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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예프스키의 가장 속물적인 돈 이야기
석영중 지음 / 예담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나는 문학작품에 대한 글, 특히 평론가들의 글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 평론가들의 글을 별로 읽어본적도 없다만.) 유명한 소설이나 시 뒤에 붙어있는 평론들은 왜이리 고상하고 어려운건지. 어쩌다 문학평론가가 쓴 책을 읽을라치면 이건 산문이 거의 시 수준이다. 사람은 자기 깜냥만큼만 읽어낼 수 있을 뿐이니, 내가 거기까지 욕심내는건 순전히 '젊음의 치기'일 뿐이다. ^^ 그런데 이 책은 좀 다르다. 물론, '평론가'가 아닌 '번역가'의 책이고, '평론'이 아니라 일종의 '대중서적'이기에 '평론'과 비교하는건 좀 어불성설이다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읽어내는게' 짜증나는 사람도, 이 책을 두고 '어렵다'고는 말하지 못할 것이다. 넓은 줄간격과 작은 책사이즈도 한 몫 하긴 하지만 어쨌든 '대중'을 염두에 두고 쓴 책이다.
도스토예프스키. 이름에서부터 벌써 부담스러운 작가다. 이름-부칭-성의 긴 이름도 부족해 종종 애칭으로(게다가, 중요인물은 애칭도 몇개된다지!) 등장하는 러시아 소설의 부담감도 있고, 한 인물이 쏟아붓는, 장장 몇페이지에 달하는 개똥철학을 듣고 있자면 소설을 읽는건지 독해력 테스트인지 분간이 안간다. 아기자기하고 샤방샤방한 소설속 판타지는 딴데가서 알아보라지. 소설속 인물들은 하나같이 비루하고 치졸하며 저마다의 '광기'를 품고있다. 인물마다 '고결함'이나 '고상함'을 지껄여대지만 독자가 맞닥뜨리는건 '너무나 인간적인' 비열함이다. 그런데 이토록 너덜너덜한 인간들이 내뱉는 말들이 심상치 않다. 한번 빠져들기 시작하면 왠간한 사회과학서적 저리가라다. 게다가 기본 수백페이지씩 되는 분량은 어떻고! 읽어본 사람들은 한번 빠져보라며 칭송하지만 선뜻 손이가지 않는다는건 사실이다. 손이 가더라도 얼마나 빠져들게 될지는 미지수고. (나는 대학 1학년때 어떤 의무감으로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를 읽었다만 솔직히 별다른 감흥이 없었다. 이번에 다시 읽으면서, 분명 한번 읽었었다는건 기억나는데 도무지 그때의 기분이 감흥이 생각나지 않아 수십번 나의 빈곤한 머리를 탓했다.) But, 이런 악조건에도 불구하고 한번 맛들인 사람은 결코 헤어나올수 없다는 건 확실하다. 중독성도 이런 중독성이 없다. 소설을 온전히 이해했든 아니든 도무지 놓을수가 없다. 두껍고 빽빽한 책 제본의 불편한쯤은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 그의 주옥같은 장편들이, 왜 몇개일 뿐인지 한탄스러울 정도다.
제목부터 '돈'을 말할만큼 통속적인 책이다. 아니, 도스토예프스키 작품 자체가 '돈'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을정도로 통속적이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반짝 팔렸다 이내 잊혀지는 진정 '통속적'인 작품들과 다른 이유는 인간의 심리를 들여다보는듯한 처절하고 소름끼치는 묘사에 있을 게다. 꼬질꼬질한 인간들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알고보면 심오한 발언들도 그렇고. 어쨌든 어느 작품이나 '돈'이 풍기는 끈덕진 유혹이 빠지는 법이 없다. 도스토예프스키 전기들은 하나같이 그의 방탕한 소비와 도벽, 그리고 몇푼의 돈이 궁해 할수있는 한 손을 벌리는 궁색함을 다룬다. 풍족한 삶 속에서 고즈넉히 소설을 다듬어낸 톨스토이와 비교하기도 한다. 실제, 평생을 '선불인생'으로 살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어느순간엔 유복한 톨스토이를 부러워하기도 했댄다. (나는 톨스토이 장편은 읽어본적이 없다만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이 '구질구질함'으로 가득차 있다는것은 알겠다.) "도스토예프스키가 좀 더 유복한 삶을 살았다면...."이란 가정은, 마치 "지난 대선에서 이명박 말고 다른이가 당선되었다면..."하는 바람처럼 부질없지만, (가지 않은 길에 대해선 늘 할말이 많은 법이다. 은연중 미화는 물론이고) 책의 저자는 "잘 다듬어진 다이아몬드 반지와 다이아몬드 광산"이라는 비유를 들었다. 뭐 어쨌든 도스토예프스키는 천재라는 소리다.
이 책에선 5대 장편 - 죄와 벌, 백치, 악령, 미성년, 까라마조프 - 과 처녀작 '가난한 사람들', 그리고 작가의 실제 생활의 반영이자 천생연분 '안나'와의 인연을 맺어준 '도박꾼'에 드러난 '인물과 돈, 그리고 작가'를 다룬다. 챕터마다 간략한 줄거리와 몇몇 구절들을 인용해놓지만, 어쨌든 '읽어 본'독자를 위한 책이다. 아니, 읽어본 사람이 아니면 작품속에서의 '돈'의 역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 힘들다. (나는 '미성년'과 '도박꾼'을 제외한 5개를 읽었다. '미성년'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에서 가장 질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고 하고, 이 책의 저자마저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으로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다고 하지만 이 책을 읽고나니 어쩐지 읽어보고 싶다. 나같은 초짜에게 '문학성'이 무슨 대수랴! 나는 단지 그의 글이 궁금할 뿐인걸! 집필에 한달도 안걸린 '휘몰아쳐서 쏟아내기'의 절정판 '도박꾼'역시 매력적이다) 문학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이렇게 말할 정도니, 그만큼 '돈'이라는 문제가 중요하든지, 아님 도스토예프스키와 돈을 엮은 저자의 능력이 뛰어나든지, 그것도 아니면 도스토예프스키와 돈의 관계는 정말 초특급 인연이든지!
인물을 미화하긴 쉽다. 특히 이미 세상에 없는 사람이라면. 아무 생각없이 뱉은 한두마디도 두고두고 곱씹는 자에겐 늘 심오한 진리가 있는 법이니. 그런데 우리 도 아저씨의 궁색한 생활에 대해선 전기작가들도 마냥 신비화하거나 미화하기엔 역량이 모자랐던 모양이다. 그의 병적인 소비벽에서 "모든것을 잃고자 하는 마조히즘"을 읽어낸 정신분석가도 있었으니. 확실히 대책없이 ㅡ 마치 순간이 끝인마냥 모든것을 걸고 잃어버리는 도박습관이나 별 의심없이 모든 빚쟁이들을 떠안는 그의 모습은 '고결'하다기 보단 어딘가 측은하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가치'가 모든것은 아닌법. 아무리 헐벗고 살았을지언정 그와 보낸 날들이 가장 행복했다는 부인(안나)의 회상이나, 또 그가 묘사한 가난하고 억눌린 사람들의 심리를 보며 무릎을 치는 독자들은 끊이지 않으니. 평생 돈문제에 시달린 '불행한 작가'임에는 분명하나 한세기 이상 '매니아'들을 거느리고 있는, '풍부한 영감'의 소유자였으니..
사실 나같은 일반독자에게는, 수백페이지에 달하는 장편들을 한장 한장 정성들여 읽는것 자체가 무리한 요구다. 별로 와닿지 않는 부분은 읽는둥 마는둥 넘어가기도 하고, 또 끈덕지게 달라붙는 부분은 정성들여 밑줄까지 치며 읽기도 하는게 '평균적 독서'다. 소설 분량이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인물들 하나하나가 개성적인지라 소설이 남긴 인상은 저마다 다를수밖에 없다. 이 책을 읽다보니 이미 읽은 소설도 '돈'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는 충동이 든다. 까라마조프에서 3000루블이 191번이 나왔다 한들, 3000루블인지 1500루블인지 별 신경 안쓰고 읽었던 독자에겐 별 의미 없을터. 저자가 제시한 관점에 따라 읽으면 또 다른 독해가 가능할 듯 싶다. '돈'이라는 통속적이고, 보편적이면서 지독히도 매력적인 기준으로, 기존의 독자들에게 '새로 읽음'을 유혹하는 책이다. 아! 어디까지나 도 아저씨의 광기어린, 그러나 사랑할 수 밖에 없는 매력에 빠진 독자들에 한해..
'지하생활자의 수기'에 자세히 등장하는 "2X2=4"라는 공식(?)은 합리적 이성을 조롱하는 일종의 상징처럼 작품마다 줄기차게 등장한다. 인간 도스토예프스키는 수학 과목에 낙제할정도고 수학이나 경제학에 대해서는 젬병이었지만, '경제적 이해관계' 혹은 '이념'에 대한 심오한 주절거림(?)이 빠지지 않는다. (특히 얼치기 사회주의자들에 대한 신랄한 조롱이 많다. 재수없게 얽혀서 사형집행 직전까지 갔던 개인적 경험도 있겠고...) 당시는 '자본주의'가 아직 '제대로'실현되지는 않은 사회였지만 그는 '자본주의의 법칙', 다시 말해 돈의 법칙에 관해서는 이론 나부랭이는 집어치우고 그 누구보다도 절실하고 실감나게 그려낸 작가다. 그때나 지금이나 '돈'은 모두를 사로잡는 화두요 마력의 여신이요. 누군가에겐 천국의 열쇠이기도 하다. 지금, 아무것도 기대할 것 없는 이들이 마지막 보루로 로또에 매달리듯 당시에는 도박에 매달렸다보다. 모든것을 걸고 (정말, 마지막 남은 생활비까지 박박 긁어서 걸었댄다) 그 승패의 짜릿함을 즐길줄 알았던 도스토예프스키는 한때 '도박에서 승리하는 법'에 대한 이치를 깨달았다고 자부하기도 했지만, 여느 평범한 도박꾼 스토리처럼 중간의 화려한 여정이 어떻은 도박의 결말은 땡전한푼 남지 않은 철저한 파산이었다. 스스로의 분석이나 안나의 말을 빌리면 애초에 '판돈'이 부족한 탓이었으니...그때나 지금이나 대다수는 '판돈'이 부족할 뿐이고, 하여 삶의 질을 담보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설명이 길어졌다. 한마디로 평하자면, 도스토예프스키 소설을 읽는것보다 10배는 쉽게 읽히는 책이다. 그것만으로도 이 책은 제 할일을 다 했다고 생각한다. 도 아저씨에 대한 부담을 줄일 수 있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이 참에 모두들 지극히 인간적인 도스토예프스키의 매력에 빠져보시길...
* '석영중'이라는 이름탓인지, 저자가 나이 지긋한 중년남성일것이라 생각했는데, 왠걸. 당찬 여교수였다. 도스토예프스키 작품이 어딘가 남성적이라 생각해서였나. 암튼 로쟈님 서재덕에 귀한정보 많이 얻었다. 찾으려고만 나선다면 알라딘서재는 보물단지다. 제가 신문은 꼬박꼬박 안봐도 알라딘 서재는 거의 매일 찾는다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