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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의 일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14년 11월
평점 :
품절
일상 속에 숨은 보물찾기
<소설가의 일>/ 김연수, 문학동네
2년 전, 친구들과 가까운 북한산으로 등산을 갔다. 가을 하늘은 그대로 오려서 편지를 쓰고 싶을 만큼 파랗고 깨끗했다. 많은 사람들이 쌍방향에서 올라오고 내려가면서 짧은 순간 마주쳤고 인사를 나눴다. 적당히 땀도 흘리고 싸가지고 온 간식도 먹었기에 기분이 좋았다. 산을 내려오면서 친구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움푹 파인 곳에서 넘어졌고, 오른쪽 발목에서 우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그대로 병원에 실려가 다섯 시간동안 골절 수술을 받고, 2주 동안 입원을 한 다음, 깁스를 하고 퇴원을 했다. 그리고 두 달 동안 외출하지 못하고 집에만 있었다.
우리는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시간을 경험한다. 경찰에게는 경찰의 방식이 있고, 어부에게는 어부의 방식이 있다. 마찬가지로 독자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현재를 경험한다. 독자에게 과거란 어떤 책을 읽지 않은 상태를 뜻하고, 미래란 어떤 책을 읽은 상태를 뜻하겠지. 그렇다면 독자에게 현재란? 어떤 책을 읽고 있는 상태다. 다들 지금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 어떤 책을 읽고 있으면 독자인 셈이다. … 내게 현재란 어떤 소설을 쓰고 있는 상태를 뜻해야만 한다. … 그저 어떤 시간의 흐름이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 자신이 경험한 시간의 흐름을 소설로 보여줄 수 있다면, 결과적으로 그는 소설가가 된다. … 비밀은 시간을 어떻게 경험하느냐에 달린 셈이다.
11~14쪽
나에게는 회복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만두고 싶다고 버릇처럼 내뱉었던 일은 저절로 쉬게 되었고, 일요일마다 교회에 가서 드렸던 예배는 인터넷 예배로 대체했다. 계획해 두었던 여행, 약속, 모임 등은 모두 취소했다. 집에서 책을 읽고, 그림을 그리고, 빛을 쪼이며 엄마가 차려준 밥과 약을 꼬박꼬박 챙겨 먹었다. 그것만으로 하루가 꽉 차고 금방 갔다. 가을이 가고 겨울이 왔다. 베란다에서 햇볕을 쬐면서 해가 짧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을 읽었다. 그가 책에서 시간을 경험하는 비밀을 이야기했다. 주어진 상황에서 내가 할 수 없는 일과 할 수 있는 일을 구분하고, 할 수 있는 일을 꾸준히 하는 것만이 내게 주어진 시간의 비밀을 경험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이 책은 계획에 따라 규칙적으로 글을 써야 하는 쓰는 소설가의 일에 대하여 말하고 있지만, 단순히 소설 쓰는 방법을 제시하는 글은 아니다. 바쁘지만 지루한 일상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에 대하여 쓴 글이기도 하다. 소설이라는 단어를 지우고 자신이 지금 하고 있는 일이나 이루고 싶은 것을 집어넣으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리를 다치고 난생 처음 다섯 시간동안 수술을 받고, 집에서 두 달 가까운 시간을 보내면서 그 동안 내가 보냈던 시간들과 앞으로 무엇을 하며 보내고 싶은 지 ‘시간의 비밀’을 깨달았던 것이다. 매일 반복되는 시간속에서 흘린 땀은 소중하다. 그것이 모여서 소설가에게는 몇 개의 작품이 되었고, 또 누군가는 적금 통장이 되었고, 누군가는 무언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 시간을 보낸 나는 대학원에 진학했다.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기로 결심했다. 멈추지 않고 매일 조금씩 해나갔다. 소설과 희곡과 동화, 비평 및 서평 등을 쓰고, 틈틈이 돈을 벌기 위해 과외를 했다. 1년이 지나고 발목에 박은 철심을 제거하기 위해 다시 수술을 받았다. 퇴원을 한 뒤 친구가 생일 선물로 은반지를 사주었다. 그 반지에 ‘쓴다, 기도한다’라는 동사를 새겨 넣었다. 인생의 중반에서 나를 말해주는 2개의 동사를 찾게 되었다.
우리 개개인은 충분히 오래 살지 못하지만 우리 인류는 충분히 오래 살 테니, 우리 모두는 고통과 절망 속에서 죽겠지만 우리가 간절히 소망했던 일들은 모두 이뤄지리라. 우리가 우주라는 무한한 공간의 역사라는 무한한 시간을 상상할 수 있다면, 과거의 빛과 미래의 빛이 뒤섞인 밤하늘처럼 과거의 사람들과 미래의 사람들이 우리와 함께 있는 광경을 상상할 수 있다면, 먼 훗날 어딘가 다른 곳이 아니라 지금 즉시 바로 여기에서, 마흔 살이 지난 뒤에도 우리가 미혹돼야만 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264쪽
무언가 꾸준히 해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이 꽤 괜찮은 존재라는 것을 깨달으면서 우리의 일상 속에 숨어 있는 보물들을 계속 찾고 싶다. 같은 일을 반복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기쁜 일인지, 앞으로도 우리를 미혹할 것들이 삶 곳곳에 숨어 있다는 사실이 마음을 설레게 하는 12월이다.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 / 미스다 마리 만화, 권남희 옮김, 이봄
책을 선택할 때는 다양한 기준과 방식이 있다. 이 책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읽게 되었다. 과연 작가의 삶이 평범하면서도 느긋할 수 있을까? 작가생활과 동떨어져 보이는 ‘평범한, 느긋한’이란 단어가 내게는 간절했다.
나는 대부분의 일에 크게 흥미가 없습니다. 그렇지만 가본답니다. 찾고 있는 무언가를 만나기 위해. … 일단 가보기로 한답니다. … 사실은 가고 싶지 않습니다. 귀찮아. 그러나 갑니다. 찾고 있는 무언가가 그곳에 있을지도 모르니. … 「화려하다고 다 독버섯은 아닙니다.」 뭔가 재미있다. 귀가 번쩍 뜨이는 말을 만나기 위해.
14~17쪽
내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 같았다. 글을 쓰고 싶어 하면서도 대부분의 일에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그러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 새로운 세계를 기웃거리는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기웃거리는 세계에 다가갔다가도 머뭇거리고 귀찮아하는 것까지. 그렇지만 용기를 내어 가고 싶어 했다는 것에 내 자신을 다독인다. 그리고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 수많은 날과 많은 일 중에서 귀가 번쩍 뜨이는 것들을 찾아내는 일이 아주 간혹 있기 때문이다. 공부를 하고 수업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면서 평범한 날을 보낸다. 느긋하게. 그것 외에 특별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이 없다. 평범한 하루하루가 쌓이다 보니 느긋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된다.
교양 있는 사람은 다르구나. 언어에 폭이 있어. 저는 정말로 어휘가 부족해서… 그렇지만 저는 이야기를 만들지 못하잖습니까. 생각하시는 대로 써주세요. 그 이외의 일은 제가 할 일이니까요. 서로 존경함으로써 사람은 서로 신뢰할 수 있습니다. … 자신이 못하는 것을 인정하고 남이 잘하는 것을 존경하는 마음. 그런 단순함이 실은 같이 일을 하면서 중요한 게 아닐까.
117~120쪽
세상은 나 혼자 살 수 없고,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다리를 다치고 집에서 쉬는 동안에도 여러 사람의 손을 빌렸다. 가족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씻지도 먹지도 못하고, 잠도 제대로 자기 힘들었을 것이다. 책과 차(茶), 화구를 사서 보내준 친구들과 기도해 준 지인들 때문에 무료한 시간을 재미있게 보냈고, 새로운 취미를 갖게 되었으며, 심신의 안정을 찾았다. 사적인 일뿐만 아니라 일을 할 때는 더욱 그렇다. 작가처럼 아무리 혼자 하는 일이라 해도 쓴 글을 읽어주고 좋은 점과 부족 한 점을 알려주며 좋은 방향으로 더 나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협업이 필요하다. 누가 더 똑똑하고 잘나서가 아니라 서로가 가진 장점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것을 깨달을 수 있다면 평범하지만 느긋한 작가생활을 해 나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무엇보다
그나저나 밤마다 무언가를 매일 쓰고 있는 나에게 내 마음이 느긋하면서도 평범한 작가생활을 하고 있다고 말해주었으면 좋겠다.
<주말엔 숲으로> 마스다 미리 만화, 박정임 옮김, 이봄
어느 날 하야카와가 시골로 내려간 것처럼 3년 전 친구가 제주도로 내려갔다. 겁이 많아 혼자서 여행도 못 가는 친구였는데 출근길, 전철 안에서 쓰러지고 나서 직장에 사표를 낸 뒤 가족에게 독립을 선포하고 제주도 도민이 되었다. 서울이 아니라 제주도라니 친구 덕분에 나는 계를 탄 듯 시간이 되면 제주도에 간다. 제주도는 나에게 언제나 비행기를 타고 한 시간만 날아가면 놀러갈 수 있는 곳이 되었다.
제주도에 가면 친구와 내가 꼭 가는 곳이 있다. 바로 사려니숲이다. 6월의 사려니 숲은 대부분 습기를 가득 머금고 몽환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숲이 보내주는 천연 미스트를 피부가 쏙쏙 빨아들이길 바라며, 보랏빛 산수국이 곱게 피어있는 숲길을 걷다보면 저절로 행복해진다. 친구와 함께 3시간 정도 함께 걸으며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마음과 몸도 튼튼해지고, 입맛도 좋아진다.
인간은 목적지에 도착하기 위해서만 걷는 건 아니다. 16쪽
한 번은 숲길을 걷다가 풀과 풀 사이로 거미집을 짓고 있는 거미가족을 보았다. 내가 핸드폰으로 촬영을 하든지 말든지 거들떠보지도 않고, 열심히 거미줄로 자신들의 영역을 확장시켜 나가는 두 마리의 거미가 당당해보였다. 저 거미줄에 많은 곤충들이 걸리게 되면 빠져 나오지 못하고 거미 가족의 식사거리가 될 것이고, 거미 가족은 잡힌 곤충들을 먹고 또다시 힘을 내서 알을 낳고, 집을 짓고 살아가고, 숲에는 많은 생명들이 함께 잘도 살아가고 있다. 그 생명들 사이를 걸으면서 작년 이맘때 쯤 그 당시 숲의 모습을 복기해 보기도 한다.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숲은 나와 친구를 많이 닮았다. 우리는 그때의 모습과 별로 달라진 것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과 생각은 아주 조금씩 달라져 있었다. 숲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여전히 보랏빛 산수국은 고운 모습으로 피어있고, 삼나무와 산딸나무, 소나무가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 있지만, 그 길이와 두께는 조금씩 달라져 있을 것입니다.
‘우주에 대한 상상을 할 수 있는 건 이 숲속에서도 인간뿐이야. 상상력이 없다면 인간다움이 없는 게 아닐끼’ 66쪽
숲에 가면 저도 모르게 식물과 동물, 돌들과 공기와도 대화를 하게 된다. 산딸나무꽃은 왜 하늘을 바라보고 잎과 비슷한 모습으로 피어있는 걸까요? 자신이 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잎이 되고 싶은 걸까요?
‘내년을 약속하는 건 좋은 거 같아. 자신이 내년에도 건강하게 있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지금’ 106쪽
숲의 지금은 우리의 지금이고, 숲의 내년은 또 우리의 내년이 될 것이다. 사려니 숲을 나오며 내년에 할 일 한 개를 정해두어서 불끈 힘이 났다. 아마 서울에 올라가면 잠시 숲을 잊을지 몰라도 미리 잡아놓은 계획 때문에 열심히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숲에서 숲을 생각하니 나의 마음속으로 숲이 들어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