, 그래서 어느 누구도 이야기 안으로 데리고 들어갈 수 있다. 경험하지 않는 일은 절대 쓸 수 없다는 말이 아니다. 이야기에 당신만의 숨결을 불어넣었는지 확인하고, 당신의 숨결을 느낄 수 없는 글은 당신이 그 글 속에 들어 있지 않은 것이다.”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나는 이런 말 한 마디를 되새기면서 배운다. 둘레에 퍼진 말이라든지, 이미 쏟아져나온 말이 아닌, 내가 살아가는 숨결이 들어가는 글을 쓰는 길을 생각한다.


바쁜 하루이니까 바쁜 틈을 내어서 조금씩 쓰자. 할 일이 많은 삶인까, 갖은 일을 하는 틈틈이 쪽종이에 조금씩 써서 모아 보자. 샘물은 겨울에도 여름에도 꾸준하게 솟아나서 흐른다. 글도 샘물처럼 한결같이 조금씩 이어가면 되리라.


2023.12.18.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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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픈 나막신 우리문고 1
권정생 지음 / 우리교육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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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61 너도 나도 가엾은


《슬픈 나막신》

권정생

우리교육

2002.8.10.



방천시장에 있는 책방에 갔다. 책방에서 아기가 잔다. 책방지기도 소곤소곤 우리도 소곤소곤. 책방 어귀에 있는 종소리가 더 크다. 책방지기는 혼자 아기를 키울까 궁금했지만 묻지 않았다. 아가 신발이 너무 작아 만지작거리다가 책을 훑는다. 다시 신발을 보니 궁금하던 일이 확 풀렸다. 가족사진이 있다. 카프카를 좋아해서 책 언저리에 비슷한 모습을 보고 찍은 사진이라고 했다. 책방에서 엉뚱한 구경을 하다가 《슬픈 나막신》을 본다.


큰딸이 어릴 적에 권정생 님이 쓴 ‘몽실 언니’하고 ‘강아지똥’하고 ‘검정고무신’을 곁에 두고 읽었다. 권정생 님은 내가 살던 안동에서 가까운 일직에 살았다. 언젠가는 권정생 님이 쓴 ‘엄마 까투리’를 애니메이션으로 담아서 프랑스로 판다는 말이 오갔다.


《슬픈 나막신》을 읽는다. 권정생 님이 태어난 일본에서 어울린 아이들 이야기가 흐른다. “어른들은 전쟁을 일으키고 집을 부숴 버리고 죽이려 대들고 그러나 어른들이 있어야만 아이들이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아이들을 바르게 착하게 자라라고 가르치면서 어른들은 마음대로 삐뚤어진 것을 하고 있다.”라든지 “일본 사람과 조선 사람은 왜 다른가? 조선 땅이란 어디 있으며 누가 빼앗아 가지고 있는 걸까? 모두가 똑같은 얼굴 눈 코 입이 있고 팔다리가 붙었고 노래도 부르고 웃으며 사는데 어째서 서로 빼앗고 빼앗겨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같은 글자락을 읽으며 밑줄을 긋는다. 권정생 님 목소리로 그대로 들린다. 


언젠가 권정생 님이 사는 마을에서 일을 했다. 종지기로 일하던 교회에 틈틈이 가 보았고, 권정생 님이 사는 집에도 몇 걸음 갔다. 밭자락 끝 폭 꺼진 자리에, 마을에서도 한쪽 끝에 집이 있다. 창살문에는 ‘권정생’이란 이름을 달아 놓았다. 찢어진 문구멍으로 안을 보니 방이 참 작았다. 책에 나오는 강아지 집터가 뒷간 앞에 그대로 있고, 시내가 흐르는 길 쪽에는 키가 큰 나무가 한 그루 자라고, 빨랫줄인지 전깃줄인지 마당을 지난다.


처음 이 방을 보던 날은 이렇게 단촐하게 사는 어른이 우러러보였다. 여느 할아버지처럼 생겼는데, 마음을 울리는 글을 이 방에서 썼구나 싶어 놀랐다. 한 사람이 눕기도 작은 방이다. 집도 마당도 작고 모두가 작았다.


살림처럼 작은 이야기를 꾸미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 적은 글이 시냇물처럼 잔잔하게 흐른다. 나누는 말에도 글에도 할아버지 마음이 곳곳에 묻어난다. 어린아이를 바라보는 마음이 고스란히 따뜻하게 담겼다. 


“조선 사람이 가엾다, 일본 사람이 가엾다” 하고 나란히 읊는다. 이 힘들고 고단하던 나날을 건너온 일본 아이들도 조선 아이들도 같은 마음인지 모른다. 일본이라고 하면 덥석 나쁘게 여기기만 하느라, 일본을 바탕으로 쓴 글을 보는 사람들은 손가락질도 할 테지만, 일본이든 조선이든 어디에서나 아이는 아이일 뿐이다. 아이를 보는 어버이와 어른 눈은 똑같은 마음이다.


먹고살기도 어려운 가난한 살림에 두 나라는 총칼로 싸움을 벌였다. 왜 그래야 했을까. 누가 총칼을 만들어서 앞세웠을까. 고단한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야 했던 잔잔한 얘기로 그때 그 삶을 훤히 본다.



2023.12.11.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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