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동시론 - 굴렁쇠 생각 3
이오덕 지음 / 도서출판 굴렁쇠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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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7 누가 시인일까



《아동시론》

이오덕

굴렁쇠

2006.11.10.



둘레를 살펴보니 배우는 사람이 많다. 아이들은 유치원과 학교를, 나처럼 아줌마들은 시를 배우고 글을 배우고 낭송을 하고 운동을 하고 산을 가고 저마다 좋아하는 일을 학교 다니듯이 돈을 내고서 배운다.


퇴직해서 배우는 사람은 일자리 걱정 돈 걱정 없어 부럽다. 어르신은 어르신대로 아이들 유치원 가듯 배움터를 간다. 참말로 우리는 배우러 태어났을까.


어르신 배움터에 가서 글을 뽑는 일을 돕기로 했다. 갑작스럽게 맡는다. 이른바 ‘심사위원’이란 자리인데, 이 자리에 가기 앞서 이오덕 님이 쓴 《아동시론》을 다시 펼친다.


시인이란 이름을 붙인 어른들은, 따로 시를 ‘짜려(구축)’고 들지만, 아이들은 ‘삶’에서 이미 얻은 노래를 ‘스스럼없이 적(기술)’는다고 한다. 그래서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라고 들려준다. 그러니까 어른도 아이처럼 스스럼없이 삶을 바라보고 지켜보고 느끼는 대로 노래하듯 풀어내면 언제나 저절로 시가 나오고 글이 나온다고 들려준다.


우리 아들이 아직 어리던 열 살 무렵에는 참말로 시인 같았다. 문제를 풀이를 하다가 답이 뭐냐고 물으면 답지에 “엄마가 생각하는 것이 답이야.”라든지 “아까 호랑이 죽은 거 봤잖아, 나 죽었다니까.”라든지 “이불이 저 혼자 점프하다가 떨어져서 그래.”라든지 “아이스크림이 죽었으니깐 시체야.”라든지 “오줌싼 게 아니라 땀이야.”라든지 “세수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 하는 말마다 웃기기도 하고 요리조리 빠져나가려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참으로 놀라곤 했다.


《아동시론》을 천천히 읽는다. 손과 발과 가슴으로 시를 써야 하는데, 다른 사람들도 나도 삐뚤어진 손재주만 익히면서 길들어 왔지 싶다. 어린이가 학교에서 쓰는 동시만 이와 같을까. 어른이 문학이라는 이름으로 쓰는 시도 이와 같지 않겠는가. 더구나 숱한 동시는 ‘어른들이 귀염짓을 하는 말씨’로 아이들한테 ‘거짓스런 흉내’를 내도록 시킨다고 쓴소리를 덧붙인다.


아이도 어른도 가슴에서 저절로 터져나오는 말을 즐겁게 쓰면 되겠지. 이 이야기를 안다고 여겼지만, 어쩌면 나부터 아직 잘 모르는 셈일 수 있다. 살아가며 느끼는 모든 마음을 고스란히 적을 줄 안다면, 참하면서 빛나는 글이 태어나겠지.


낱말 짜맞추기, 꾸미는 말솜씨, 재미스럽게 붙이고 깎기, 이런 말을 돌아보면 모두 어른 탓인지 모른다. 가르치는 사람이나 책을 쓰는 사람은 다 어른이다. 아이들은 어른이 쓴 동시를 읽으면서 알게 모르게 스민다. 시를 쓰는 사람이나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둘레에서 좋다고 여기는 시를 옮겨적기 일쑤이다. 무슨 줄거리인지도 모르고 새롭다고 여기면서 요리조리 뜯어 읽으며 배운다고 한다. 말놀이가 아닌 말재주에 갇힌다. 삶이 없이 머리로만 엮는 셈이다.


어른들이 쓴 시집을 보면, 끝에 비평이 붙는다. 시를 배우는 사람도 글을 쓰는 사람도 알아듣지 못하는 글을 온갖 이름난 사람들이 갖은 말을 붙이면서 좋게 좋게 풀이를 한다. 숲하고 먼 우리 도시에서 살아가는 아이나 어른이기에, 시에서도 숲이 사라지고, 억지로 만들어 낸 온갖 것이 시라는 이름으로 도마에 오른다. 글감만 놓고서 이리저리 칼질을 무섭게 한다.


끔찍하구나 싶은 말도 아무렇지 않게 적는 시를 보면, 시가 피투성이처럼 보인다. ‘미래파’라는 이름으로 쓰는 글을 읽은 가슴은 어떻게 바뀔까. 삶이 없으니 사랑이 없는 채 피로 물들이는 시를 읽거나 쓰다가는 마음도 메마르거나 찢어지지 않을까.


요즘 나오는 젊은 사람이 쓴 시집을 마련해서 읽어 보면, 무슨 뜻인지도 모르거나, 말장난을 하는구나 싶은 시가 많다. 성욕이나 성애를 거리낌없이 드러내는 시도 많다. 사람 얼굴이 다 다르듯, 시를 마주하는 마음도 다 다를 테지만, 시를 누구한테 보여주려고 쓰는가부터 생각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왜 시를 쓰려고 할까. 가까이 있는 사람들한테도 시에 쓰듯 말을 하려나? 아이들한테도 시에 쓰듯 말을 하려나?

 

남들이 쓰는 시를 따라하지 말자고, 나는 나답게 쓰겠다고 다짐을 하면서도 자꾸 다른 시집을 기웃기웃한다. 그렇지만 말놀이가 되지 않도록 내 마음을 담도록 애쓰고 싶다. 내 삶을 내 손으로 스스럼없이 쓴다면, 꾸미고 자시고 할 새가 없으리라 본다.


202311.17.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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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 지음, 이호준 옮김 / 청하 / 200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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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6 묻고 답하기



《나는 누구인가》

라마나 마하리쉬

이호준 옮김

청하

1987.4.25



열두 해쯤 앞서 짝이랑 홍제암이란 곳에 간 적 있다. 그때 절에서 뵌 스님한테 책을 하나 알려주시면 잘 읽어 보겠노라고 여쭈었다. 스님은 머리를 깎은 뒤로는 바깥에서 나오는 책을 읽지 않아서 잘 모른다고 하셨다. 그러다가 《나는 누구인가》라는 책을 읽고서 머리를 깎았다고 하시기에 책이름을 적어 놓았다.


여섯 해쯤 앞서 드디어 《나는 누구인가》를 장만했다. 여섯 해가 걸린 셈이다. 읽다가 덮다가 했다. 읽을 만한 책을 스님한테 여쭈었으면서, 드디어 이 책을 장만했으면서, 정작 잘 읽히지 않았다. 먹고살기 바쁜 나날을 보낸다는 핑계 탓이리라. ‘나는 누구인가’ 하고 스스로 물어보면서 스스로 길을 찾을 엄두를 못 내었으니, 이 책을 펴도 하품이 나오면서 어려웠으리라.


다시 천천히 읽어 보기로 한다. 꼭 첫 줄부터 끝 줄까지 훑어야 하지는 않는다고 생각해 본다. 마음에 와닿는 대목을 살피면서 ‘나는 누구인가’ 하고 돌아볼 씨앗을 얻으면 되리라 생각해 본다.


마음이 어수선하면 입을 다물지만, 이때에는 이런저런 생각이 잔뜩 일어난다. 나를 돌아볼 틈을 내면, 어느새 잘못을 깨닫고, 들끓는 불같은 마음이 스르르 꺼진다. 이러다가 다시 힘이 솟아 말이 늘어나는데, 또 부딪치기를 거듭하는 동안 입을 다물고, 또 스스로 돌아본다.


“뼈와 살로 이룬 이 몸은 내가 아니다.” 같은 말을 곱씹는다.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다섯가지 기관은 내가 아니다.” 같은 말도 되새긴다. “말하고 움직이고 붙잡고 배설하고 생식하는 다섯 가지 운동기관은 내가 아니다.” 같은 말도 밑줄을 그으면서 생각한다. “호흡도 생각하는 마음도 내가 아니다.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무의식도 내가 아니다.” 같은 말을 되뇌어 본다. 그러나 잘 모르겠다. 그러면 나는 누구라는 소리일까?


나는 가끔 스님 같은 분들은 한삶을 참 고요하게 산다고 여겼다. 우리처럼 먹고살 일에 걱정이 가득하거나 바쁠 일이 없으니까, 마음을 갈고닦느라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되니까, 절에서 지내는 하루가 얼마나 손쉬울까 하고 여기곤 했다.


그러다가 문득 다시 생각한다. 먹고사는 일거리를 걱정하기에 삶을 누리는 하루일까? 바쁘게 일을 해야 삶이라고 여길 만할까? 세 아이를 낳아 돌보았는데, 세 아이 모두 볼볼 기는 아기였다. 엄마 품을 찾는 아기는 아무런 걱정을 안 한다. 아이들이 커서 학교를 다니고, 이 학교를 마치고, 막내는 군대도 다녀오고, 저마다 일자리를 찾고 삶자리를 찾아서 떠났는데, 근심걱정으로 가득해야만 ‘삶’이라고 여길 만할까? 근심걱정에 파묻혀, 정작 ‘나’라고 하는 숨결을 잊어버린다면, 날마다 바쁘게 뭔가 하는 듯하지만 아예 아무것도 안 하는 굴레이지는 않을까.


아침에 눈을 뜨면 보이는 모든 것을 다시 바라본다. 일하며 움직이는 몸과, 일을 마치고 잠드는 몸이 보는 꿈을 돌아본다. 슬쩍 갸웃거린다. 내가 읽은 책에서 얻은 말은 언제쯤 내 몸에서 잘 삭은 뒤에 글로 다시 태어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말은 글로 그리지 못 하겠지. ‘나’라고 할 수 있는 말을 글로 옮기겠지.



2023.10.20.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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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마리코 1
오자와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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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5 맨몸으로 새롭게



《80세 마리코 1》

오자와 유키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18.10.23.



그제는 짝이 시골에 가서 무와 배추를 뽑아 왔다. 짝은 얼마 앞서 몸에 칼을 댔다. 아직 개운하지 않을 텐데 시골집에 가서 시골 어른이 꾸짖는 말을 고개도 못 들며 고분고분 들었다고 한다. 짝은 시골집에 자주 전화를 하고 다녀오지만, 나는 전화도 잘 안 한다. 살갑게 하면 좋겠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살갑게 말을 못 한다.


짝이랑 둘이서 가게를 꾸리는 일로도 몹시 바쁘다. 하루를 온통 쏟아서 일을 하고 난 뒤에 겨우 짬을 내어 글을 몇 줄 쓰고 싶어도 힘들고 빠듯하다. 시댁 여러 쪽에서는 우리가 시골땅을 물려받은 일로 못마땅한 눈치이다. 나는 내 땀방울이 든 땅이 아닌 그곳을 물려받을 마음이 없었다. 짝이 집안에서 아들인 탓에 물려받았다고 느낀다. 받을 마음도 없던 땅을 받느라, 우리로서는 오히려 땀방울을 잔뜩 들여 겨우 모은 돈을 세금으로 크게 물어야 했다.


시골땅을 물려받으려면 세금도 크게 물어야 하는 줄 알까? 세금 걱정은 않고서 그저 땅을 받기만 하는 줄 알까? 그렇게 받고 싶으면 아들딸 가리지 말라는 얘기를 시어른한테 먼저 해서 시댁 사람들끼리 풀 일이지 않았을까?


시댁 어른 두 분은 참 잘 다툰다. 요새는 어머님이 아닌 아버님이 밥을 하고 빨래를 한다는데, 아직도 다투신다. 서로 말을 못되게 하신단다. 며칠 앞서 이웃집 할머니가 전화를 했다. 밤 열 시가 넘은 때인데, 우리 시어른이 계신 시골집에서 살고 싶다고, 그쪽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이웃집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 너무 볶여서 삶이 괴롭다고, 그 나이에도 더 볶이기 싫다고 한숨을 쉬신다.


시어머님도 이웃 할머니도 여든 넘은 나이에 스스로 마지막 삶을 보낼 터전이 없다. 할머니들뿐 아니라, 할아버지들도 그렇게 오래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마음을 맞추는 길을 못 찾고서 푸념에 막말을 너무 쏟아낸다고 느낀다.


그끄저께에 《80세 마리코》라는 만화책 열여섯 자락을 장만했다. 열여섯 자락이나 되는 긴 만화이지만, 한달음에 다 읽었다. 놀랐다. 만화책 이야기라고는 해도, 여든 살 나이에 집을 나와서 스스로 새롭게 살아간다는 줄거리는 놀라울 뿐이다. 여든 살에 이르도록 피땀을 흘려 마련한 ‘내 집’인데, ‘내 집’이 내가 살아가는 집 같지 않아서 씩씩하게 ‘여든 살 동안 일군 피땀’을 훌훌 내려놓고서 맨몸으로 뛰쳐나왔단다.


누구나 똑같다. 좋아서 늙은이가 되겠는가. 좋아서 오래 살겠는가. 다만, 나이가 들거나 오래 살아간다면, 다 뜻이 있으리라. 여든 살 나이에 ‘내 집’을 스스로 버리고서 홀로살이를 해야 하는 뜻이 있을 테고, 새롭게 배우는 하루가 있을 테고, 이제부터 여든 살에도 새롭게 지을 이야기와 글과 사랑이 있으리라.


만화책을 읽다가 생각한다. 우리 시어머님 집에 가서 한달살이를 해볼까. 한 달이 버겁다면, 이레살이를 하고 싶다. 할머니 곁에서 ‘어른살림’이라는 길을 여쭙고, 새롭게 하루를 맞이해 보고 싶다. 그렇지만 우리 가게에서 나물 손질을 맡을 일꾼이 없다. 한달살이는 어렵다. 이레살이도 만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이레에 하루쯤 찾아가서 두 분 사이를 풀어주는 징검다리는 될 수 있을까.


내가 보기로는, 시어른 두 분이 티격태격하기 때문에 오히려 두 분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긴다. 티격태격이 사라지면 거꾸로 서로 기대던 힘을 잃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싸우면서 버티는 힘일 텐데, 이제부터는 싸움이 아닌 사랑으로 서로 바라보고 기대는 마음으로 나아가 보시도록 이어주고 싶다.


아무래도 두 시어른은 여태까지 사무치도록 골이 깊은 말씨를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려울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꾸기 어려운 일일수록 뜻밖에 갑자기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내려놓을 수 있다면, 벗어버릴 수 있다면, 새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스스럼없이 바꿀 수 있다.


《80세 마리코》에 나오는 여든 살 마리코 할머니는 갖은 고비에 가시밭길을 헤쳐나간다. 우리나라로 치면 좁은 피시방 외칸에서 겨우 먹고살면서도 꿈을 놓지 않는다. 아니, 더 밑바닥으로 내려갈수록 더 꿈을 품는다. 아슬아슬하고 아찔하게 떨어진 바닥에서 맨몸으로 다시 일어서는 빛을 스스로 찾아나선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기에 나중에는 ‘나이를 넘어선’ 동무와 이웃을 사귀고, 어떤 옷차림이건 대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즐겁게 삶을 빛내는 길을 연다.


살아서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하면, 남은 사람이 풀어주지 않는다. 짊어지려 하기에 무거운 짐이다. 내려놓으면 된다. 끌어안으니 짐이지만, 이웃한테 나누거나 베풀면 빛으로 바뀐다. 굳이 짐을 안고 갈 까닭이 없다. 다 풀어내고, 다 내려놓고, 다 떠나면서, 맨몸에 맨손에 맨발로 풀밭에 서면, 우리 마음은 어느새 푸르게 바뀌리라 생각한다.




2023.11.11.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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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 유교수의 생활 1
야마시타 카즈미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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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4 하루를 배운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 1》

야마시타 카즈미

신현숙 옮김

학산문화사

1996.12.25.



세 해쯤 앞서 《천재 유교수의 생활 1》를 읽을 적에, 막내아들이 우리 엄마가 무슨 책을 읽나 하고 들여다보더니 놀렸다. “엄마는 내가 만화책 읽으면 뭐라 카더니, 와 엄마가 만화책 읽노? 읽지 마! 읽지 마!” “잘 나온 책이야, 내가 읽고 이다음에 네 아이한테 물려주려고 샀지.” 막내아들은 이렇다 할 대꾸가 더 없이, 씩 웃으며 방에서 나갔다.


이제 다 큰 막내아들이지만, 이 아이가 열 살 무렵까지는 책에 묻혀 살았다. ‘○○ 보물찾기’라든지 ‘○○ 살아남기’ 같은 만화책이 새로 나오면 어느새 알고는 엄마한테 사 달라고 졸랐다. 그때에는 어쩐지 그런 만화책은 값이 비쌌다. 막내아들은 만화책을 보고 또 보았다. 지치지도 않는지 다시 읽고 또 읽는 모습을 보며 책값이 많이 나가도 아깝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문득 생각한다. 그때 우리 아들이 다른 만화책이 아니라, 《천재 유교수의 생활》 같은 만화책을 읽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들뿐 아니라 두 딸한테도 이런 만화책을 읽혔다면 좋았을 텐데 싶다. 이제 엄마가 만화책을 먼저 읽고서 아이들한테 읽어 보라고 얘기하지만, 다 큰 세 아이는 만화책을 읽으려고 하지는 않는다.


《천재 유교수의 생활》에 나오는 ‘유 교수’는 저녁 9시에 자고 새벽 5시에 일어난단다. 언제나 똑같은 때에 자고 일어난다. 무엇을 하든 자로 재듯이 헤아린다. 뭔가 어긋나거나 잘못되었구나 싶다면 서슴없이 나선다. 누가 총을 들건 우락부락 노려보든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직 바르고 옳다고 여기는 길을 씩씩하고 꿋꿋하게 걸어갈 뿐이다. 아무리 바쁘다고 해도 지름길을 안 간다. 만화에 나오는 유 교수네 딸은 ‘늘 자처럼 반듯하게 재서 일하는 아버지’가 올바르다고 여긴다. 느긋하기는 하되, 어떤 일도 얼렁뚱땅 넘어가지 않는 유 교수라는 아버지를 믿음직하게 여긴다.


유 교수는 말이 그다지 많지 않다. 늘 생각하고 다시 생각한다. 하나를 보더라도 허투루 보고 넘기지 않는다. 집안살림도 돕지만, 무척 오래 걸린다. 뭐든 자로 잰 듯이 맞추어야 하니 ‘한 꼬집’ 같은 부피를 모른다.


그래도 손녀 눈높이를 헤아릴 줄 안다. 손녀가 아직 글씨를 모르면서도 ‘한자투성이에 매우 어려운 책’을 거꾸로 쥐고서 읽는 시늉을 해도 즐겁게 받아준다. 다만 손녀하고 얽히는 자그마한 일이라 해도, 뭔가 엉뚱하거나 틀렸다 싶은 일이 있으면 그냥 안 넘어간다. 바로잡으려고 끝까지 붙든다.


요즘 나는 그동안 익숙하게 모든 모든 길을 다시 바라보려고 한다. 아무리 익숙하던 일이나 길도, 마치 처음 마주하듯 낯설게 보려고 한다. 일할 적에도, 자동차를 몰 적에도, 길거리에서 스치는 사람들을 멀거니 볼 적에도, 뒷산을 오르내릴 적에도, 잠을 자다가도 뭔가 낯설거나 새롭구나 싶다고 느낀 이야기를 적어 본다.


내가 마주하고 바라보는 모든 곳이나 것하고 말을 섞어 보려고 한다. 말을 못 한다고 여기는 돌이나 꽃이나 나비나 나무한테 말을 걸어 보는데, 이렇게 말을 걸어 보면, 어쩐지 돌이나 꽃이나 나비나 나무가 나한테 대꾸해 준다고 느낀다.


‘왜’, ‘왜’, ‘왜’ 하고, “왜 그럴까?” 하고 스스로 까닭을 물어본다. 인터넷에서 찾아보기보다는, 내 마음에 대고서 물어본다. 천천히 하나씩 알아가려고 새길을 나서다 보면 모든 실마리가 나오지 않을까. 새롭게 마주하고 처음으로 품으려는 마음결일 적에 문득 스스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누구나 다 알고 느끼고 생각해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글을 쓰는 하루를 살고 싶은데, 글감이란 멀리 안 있고, 늘 우리 곁에 있을는지 모른다. 내가 마음만 달리 먹으면, 아무리 작거나 수수해 보이는 일이라 하더라도, 이 자그마한 일을 새롭게 맞아들이고 깨달아서 글을 쓸 수 있는지 모른다.


엊그제 어느 자리에서 무슨 말이 오가면서 언짢았다. 서로 좋게 좋게 마음으로 만나서 한 걸음씩 알아가는 길이기를 바랐는데, 캐물으면서 다그친다고 느꼈다. 왜 그렇게 말해야 할까? 나도 왜 그렇게 대꾸를 해야 했을까? 왜 꾀를 내어서 맞춰 주어야 한다고 여길까?


머리가 휑했다. 우리는 서로한테서 뭔가 얻을 것이 있어야 만날까? 얻을 것이 없으면 서로 할 말이 없고, 나눌 마음도 없을까?


하루라는 삶터가 몽땅 배움터이다. 보거나 하거나 만지거나 앉거나 숨쉬고 눈감는 일조차도 우리를 일깨운다. 가까이 있는 모두가 생각을 키워 준다. 겉으로 보기에는 사람으로 짐승으로 책으로 나무로 꽃으로 종이로 그릇으로 모습은 다르지만, 우리는 서로 다른 하나로 살아가면서 생각과 삶이 가득 담긴 몸으로 다른 줄 다시금 돌아본다.



2023.10.12.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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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 인디언 연설문집
시애틀 추장 외 지음, 류시화 엮음 / 더숲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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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게 삶으로 043 들숲을 죽이다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

시애틀 추장

류시화 엮음

더숲

2017.9.22.



1991년 봄에 갓 짝을 맺어서 한칸집에 살 적에, 우리 짝은 이레쯤 집을 떠나 배움마실을 다녀와야 했고, 혼자 있기에 무서울까 싶어 시누이가 와주어 같이 지냈다. 그때 하루는 극장에 갔고, 〈늑대와 춤을〉을 보았다. 이 영화를 보러 온 사람이 얼마나 많던지 자리를 못 잡았고, 우리 둘은 극장 바닥에 앉아서 보았다.


북중미 텃사람(원주민)이 미국한테 삶터를 빼앗기면서 자꾸 구석으로 몰리던 무렵, 어느 백인 병사는 ‘백인 문명이 저지르는 짓’을 창피하다고 깨달으면서 ‘텃사람 죽임짓(원주민 토벌)’을 하는 병사를 그만두고, 텃사람처럼 말을 하고 텃사람처럼 옷을 입으면서 살아가기로 했다지.


《나는 왜 너가 아니고 나인가》를 읽어 보았다. 우리가 일본한테 나라를 빼앗기며 끌려다닌 나날을 놓고 책을 쓴다면, 멍울지고 아픈 이야기가 수북하리라. 그런데 이 책을 읽어 보면, 북중미 텃사람은 멍울이나 아픔을 다르게 바라보면서 다르게 풀어낸다. 왜 들숲을 품고 사랑하며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흙과 나무와 하늘을 어떻게 돌아보고 살아야 하는가 하는 이야기가 가득하다. 냇물과 바다가 들려주는 노래를 들으라는 이야기가 흐른다.


우리는 일본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주었나 하고 돌아본다.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어떤 이야기를 남기는지 헤아려 본다. 우리는 아프고 찢긴 발자취를 되새길 적에 미움씨앗이나 불길씨앗을 외치지는 않았을까? 총칼을 움켜쥔 이들을 부드러이 나무라면서, 총과 칼이 아니라 낫과 호미를 쥐고서 함께 흙을 일구고 숲을 푸르게 가꾸자는 목소리를 낸 적이 있을까?


북중미 텃사람뿐 아니라, 우리 옛어른도 지난날에는 숲에서 나무를 함부로 베지 않았다. 다들 지난날에는 나무한테 여쭙고서 우리가 쓸 만큼만 얻었다. 예부터 북중미 들숲이건 우리네 멧골이건 바람하고 바다하고 얘기하던 마음이었다. 북중미에서도 우리나라에서도, 새가 들려주는 노래를 귀여겨듣고 바람이 알려주는 하루를 곰곰이 새긴 살림이었다.


‘시애틀’이라는 겨레이름을 따서 ‘시애틀’이라는 고을이름을 붙였다지만, 정작 그곳 시애틀에는 ‘시애틀 겨레’가 들어갈 수도 깃들 수도 살 수도 없었다는 이야기를 읽었다. ‘들과 숲을 사랑하는 사람’들은 들도 숲도 잃어야 했을 뿐 아니라, 들과 숲을 마구 파헤치는 문명을 멀거니 지켜보아야 했다.


오늘날 우리는 스스로 들숲을 파헤치고 바다를 어지럽힌다. 아이들을 대학교로 보내려고 애쓰기는 하지만, ‘가르침’이나 ‘배움’하고는 먼 듯하다. 학교는 오래 다니지만, 요즈음 아이들은 들도 숲도 모르는 채 입시에만 붙들린다. 나는 어릴 적에 의성 멧길을 혼자서도 넘고 동무하고도 넘으면서 살았는데, 요즈음 아이들은 들길도 멧길도 숲길도 모르면서 산다. 아파트에 꽃밭을 두지만, 아파트 꽃밭은 아이들이 손수 돌보거나 소꿉놀이터로 삼을 수 없다.


반짝거리는 돌에 미쳐서 기찻길을 내던 백인 문명은 북중미 텃사람을 더 수렁으로 밀어넣었다. 그나마 더 깊은 숲으로 숨던 텃사람은 숲에서마저 쫓겨나야 했다. 그런데 우리가 오늘날 벌이는 모든 개발과 문화도 북중미에서 벌어진 ‘텃사람 죽임짓’하고 닮는다. 들과 숲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닫은 우리 모습이다. 바람과 바다가 속삭이는 이야기를 아주 등진다.


나무를 미워하고 밀어내기만 하는 우리나라 앞날에는 무엇이 있을까. 우리는 서로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아가는가.


2023.10.7. 숲하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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