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 혁신적이고 독창적인 전략으로 지구를 누빈 식물의 놀라운 모험담
스테파노 만쿠소 지음, 임희연 옮김, 신혜우 감수 / 더숲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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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64 풀씨로 떠나는 몸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

스테파노 만쿠소

임희연 옮김

더숲

2020.11.30.



며칠 앞서 엄마 집에서 하룻밤 잤다. 아침에 아버지 무덤에 갔다. 무덤 꼭대기에 입김처럼 눈이 새집을 짓고 바람이 매섭게 불었다. 볼도 손도 시렸다.


이 추운 날, 길가에 돋은 쑥부쟁이꽃을 보았다. 바람에 이리저리 어지러울 만큼 흔들렸다. 쪼그리고 앉아 꽃잎을 본다. 무릎에 덮은 담요에 도깨비바늘이 잔뜩 붙었다. 내가 더 멀리 가서 떼었으면 도깨비바늘이 신이 날까. 그러나 나로서는 도깨비바늘 꿈을 물거품으로 바꾸어 놓는다. 얘들아, 그냥 여기에서 살아라. 우리 집까지 가지 말자. 우리 집은 아파트라서 너희가 뿌리내릴 데가 없어.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를 읽었다. 이 책은 우리별을 누리는 여러 풀을 다룬다. 가만히 생각해 본다. 짐승과 풀은 서로 다르게 산다. 풀은 풀씨로 퍼져서 온누리를 덮고 모둠살이를 한다. 도깨비바늘처럼 짐승털에 붙기도 하고, 민들레처럼 바람을 타고 날아가기도 한다. 또는 도토리처럼 통째로 먹히고서 먼먼 곳에서 똥으로 나와서 싹이 트기도 한다.


화산이 터진 자리에서도 풀은 살아남는 길을 깨닫는다. 씨앗은 어미나무 가까이 떨어져 모래밭에 묻히기도 하고, 바닷물을 타고서 멀리 떠나기도 한다. 바람에 날리듯이 물에 뜨는 씨앗이란 얼마나 놀라운가. 섬에서 살다가도 바다밖 멀리 나가기까지 긴 나날을 버티는 힘이 대단하다. 바람이 거들지. 새도 물결도 씨앗을 옮겨주지. 더구나 원자폭탄이 터졌어도 살아남는 나무가 있다고 한다.


어제 시골에서 오는 길에 불이 난 숲을 보았다. 몇 그루만 살아남고 속살을 드러냈다. 까맣게 탔던 벌거숭이숲이었는데, 곳곳은 푸릇푸릇 풀이 덮더라. 사람이 다니는 길은 가르마처럼 드러난다. 잎을 떨군 나무가 추위를 맨몸으로 맞아들이는 모습을 바라본다.


화산 곁에서, 또 산불이 난 곳에서, 활활 타오르는 불길에 사로잡힌 씨앗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덜덜 떨었을까. 다시 흙으로 돌아가자고 여겼을까.


화산이 가라앉고 나면, 산불이 잦아들고 나면, 어느새 자그마한 풀부터 싹이 난다. 이윽고 나무도 자란다.


내가 사는 대구는 서울보다 작지만, 무척 큰 도시이다. 대구도 부산도 광주도 서울도, 풀씨가 깃들 틈이란 아주 좁다. 아니, 없는지 모른다. 풀씨와 나무씨는 이 도시도 바꿀 수 있을까? 머잖아 모든 시멘트와 아스팔트를 덮고서 푸른숲으로 바꿀 수 있는가?


바다를 건너오는 씨앗은 어떤 생각을 품을까. 사람도 풀씨도 여러 나라를 넘나든다. 사람은 국경을 긋지만, 풀씨한테는 아무런 금이 없다. 바다는 긴긴 나날을 그저 물결치면서 우리 곁에 있다. 그러고 보면, 우람하게 자라는 나무이지만, 씨앗만큼은 작고 가볍다. 작고 가벼운 씨앗은 바람도 타고 물결도 타면서 어디로나 새길을 나선다.


꽃이 피고 잎이 물드는 풀꽃나무를 보면 들뜬다. 우리가 느끼지도 못하는 틈에 씨앗은 온힘으로 버티며 살 길을 찾아내고 겨울잠을 잔다. 이제 《식물, 세계를 모험하다》를 덮는다. 풀과 꽃과 나무가 우리별을 고루 나들이하는 줄거리를 담기는 했지만, 어쩐지 풀하고도 꽃하고도 나무하고도 너무 멀리 떨어진 채 구경만 하다가 그쳤지 싶다. 숲에서 바라보기보다는, 들에서 지켜보기보다는, 그저 도시에서 구경한 글이지 않을까? 많이 겉돈다. 그런데 이런 책조차 베스트셀러라고 한다. 뭔가 아쉽다.



2023.12.25.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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