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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세 마리코 1
오자와 유키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작게 삶으로 045 맨몸으로 새롭게
《80세 마리코 1》
오자와 유키
이은주 옮김
대원씨아이
2018.10.23.
그제는 짝이 시골에 가서 무와 배추를 뽑아 왔다. 짝은 얼마 앞서 몸에 칼을 댔다. 아직 개운하지 않을 텐데 시골집에 가서 시골 어른이 꾸짖는 말을 고개도 못 들며 고분고분 들었다고 한다. 짝은 시골집에 자주 전화를 하고 다녀오지만, 나는 전화도 잘 안 한다. 살갑게 하면 좋겠다고 여기면서도 정작 살갑게 말을 못 한다.
짝이랑 둘이서 가게를 꾸리는 일로도 몹시 바쁘다. 하루를 온통 쏟아서 일을 하고 난 뒤에 겨우 짬을 내어 글을 몇 줄 쓰고 싶어도 힘들고 빠듯하다. 시댁 여러 쪽에서는 우리가 시골땅을 물려받은 일로 못마땅한 눈치이다. 나는 내 땀방울이 든 땅이 아닌 그곳을 물려받을 마음이 없었다. 짝이 집안에서 아들인 탓에 물려받았다고 느낀다. 받을 마음도 없던 땅을 받느라, 우리로서는 오히려 땀방울을 잔뜩 들여 겨우 모은 돈을 세금으로 크게 물어야 했다.
시골땅을 물려받으려면 세금도 크게 물어야 하는 줄 알까? 세금 걱정은 않고서 그저 땅을 받기만 하는 줄 알까? 그렇게 받고 싶으면 아들딸 가리지 말라는 얘기를 시어른한테 먼저 해서 시댁 사람들끼리 풀 일이지 않았을까?
시댁 어른 두 분은 참 잘 다툰다. 요새는 어머님이 아닌 아버님이 밥을 하고 빨래를 한다는데, 아직도 다투신다. 서로 말을 못되게 하신단다. 며칠 앞서 이웃집 할머니가 전화를 했다. 밤 열 시가 넘은 때인데, 우리 시어른이 계신 시골집에서 살고 싶다고, 그쪽으로 갈 수 있겠느냐고 물으신다. 이웃집 할머니는 할아버지한테 너무 볶여서 삶이 괴롭다고, 그 나이에도 더 볶이기 싫다고 한숨을 쉬신다.
시어머님도 이웃 할머니도 여든 넘은 나이에 스스로 마지막 삶을 보낼 터전이 없다. 할머니들뿐 아니라, 할아버지들도 그렇게 오래 함께 살아왔으면서도 마음을 맞추는 길을 못 찾고서 푸념에 막말을 너무 쏟아낸다고 느낀다.
그끄저께에 《80세 마리코》라는 만화책 열여섯 자락을 장만했다. 열여섯 자락이나 되는 긴 만화이지만, 한달음에 다 읽었다. 놀랐다. 만화책 이야기라고는 해도, 여든 살 나이에 집을 나와서 스스로 새롭게 살아간다는 줄거리는 놀라울 뿐이다. 여든 살에 이르도록 피땀을 흘려 마련한 ‘내 집’인데, ‘내 집’이 내가 살아가는 집 같지 않아서 씩씩하게 ‘여든 살 동안 일군 피땀’을 훌훌 내려놓고서 맨몸으로 뛰쳐나왔단다.
누구나 똑같다. 좋아서 늙은이가 되겠는가. 좋아서 오래 살겠는가. 다만, 나이가 들거나 오래 살아간다면, 다 뜻이 있으리라. 여든 살 나이에 ‘내 집’을 스스로 버리고서 홀로살이를 해야 하는 뜻이 있을 테고, 새롭게 배우는 하루가 있을 테고, 이제부터 여든 살에도 새롭게 지을 이야기와 글과 사랑이 있으리라.
만화책을 읽다가 생각한다. 우리 시어머님 집에 가서 한달살이를 해볼까. 한 달이 버겁다면, 이레살이를 하고 싶다. 할머니 곁에서 ‘어른살림’이라는 길을 여쭙고, 새롭게 하루를 맞이해 보고 싶다. 그렇지만 우리 가게에서 나물 손질을 맡을 일꾼이 없다. 한달살이는 어렵다. 이레살이도 만만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면 이레에 하루쯤 찾아가서 두 분 사이를 풀어주는 징검다리는 될 수 있을까.
내가 보기로는, 시어른 두 분이 티격태격하기 때문에 오히려 두 분이 아프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긴다. 티격태격이 사라지면 거꾸로 서로 기대던 힘을 잃을는지 모른다. 이렇게 싸우면서 버티는 힘일 텐데, 이제부터는 싸움이 아닌 사랑으로 서로 바라보고 기대는 마음으로 나아가 보시도록 이어주고 싶다.
아무래도 두 시어른은 여태까지 사무치도록 골이 깊은 말씨를 하루아침에 바꾸기 어려울는지 모른다. 그러나 바꾸기 어려운 일일수록 뜻밖에 갑자기 돌릴 수 있지 않을까. 내려놓을 수 있다면, 벗어버릴 수 있다면, 새길을 바라볼 수 있다면, 스스럼없이 바꿀 수 있다.
《80세 마리코》에 나오는 여든 살 마리코 할머니는 갖은 고비에 가시밭길을 헤쳐나간다. 우리나라로 치면 좁은 피시방 외칸에서 겨우 먹고살면서도 꿈을 놓지 않는다. 아니, 더 밑바닥으로 내려갈수록 더 꿈을 품는다. 아슬아슬하고 아찔하게 떨어진 바닥에서 맨몸으로 다시 일어서는 빛을 스스로 찾아나선다. 이렇게 한 걸음씩 나아가기에 나중에는 ‘나이를 넘어선’ 동무와 이웃을 사귀고, 어떤 옷차림이건 대수롭지 않을 뿐 아니라, 즐겁게 삶을 빛내는 길을 연다.
살아서 마음에 맺힌 응어리를 풀지 못하면, 남은 사람이 풀어주지 않는다. 짊어지려 하기에 무거운 짐이다. 내려놓으면 된다. 끌어안으니 짐이지만, 이웃한테 나누거나 베풀면 빛으로 바뀐다. 굳이 짐을 안고 갈 까닭이 없다. 다 풀어내고, 다 내려놓고, 다 떠나면서, 맨몸에 맨손에 맨발로 풀밭에 서면, 우리 마음은 어느새 푸르게 바뀌리라 생각한다.
2023.11.11. 숲하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