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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년 7월
평점 :
우리를 견디게 해준 모든 이름, 사랑
《여름의 빌라》,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시선으로부터,》
1. 여전히 우리가 기다리고 기대하는 것은 사랑 - 《여름의 빌라》/백수린
언젠가 읽었던 그림책 주인공 프레드릭, 귀여운 생쥐 프레드릭은 곧 닥치게 될 추운 겨울을 견디기 위해 자연의 색깔과 소리, 바람의 흔적과 향기 등을 모았다. 내가 해야 할 일도 그런 것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코로나19로 인해 세상과 단절되고 갑자기 주어진 시간을 견디기 위해 소설을 읽으며 꿈꾸고 상상했다. 거리두기와 멈춤을 반복하면서 춥고 어두운 겨울을 견디고 있는 요즘, 다른 사람들은 지리멸렬한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고 있을까?
8편의 단편을 담고 있는 백수린의 《여름의 빌라》 속 인물들은 나이도 처해있는 상황도 다양하지만 나름대로의 사랑을 시작하거나 진행 중에 있다. 사랑 속에는 달콤한 것만 있지 않다. 결혼한 옛 애인을 잊지 못하는 주재원이 있고, 임용되지 못한 채 대학가를 떠돌다가 아내의 친한 친구들과 언쟁을 버리는 대학 강사가 있는가 하면, 어린 딸을 남겨둔 채 이혼을 하고 다른 남자를 따라 미국으로 떠나는 비정한 엄마도 있다. 산다는 것이 고통과 상처주고받기의 연속처럼 느껴진다. 그런가하면 한 동네에 살면서도 앞으로 서로 다른 계층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감지하는 아이들이 있는가 하면 프랑스에서 혼자 고독한 시간을 견뎌내야 하는 노년의 여인도 있고, 바쁜 육아와 살림에 지쳐 상실감에 빠진 주부의 아픔도 뒤따른다. 일상을 살아낸다는 것은 어쩌면 평범함과 안온함을 가장한 불안한 줄타기 같은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그런 사람들의 일상을 관통하며 각자의 삶을 버티게 해준다. 작가는 유유히 흐르고 있는 시간과 상상의 세계를 넘나들며, 삶이 계속 되는 가운데 반짝 하고 빛나게 해 주었던 사랑의 순간을 포착한다. 그래서 겉으로 보여 지는 일상의 반복과 당연한 듯 바쁘게 움직이던 순간에도 가슴 설레며 우리를 아름답게 만들어 주었던 것 중에 ‘사랑’이 있었다는 것을 환기 시켜준다. 그러고 보면 사랑도 지나고 나서야 알게 되는 무엇이 아닌가 싶다. 지금 현재의 상황도 지나고 나면 무엇인가가 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할머니는 점점 더 늘어나는 혼자만의 시간을 어떻게 채웠을까?
-예상치 못했던 일이 주는 즐거움. 계획이 어그러진 순간에만 찾아오는 특별한 기쁨. 다 잃은 것 같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어느 새 한여름 유성처럼 떨어져 내리던 행복의 찰나들. 그리고 할머니는 일어나서 브뤼니에 씨와 함께 탑 위에 각설탕 하나를 더 쌓았다.
-이별의 순간에야 처음으로 잡은 남자의 주름투성이인 손은 따뜻해서, 할머니는 생각한다. 그것은 얼마나 오만한 생각이었던가 하고. 노인의 삶이 사지가 마비된 뇌졸증 환자의 것과 다르지 않다니. 이렇게 살아서, 할머니의 몸은 이렇게 살아서 이 모든 것을 생생히 느끼고 있는데.
- 《여름의 빌라》 /<흑설탕 캔디>중에서
나또한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던 10대를 지나, 풋풋한 첫사랑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던 20대도 이미 떠나보낸 지 오래다. 다른 사랑을 꿈꾸었던 30대를 건너 현재에 이르렀지만 사랑에 대한 기대는 식지 않는다. 사람들이 추억하고 꿈꾸는 것은 반복되는 지루한 일상 속에서 새로운 모습으로 또다시 찾아올 여러 모양의 사랑일 것이다.
2. 작가는 글로 말하고 독자는 읽기로 응원한다 - 《사랑 밖의 모든 말들》/김금희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을 읽다보면 문장과 문장 사이 보이지 않는 행간의 여백 속에 작가의 눈물과 한숨, 그리고 더 단단해 지기위한 노력들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이 안타까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묵묵히 글을 쓰면서 앞으로 걸어갈 길을 만들어 내는 작가임을 믿고 응원할 수 있었다. 김금희 작가가 그동안 몸으로 체험하고 마음으로 느끼며 사색과 글쓰기로 이만큼 치열하게 걸어주었던 것처럼.
올해 나는 김금희 작가의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아팠고, 그녀의 이름으로 나온 책은 대부분 구입해 읽으며 말없이 응원했다. 당연하다고 생각해 왔던 것에 대하여 거절을 표현하고 자신의 권리를 지키려는 작지만 단호한 목소리에 시대가 바뀌고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흐르는 물줄기를 억지로 막을 수는 없지만, 새로워지기 위해서는 누군가 용기를 내주어야 한다. 김금희 작가가 아니었다면 인지도 있는 유명한 상이 그런 불합리한 방식으로 계약을 맺고 있었는지 알지 못했을 것이다. 나는 작가들이 전면으로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보다 자기를 가리고 작품으로 이야기하는 내성적인 직업군이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녀가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행동한 일에 대한 결과와 파급의 시간을 견디는 것이 매우 힘들었을 것을 느낀다. 그러나 또 그만큼 자신의 삶에 대하여 성찰하고 깊어 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 창작자가 자신의 창작물을 만들어내면서 고유하게 생기는 권리를 ‘저작권’이라고 하고, 작가에게 그것은 생계와 자신의 존엄 그리고 이후의 노동을 반복할 수 있는 힘이다.
- 사랑의 문제가 사랑 이외의 모든 문제를 다루게 되는 것이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소설가의 소설이 아닌 산문은 작가의 내면을 드러내는 글이다. 허구의 주인공이 보여주는 세상이 아닌 우리가 함께 살고 겪으며 공유하고 있는 현실의 삶에 대한 생각이 펼쳐지는 글이기 때문에 작가 입장에서는 오히려 소설보다 더 조심스러울 것이다. 어떤 면에서는 대중 앞에서 벌거벗고 있는 느낌도 들 것 같다. 그럼에도 산문이 주는 감동은 현재 여기에서 치열하게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 있다. 《사랑 밖의 모든 말들》은 그녀가 소설가로서 소설을 쓰기 위해 소설이란 무엇인지를 나아가 자신은 누구인지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사유했는지 느낄 수 있게 해준다.
현재 많은 사람들처럼 작가도 힘겨운 시간을 보내고 있겠구나. 가장 사랑하는 것을 계속 해 나가기 위해 사랑하는 것 이외의 문제로 힘겨워 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길고 어두운 터널을 통과하는 과정이 힘들어도 우리는 각자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을 알고 있다. 사랑하는 것에 대한 끝없는 바람과 그 끈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이 지금의 자신을 더 단단하게 해줄 것을.
-소설의 시간이라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종결을 피하거나 지연시키면서 견뎌야 이야기가 된다. 연속에 대한 신뢰가 있지 않으면 불가능한 것이다. … 버틴다는 감각도 없이 그저 사라지지 않으려고 애쓰는 동안 의외의 것에서 삶은 동력을 얻고 이어지며 종결을 피한다. … 덩그러니 쓰인 한 문장은 그 하나이외에 언제라도 연속된 문장들이 있음을 지시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도 계속 쓸 수 있지 않을까.
/ 《사랑 밖의 모든 말들 중에서》
작가가 사라지지 않기 위해 버티는 줄도 모르고 한 단어, 한 문장을 계속 이어나가듯이 우리도 각자의 시간 속에서 삶을 지키고 버티기 위해 오늘도 애를 쓴다. 그 속에서 새로운 동력이 만들어지고 우리도 알 수 없는 무언가를 만들어 낼 것을 믿으면서 말이다. 작가가 글로 계속 쓰고 있다는 신호를 보내고 독자가 읽기로 끝까지 응원하듯이.
3. 강인한 사랑의 힘- 《시선으로부터,》/정세랑
나는 동사와 명사 혹은 명사와 고유명사가 겹치는 단어를 좋아한다. 그런 면에서 심시선 여사로부터 시작된 가족의 역사와 끈질기게 이어온 삶에 대한 열정이 마음에 들었다. 소설 속에서 시선의 삶과 목소리는 주로 생전의 인터뷰나 강의, 강연, TV토론, 축사, 편지 등을 통해 전해진다. 시작도 시선의 인터뷰부터이다.
진행자와 그녀는 제사 문화에 대해 토론 중이었는데 시선은 제사 문화에 대한 강경한 반대 발언과 함께 자녀들에게도 자신의 제사를 지내지 말라고 당부한다. 그러나 시선의 10주기를 맞이하여 그녀의 가족들은 하와이에 가서 딱 한 번 처음이자 마지막 제사를 지내기로 결정한다. 왜 하필 하와이였을까. 하와이는 시선이 6·25때 가족을 잃고, 사진 속 신부가 되어 떠나간 곳이었다. 어린 시선의 삶이 다시 시작된 곳이자 불행과 고통의 불씨가 된 마티아스 마우어를 만나게 된 곳이기도 하다. 그곳에서 후손들은 시선을 추억하고 기억할 수 있는 각자의 제수(祭需)들을 준비한다. 하와이와 제사, 모계를 중심으로 한 가족사 등 거시적인 역사와 문화를 개인적인 한 여인의 역사와 함께 묶어 풀어나간 작가의 노력이 빛난다. 맨 마지막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은 20세기를 살아낸 여자들에게 바치는 21세기의 사랑이다.’라고 표현했다.
역사는 통계와 수치, 공적인 기록으로 남아 후세에 전해지지만, 감동과 여운은 주지 못한다. 한 사람의 작은 인생 속에 커다란 역사가 담겨있지만 그것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전체 속에 파묻혀 생생하게 전달되지 못한다. 우리가 역사 속 사실을 체온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개인의 삶을 통해서이고, 문학이 감당해야 할 역할이기도 하다. 그것은 사랑을 기반으로 한 인간에 대한 존엄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뿌리를 내린 나무의 가지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떨어져서 사라지지만 다시 그 나무에 거름이 되고 가지가 되어 꽃으로 피어난다. 그것을 각자의 세밀한 현미경으로 들여다보고 공감할 수 있다면 지나간 시간을 살다간 사람들과 또 과거가 될 현재 우리의 삶도 슬프지만은 않을 것 같다.
소설을 읽는 동안 조금은 달라져 있는 나의 모습을 발견한다. 시선의 가문을 이룬 다양한 자녀들의 삶을 통해 우리가 아무렇지 않게 던지고 바라보았던 여러 모양의 폭력도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서울에서 하와이로, 하와이에서 독일까지 70년에 가까운 시간을 오가며 나약할 것만 같았던 한 여성의 삶이 끊어지지 않고 면면하게 이어져 내려 올 수 있었던 것은 생명력 위에 더해진 강인한 사랑이 밑바탕 되었기 때문이다.
- 우리는 추악한 시대를 살면서도 매일 아름다움을 발견해내던 그 사람을 닮았으니까. 엉망으로 실패하고 바닥까지 지쳐도 끝내는 계속해냈던 사람이 등을 밀어주었으니까. 세상을 뜬 지 십 년이 지나서도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람의 조각이 우리 안에 있으니까.
《시선으로부터, 중에서》
사랑은 우리가 힘들고 고통스러운 시간을 견딜 수 있게 해줄 만큼 힘이 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