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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늙은 여자 - 알래스카 원주민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
벨마 월리스 지음, 짐 그랜트 그림, 김남주 옮김 / 이봄 / 2018년 4월
평점 :
제목과 서문을 읽으며 두 늙은 여자가 어떤 고난을 당하였고, 그것을 어떻게 극복하였는지 궁금했다. 고난 극복의 열쇠를 자기 부족에게만 전수해 준 것 같아 호기심이 생겼고, 다 읽고 나면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책을 다 읽고 나의 생각은 바뀌었다. 다른 사람의 고통과 아픔을 통해 고작 지혜나 배우겠다는 자세는 잘못된 것이었다. 부족과 가족의 배신을 견디고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싸워야 했던 처절한 몸부림이 삶에 경외감을 느끼게 했다. 무엇보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라는 멋있는 말을 스스로 증명해 준 두 여인이 고마웠다. 그리고 포큐파인 강과 유콘 강이 합쳐지는 둑 위 텐트 속에서 어머니의 말을 듣던 딸의 고백처럼 나도 그렇게 강인하게 늙고 싶다고 생각했다.
<<두 늙은 여자>>는 알래스카 인디언이 들려주는 생존에 대한 이야기이다. 알래스카라는 말만 들어도 몸이 오그라들고 강추위와 매서운 바람, 하얀 설원이 떠오른다. 그 속에서 살아가는 인디언들은 살기 위해 이동하고, 사냥을 한다. 생명을 가진 모든 생명체는 살기 위해 자신보다 약한 존재를 죽이고, 먹을 수밖에 없다. 특히 추운 겨울은 식량도 부족하고 기후와 상황이 더욱 열악해져 건강한 사람들도 쓰러지기 쉽다. 부족을 책임지고 이끌어야 할 족장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자기 부족 사람들을 굶기지 않고 겨울을 나게 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은 가장 힘없고, 나약하며 돌봄을 필요로 하는 두 늙은 여자-칙디야크와 사-를 버리고 떠나는 것이다.
- 그러니까 사람들도 생존을 위해 이따금 짐승의 방식을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젊고 힘센 늑대들이 늙어서 힘이 없어진 옛 우두머리를 달가워하지 않는 것처럼. 19.p
혹독한 고통과 시련 앞에 사람들은 다양한 선택을 한다. 선택한 것에 대해 무엇이 옳고 그르다고 평가할 수 없다. 각자의 입장에서는 선택한 것이 가장 최선의 방법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부족의 젊고 힘 있는 다수의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잉여라고 생각한 두 늙은 여자를 버렸고, 버려진 두 사람은 자신들의 앞날을 놓고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했다.
- 우리가 이 세상을 떠나야 할 때는 아직 멀었어. 하지만 그저 여기 앉아서 기다리기만 한다면 우리는 반드시 죽고 말 거야. 사람들에게 우리의 무력함을 증명하게 될 거라고. 28.p
- 그래, 사람들은 우리에게 죽음을 선고했어! 그들은 우리가 너무 늙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다고 여기지. 우리 역시 지난날 열심히 일했고, 살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들은 잊어 버렸어! 그래서 지금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거야. 친구야.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고. 가만히 앉아서 죽음을 기다릴 게 아니라 말이야. 29.p
두 사람은 살기를 선택했다. 가만히 앉아 죽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 옳았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뭔가 해보고 죽자는 여인의 말에 눈물이 났다. 어쩌면 그들이 무언가를 한다고 해도 살아남을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그래도 살기 원한다면 사는 쪽을 선택하고 살기 위한 방법들을 생각해야 한다. 그동안 살아온 경험을 떠올리고, 현재 남아 있는 것이 무엇인지 확인해야 한다.
다른 이의 경험을 듣고 그들의 삶의 의지에 대해 박수를 보내는 것은 쉽다. 그러나 그 고난을 당한 주체가 내가 된다면 상황은 달라질 것이다. 순간순간 떠오르는 배신감과 추위, 배고픔, 두려움과 외로움이란 괴물이 달라붙어 하루하루 힘든 싸움을 해야 하며 버텨내야 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그 고통은 누구의 책임일까.
버려진 사람들도, 무거운 침묵 속에 그들을 버리고 떠나야만 했던 부족 사람들도 모두 행복하지 못했다. 아니 더 깊은 절망과 고통의 나락으로 떨어져 방황하고 주저앉아 죽음을 생각해야만 했다. 모두 다시 제대로 살기 위해서는 처음으로 되돌아가는 수밖에 없다. 잘못 선택했던 순간으로 돌아가 잘못된 것을 바로 잡고 다시 시작하는 것이 최선의 방법이며, 또 다른 선택을 해야만 하는 순간이다. 더욱 신중해야 하고 그만큼 선택한 것에 대한 강한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
- 이 책에서 벨마 윌리스는 말한다. 삶에서 자신이 진정으로 해야 할 바를 성취하는 데에는 사회에서 평가하는 능력이나 나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능력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이가 왜 안 중요하겠는가. 마흔 개의 여름이 어떻게 여든 개의 여름을 이기겠는가. 마흔 살에게 마흔한 번 째 봄은 미지의 시간이지만 여든 살에게는 무엇으로도 쓸 수 있는 단단한 기억인 것을.
시간이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깊이의 문제이고, 그림을 그림이게 하는 것 역시 원근이 아니라 깊이(메를로 퐁티)라는 것을 칙디야크와 사가 그들이 본 여든 한 개의 여름과 일흔 여섯 개의 가을로 확인해준다. - 171.p
저자의 말이 무엇보다 마음에 와 닿는 요즘이다. 지난 역사를 보며 묻고 배울 수 있게 되기를. 1919년 4월 11일 임시정부수립을 기준으로 본다고 해도 백 개의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오천 여개의 사계절을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겸손한 마음으로 5천여 번의 사계절에게 묻고 또 물을 수밖에 없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