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잖아
황인숙 지음 / 달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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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반갑고 그리운 그곳 해방촌

 

우연히 읽게 된 산문집에서 나의 어릴 적 추억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동네가 나왔다. 여전히 사랑하는 친구들과 이웃들이 살고 있는 동네 해방촌. 해방촌은 시간이 느리게 가는 동네다. 서울 시내 한 가운데 자리 잡고 있으면서 남산을 자신의 뒷산쯤으로 여기고 살아가는 사람들. 그곳에서 언덕과 오거리를 뛰어다니며 중·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정일학원의 재수생들은 까마득한 어른이었다가 선배들이 되었고, 내 동기나 후배들로 변하였다가 지금은 사라지고 외국인 학교가 자리 잡고 있다. 얼마 전, 그 학교 앞 전봇대에 친구의 자동차 번호판이 걸려 있었다. 본인도 모르는 사이 떨어졌던 모양인데 그것을 친구의 조카가 보고 전화해 주어 찾으러 갔던 일이 생각나 한참을 웃었다.



나와 친구들, 가족과 이웃들이 얽히며 살았던 동네가 또 다른 사람들의 추억과 일상을 품고 있었다는 것을 책을 읽으며 깨닫는다. 저자의 발길이 닿는 곳 구석구석, 나 또한 머물다가 간 자리들이 많다. 공간이 주는 힘은 크다. 책을 읽으며 마치 시·공간을 초월하여 타임머신을 타고 여행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떠나왔지만 지나간 과거의 한때가 남아 추억을 소환하고, 동시에 현재진행형의 시간이 여전히 계속되고 있는 동네. 그곳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작가와 고양이들의 치열한 이야기들이 담겨있다. 그래서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이라 노래했던 시인처럼, ‘남산 길 눈송이 같은 벚꽃 흩뿌리는 사월이 되면하고 노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꽃 피면 어김없이 중간고사기간이 돌아온다는 친구의 푸념이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오늘은 두 달 만에 해방촌에 갔다. 그곳을 떠나왔지만 내가 다니는 교회가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19가 번지기 전에는 일요일마다 예배를 드리고 친구들이나 지인들과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남산을 한 바퀴 돌며 산책을 한 다음 남산 도서관에서 책을 빌리고 새롭게 생긴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다가 집에 돌아왔다.



 

카페를 한다는 건 1365일 하루도 빼놓지 않고 집들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한다. 사 람을 환대하는 마음이 크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 70.p



 

그 시간이 꽤 길었으니 거리를 오가며 저자와 마주쳤을 수도 혹은 같은 시간과 공간을 공유하며 각자의 오후 시간을 보냈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젠가부터 해방촌 곳곳에 크고 작은 카페들이 생겨났다. 그 중에는 친구가 살던 집이었던 곳도 있다. 커피를 마시며 여기가 마루였고, 저기가 안방이었는데 하며 또 지난 과거를 떠올렸었다. 공부한다고 모여서 밤새 만화책을 읽고 수다를 떨었던 10대의 여학생들. 부모님들은 이런 우리를 아마 알고도 속아 주었을 것이다. 카페를 한다는 건 집들이를 하듯 사람들을 환대하는 마음이 커야 가능하다는 말이 마음에 와 닿는다. 그러나 그 시절 나와 친구들의 부모님들은 제 집 드나들 듯이 찾아오는 철없는 우리들을 잔소리와 함께 맞아 주셨다. 그래서 지금까지 가슴 따뜻해지도록 환대받는 기분이 어떤 것인지 감각적으로 체득할 수 있게 되었다. 검은 머리에 젊고 에너지 넘쳤던 우리의 엄마들이 눈에 선하다.



 

비를 맞으며 야옹이를 부르던 그리운 내 친구는 어디로 갔을까

 

이 동네에는 남산이 있어서 그런지 유독 길고양이들이 많다. 누군가 키웠다가 버린 고양이들도 많고, 그 고양이들이 새끼를 낳아서 더 많아지기도 하는 것 같다. 고등학교 때, 비가 많이 내리던 토요일 용산 도서관에 시험공부를 하러 가다가 비를 맞으며 자동차 밑을 들여다보고 있는 같은 반 친구를 만났다. 계속 야옹이를 부르는 친구를 따라 그 밑을 들여다보니 아주 작은 새끼 고양이가 쭈그리고 앉아 있었다. 참치캔을 그 밑으로 넣어주고 계속 지켜보던 친구는 야옹아, 야옹아 하고 연신 불러댔다. 친구의 눈은 이미 붉어져 있었다.

네 고양이야?”

아니. 집에 데리고 가고 싶은데 엄마한테 혼날 것 같아서 고민 중이야.”

학교에서는 전혀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친구의 얼굴에 조금 놀랐었다. 그때까지 나는 고양이가 무섭고 징그러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했었는데 조그만 생명이 벌벌 떨고 있는 모습은 내 마음에도 작은 떨림을 일으켰다. 그때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친구에게 우산을 씌어 주는 것뿐이었지만 말이다. 그때 그 친구는 아직도 그 동네에 살고 있을까.



 

내 삶은 확실히 길고양이들 밥을 주기 전과 후로 갈렸다. 요점만 말하자면, 길고양이들에게 밥을 주기 시작한 뒤로 나는 사람들에게 훨씬 착해졌고, 순해졌다. 유독 못난 사람들에게 유독 해코지를 당하는 고양이들을 보호하려는 이념으로 유독 못난 인간한테 참을성은 또 얼마나 많아졌는지……. 2층 세입자는 그런 걸 알 바 없으니 움찔한 것이다. - 146.p



 

책을 읽으며 고양이에 대해 모르던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고양이란 동물이 물을 많이 먹어야 하는 것도, 삼색 고양이 수컷이 희귀하다는 이유로 일본에서는 2천만 원이 넘는다는 것, 더불어 비둘기가 젖을 먹이는 새라는 것 까지. 내 주변에 늘 있는 존재들인데 그들에 대해서 제대로 아는 것이 없다는 것이 미안했다. 동물을 사랑하고 아끼는 사람들은 사람과 사회에 대해 염려하고 분노하는 것에 대해서도 확실하다. 약자를 외면하지 말았으면 하는 것. 많은 사람들이 보지 못하거나 생각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 질문을 던져 준다는 것 등 말이다.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을 생명에 대한 측은지심이 들고 그 마음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들이 있어서 세상이 조금은 더 천천히 차가워지는 것 같다.



우리를 지켜줄 영혼의 동네를 잃어버리지 않길

 

해방촌에 살던 시절, 나는 학교, 교회 수련회나 여행을 떠났다가 다시 돌아올 때 남산 타워가 보이기 시작하면 불안한 마음이 평온해졌다. 남산타워가 보인다는 것은 어느 방향에 있든지 걸어서라도 집에 찾아갈 수 있다는 신호였기 때문이다. 가끔 살면서 길을 잃거나 헤맬 때 편안하게 길잡이가 되어줄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물론 지금은 그것이 남산타워는 아니지만, 사회생활에 지치고 마음이 차가워질 때 따뜻했던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는 자기만의 공간이 오래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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