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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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 제목대로 키로가의 작품 속에는 사랑, 광기, 죽음으로 가득하다.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섬뜩한 단어들이 마치 한 몸처럼 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 소름끼친다. 그러나 사랑과 광기는 누구나 한번은 마주대할 혹은 마주하고 싶은 매혹적인 단어이며, 죽음이란 우리가 결국 맞이하게 될 최종 목적지가 아닌가. ‘오라시오 키로가라는 작가의 이름이 낯설었던 것과 맞물려 기괴하고 묘한 분위기를 풍겼던 그의 작품들도 생소했다. 세밀하고 복작한 감정과 음침한 분위기가 작품마다 스며들었고, 그것은 내가 이 소설을 읽어 내려가는 데 원동력이 되었다. 어두운 음지 속에서 가느다랗지만 강렬한 한 줄기 빛이 세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오라시오 키로가가 그려내는 사랑은 대부분 힘들고 이루어지지 않는다. 소설 속 연인들이 나누는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고 느끼지 않으면 다가서기 힘들다. <뇌막염 환자와 그녀를 따라다니는 그림자>에서 사랑이 이루어졌다고 하나 그 과정은 이해하기 힘들고 복잡하다. 사랑만큼 이성으로 이해되지 않는 일이 또 있을까. 40도가 넘는 고열 속에서 어떻게 한 사랑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그 사람의 손을 잡고 강렬한 눈빛을 보낼 수 있는 에너지는 어디에서 나왔던 것일까. 사랑은 알 수 없는 경로로 찾아와 뿌리내리고 마음속에서 점점 커지게 된다. 마치 병처럼. <사랑의 계절>의 네벨과 리디아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못한다. 리디아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은 봄날 꽃처럼 금방 사라졌고, 두 사람의 순수한 사랑은 서로의 가슴속에만 남게 된다. <엘 솔리타리오>에서는 사랑하는 아내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보석을 세공하는 남편, 주문받은 다이아몬드를 탐낸 아내의 욕망을 통해 사랑의 또 다른 이름은 집착과 광기가 아닐까 생각했다. 사랑에 빠지는 것은 다른 의미에서 광기나 저주일 수 있다.

 

 

  사랑과 함께 소설의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은 광기이다. <목 잘린 닭>에서는 알 수 없는 이유로 백치로 태어난 네 명의 아들들을 생각하게 한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하루 종일 벤치에 앉아 담벼락을 바라보는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는 담벼락 너머에는 무엇이 도사리고 있었을까. 오랜 시간 조용히 앉아 있기만 했던 그들 가슴속에 한 순간 광기를 심어준 것은 하녀의 손에 의해 붉은 피를 흘리며 잘려지고 있던 닭들의 목이었다. 하얀 머릿속에 붉은 피가 솟아오르는 이미지가 잔인한 불행을 불러올 것만 같다. 그런가 하면 <사람들을 자살하게 만드는 배>에서 망망대해에 혼자 떠다니는 유령선의 기운은 음산한 기운을 일으킨다. 사람 내부에서 발현된 광기가 아니라 자연이 뿜어내는 견딜 수 없는 고요함의 광기 같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설명할 수 없는 일들로 가득하다. 그 일들이 우리 주위를 유유히 떠다니고 있지만 바쁜 현대인들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다양한 모습을 하고 찾아온 사랑과 광기의 두 손이 우리의 목을 조르고 죽음으로 끌고 갈 수도 있다.

 

 

  <멘수들>의 카예와 포델레이는 벌목장에서 계약을 맺고 고된 노동을 하는 인부이다. 힘든 노동을 한 후 받은 돈을 품고 포사다스에 가서 며칠 동안 여자와 환락, 사치를 벌이다가 다시 끌려가듯 벌목장으로 돌아간다. 그들이 보여주는 일상을 보면 개미지옥 같다. 값싼 임금을 받고 노예처럼 계약을 맺고 노동에 시달리다가 다시 짧은 환락을 맛보고 또다시 끌려 올라가는 삶의 반복. 그 속에서 병에 걸려도 병원에 가기보다 싸구려 약에 기대 계약된 노동을 채워야 한다. 주인들 몰래 도망도 가보았지만 소용이 없다. 그렇게 시간이 쌓이게 되고, 희망을 갖지 못하게 되면 멘수들 또한 병든 몸을 끌고 벌목장으로 돌아온다. 다시 주인들과 계약을 하고 배를 타고 환락의 거리로 기어들어가는 것이 반복될 뿐이다. 탈출구가 없다. 노역과 굴종과 짧게 주어지는 쾌락과 다시 고된 노동이 기다리는 벌목장의 반복이다. 이곳에서 탈출하는 것은 결국 죽음뿐이다.

 

 

  삶을 직시하지 못하고 바쁘게 살다 보면 진실을 외면하고 싶을 때가 있다. 그러다 문득 현실 너머 일그러지고 추악하게 변해있는 우리의 모습을 발견하고 경악하게 되는데 키로가가 그려낸 사랑 광기 죽음은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 싶어한 공포의 다른 모습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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