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 100호 - 2019.가을
문학동네 편집부 지음 / 문학동네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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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진은 어렵게 미국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영화감독으로 살아간다. 그녀가 놓지 못하고 있는 감독으로서 더 이상 보여줄 수 있는 그녀만의 이야기가 아직은 없다. 아니 팔 수 있는 것이 없다.

 

미진은 남자 프로그래머의 얼굴을 뜯어봤다. 그녀는 앞에 서 있는 이 사람의 표정을 기억하고 싶었다. …… 이제 더 팔 게 없겠네요.” …… 뭘 팔아요? 미진은 되묻지 못했다. 대신 그를 따라 희미하게 웃었다. 85.p

 

그녀가 계속 팔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미진은 자신이 선택한 삶의 경계선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지만 타협할 수 없기에 힘들게 버티고 있다. 그런 미진의 일상을 따라 그녀가 들려주는 지난 시간을 들여다본다. 얼마나 많이 좌절하고 우울했을까. 무엇이 그녀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을까. 예수는 사람이 빵으로만 살 수 없다고 했지만 역설적으로 빵이 인간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 말해 주었다.

 

미진은 돈을 벌지 않았다. 그녀는 당분간 아무것도 팔지 않기로 했다. 살아가는 데에 그리 큰돈이 들지 않았다. 살아졌다. 86.p

 

실은 영화를 제쳐두고, 어디에서든 일을 한다면 어머니에게 빌붙지 않고 최소한의 사람 노릇을 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그것도 뭐든 팔 게 있을 때나 가능할 테지만…… 87.p

 

가난한 예술가는 사람 노릇을 할 수 없다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나 그것은 팔아야 할 것을 더 이상 찾지 못 했을 때의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예술가는 가난할 수 있어도 자신이 추구하는 것을 무언가를 찾아내야 하고,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야 예술가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기 위해서 먼저 자기 자신과 싸워 강해질 수 있어야 한다. 지난 시간 동안 자신도 모르게 쌓아 놓았던 위선과 거짓을 벗어내도록 애쓰지 않으면 안 된다. 진실한 자신과 마주할 수 있을 때까지 싸우고 견디고 이겨낼 수 있어야 할 것이다. 그것이 아무리 힘들지라도.

 

젊지도 늙지도 않은, 그렇다고 아마츄어도 번듯하게 내세울 수 있는 필모그래피를 쌓은 프로도 아닌 애매한 중간 어디쯤에 서있는 예술가에게 타인과 현실은 냉혹하다. 그 매서운 바람을 맞으며 끝까지 견뎌내야 하는 것은 오로지 그들의 몫이다.

 

우리는 모두 언젠가 상처받을 것이다. 우리가 사랑했던 아름다움으로부터…… 90.p

 

그래서인지 이 두 개의 문장이 유독 가슴이 와 닿고 아프게 한다. 사람은 각자 타인과 다른 자신만의 고유한 존재이며, 다양한 재능을 갖고 있다. 저마다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나게 만드는 분야도 다르다. 마음을 들뜨게 했던 것을 쫓아가다가 어느 순간 다른 이들과 너무 멀리 왔고,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것이 남아있을까. 그때 한 번도 상처 받지 않은 것처럼 계속 가라고 말하고 싶은데 선뜻 입에서 그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지만 상처받을지라도 사랑했던 아름다움이 존재했다는 것만으로 위로가 될 수 없을까. 태어나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하고, 갖지도 못한 사람들이 더욱 많을 테니까. 그것으로 퉁 치면 안 되는 것일까.

 

나는 아마 내 멋대로 살다가 죽겠지.”

포기하는 기분으로 아무 말이나 중얼거렸는데, 이상하게 힘이 났다.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이 지겨운 것들 중 소중하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105.p

 

몽골을 여행했을 때, 태양과 가까운 고산지대라 식물이 양지가 아닌 음지에서 자라는 것을 보았다. 뜨거운 태양이 그것들을 태우기 때문이었다. 의심하지 않았던 상식이 한순간에 깨졌다. 고단하고 지친 일상 속에서 많은 예술가들에게 위로를 받으며 살아왔다. 음지처럼 차갑고 어두운 곳에서도 생명은 힘이 있어 자라게 되어 있다. 그들이 서 있는 자리가 그런 곳일지라도 그들 멋대로 자기답게 살다가 죽어가길 간절히 바란다. 예술가의 삶만큼 모든 이들의 삶도 고단하고 힘이 들긴 마찬가지이니까. 그 말이 힘이 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자연스럽고 아름다운 문장과 가난한 예술가의 회피할 수 없는 현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아무것도 팔지 않고, 아무에게도 밥을 차려주지 않는 인생을 살아 갈 것이라고 말하는 캐릭터를 품은 작품을 만날 수 있어서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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