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덕교육의 파시즘 - 노예도덕을 넘어서 프런티어21 1
김상봉 지음 / 길(도서출판) / 2005년 10월
평점 :
품절


그리 멀지 않은 학창시절. 교과서들은 대부분 재미없고 딱딱하지만 특히 도덕교과서는 유난히 지루하고 따분했었다. 뻔한 얘기들. 유치한 사례. 시험때도 도덕 문제의 절반은 '평범한 상식을 가진 학생'이라면 누구나 맞출 수 있는 뻔한 문제였고 나머지는 특정 용어의 암기였던 것 같다. 친구들과 '도덕선생님은 하나도 안 도덕적이야"라며 킬킬거리기도 하고. 요즘 시험 기간에 가르치는 학생들에게 시험 전 정리를 해주다가 가끔 다음날 수학과 같이 보는 과목을 물어보곤 하는데 그 과목이 '도덕'인 경우에 대부분의 아이들은 "외울게 너무 많아요~"울상이다. '기술가정'처럼 도덕도 하나의 암기과목인 셈이다.

흔히 고지식하고 원리원칙적인 사람을 보면 '도덕 교과서에 나오는 사람같다'라고 말하곤 한다. 우리가 배우는 도덕교과서는 그런 '답답한' 사람을 양성하기 위한 것일까. 두꺼운 교과서엔 너무 뻔하거나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이야기가 가득하다. 하지만 차라리 그 얘기들이 너무 당연한 진리여서 배울 필요가 없는 것이었으면 나을걸. 우리가 '당연하다고 배워왔던 것들이' 불순한 의도성 아래 치밀하게 짜맞춰진 특정 논리라면. 그걸 '너무도 당연하게' 여기고 살아왔는데, 사실은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 간극은 어떻게 메워야 하나.

道와 德은 한자문화권에서 두루 쓰이는, 유교적 색채가 짙은 단어다. 세상을 아우르는 큰 진리 혹은 바람직한 인간상의 기준으로 생각하면 무난하지만 실제론 시대마다 또 사상가들마다 '도'와 '덕'에 담는 의미는 다르다. 예를들어 노자의 '도덕경'은 공자 혹은 맹자가 화두로 삼은 '도'와 '덕'과는 성격이 확연히 다르고, 후자 역시 후대로 내려오며 시대마다 조금씩 다른 색채를 띤다. 어떤 보편적 진리가 존재한다고 해도 시대에 따라서 늘 똑같이 적용되는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가 배우는 '도덕'교과서는 적어도 현 시대에는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보편적 가치를 가르치는게 목표일텐데 그게 쉽지 않은 모양이다. 너무 추상적인 말만 반복하거나 혹은 '도덕'이라는 미명 아래 슬그머니 전혀 보편적이지 않은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거나

이 책에선 먼저 박정희/전두환 시대를 거쳐 '온순한 국민'을 양성한다는 목표에 걸맞게 '도덕 교과서'에 주입된 '파시즘'적 요소들을 쏙쏙 집어낸다.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보편적 가치와 행동의 예로 '새마을 운동'을 든다거나, 갈등은 무조건 없어야 좋다는 식의 논조, 불평등한 권력관계를 전제로 한 예절의 강조, 국가에 대한 맹목적 충성 등. 후반부로 갈수록 철학 얘기가 덧붙여져 나처럼 철학에 문외한인 사람에겐 점점 읽기가 힘들어지나 첫장만큼은 잘 읽힌다. 아마 후반부에 비해 구체적인 예로 설명하기에 더 잘 와닿는지도. - 여담이지만, 논술 준비하는 수험생들에게 '일상적인 것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키워주는' 읽기 자료로 읽혀도 되겠다는 생각이 든다. - 나는 중고등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기에, 당연히 도덕시험도 늘 100점에 가까웠고 시험때면 밑줄을 그어가며 달달달 암기했던 '성실한(!) 학생이었는데 이 책을 읽다보니 슬그머니 화가 난다.  정말 도덕교과서에서 주장하는 것들은 '진리'인줄만 알았었는데. "이건 순 교과서가 학생들에게 사기치는 거잖아!"

후반부로 가면서 지금의 피상적이고 왜곡된 도덕교육이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한다. '도덕'이 올바른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목적이라면 스스로 '선'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실제 생활에서 일어나는 도덕적 딜레마들을 두고 '뻔한 도덕적 해답'말고 자신만의 '해답'을 생각해보도록, 궁극적으로는 철학 교육이 되어야 한다는. 솔직히 말하면 후반부로 가면서는 책을 '이해'했다기 보다는 저자의 주장에 따라가기도 버거웠다. '철학적' 쟁점을 이해 혹은 비판하려면 나 스스로가 그만한 식견을 갖춰야 하는데, 하다못해 도덕 교육의 딜레마에 대해 고민이라도 해봤어야 할 터인데, 언제 한번 교과서가 왜곡되었을거라 - '민족의식'이 강한 국사교과서도 아니고 하물며 도덕교과서가! - 고민해 봤어야 말이지. 그저 저자가 던진 화두를 놓고 짧은 머리로나마 생각해 보는 것 밖에.

기억나는 에피소드 하나. 나는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때, 그것이 수학이든 과학이든 사회든 최대한 주변적인 설명을 덧붙여 '이해'시키려고 애쓰는 편이다. 5지 선다형인 경우 답이 안되는 것은 왜 맞는지/틀린지 하나하나 말해보라고 하기도 하고. 얼마 전 중1 사회를 가르치다 마주친 대목. "플랜테이션은 유럽인의 자본과 원주민들의 노동력, 열대 기후를 이용해서 대규모의 열대 과일을 재배하는 것. 원주민들의 생활 수준향상에 기여함"이라나. 휴. 답답한 마음에 한 20여분간 유럽인들의 '착취'에 대해 설명했지만 중 1 아이들이 과연 얼마나 이해할 수 있었을까.

에피소드 둘. 서남 아시아와 동아시아의 종교적 분쟁에 대해 설명하는데 한 아이가 묻는다 "근데 왜 종교 때문에 싸워요?" 할말이 없다. 십자군전쟁은 중 2나 되야 배울텐데. 어디까지 설명해줘야 할지. - 어찌 보면 인간 본성에 대한 '성선설'적 입장보단 '성악설'적 입장에서 도덕 교육을 시작하는게 더 효과적일지도 모르겠다. 인간본성은 많은 부분이 도덕적이지 않으니 모두 행복하게 살기위해 의식적으로 도덕적으로 살기위해 애써야 한다는. - 이것저것 횡설수설 설명하다 다시 아이에게 되묻는다. "아프간 샘물교회 피랍자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니?" 물론 아이들의 대답은 예상대로다. '불쌍하다', '무고한 사람들을 가둬놓으니 나쁜 사람들이다' 등등. 그래서 거친 비유를 한마디 던진다. "샘물교회 사람들이 선교하고자 아프간에 간 행동은, 일종의 '성전'을 수행하고 있는 그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일제시대 일본 사람들이 한국에 와서 한국 사람들에게 우리 같이 일본 천황을 모시자고 으리으리한 신사를 지어놓고 참배하는 행동과 비슷한거다." 순간 아이들의 표정에 어이없음이 묻어난다.

에피소드 셋. 휴가나온 친구와 이런저런 얘기 하다가 사뭇 정치적인 얘기까지 나왔다. 그 친구놈은 뭐랄까. 스스로 '정의로운' 사람이라 여기는 아이다. 내가 묻는다 "근데 요즘 길거리에 노숙자들이 부쩍 는 것 같아. 그 사람들 다 사연이 있을텐데. 사회에서 뭔가 해줘야 하는거 아닌가?" 친구 왈  "그런 사람들 대부분이 일 할 능력이 있는데도 안하는 사람들이야. 서울역 가면 멀쩡하게 생긴 아저씨들이 접근해선 '어이 거기 군인, 나 라면사먹게 500원만 줘봐' 이런다니까. 그런 사람들까지 일일이 먹여살려줘야 되냐?" 흠 정말 주변에서 '일하지 않으면서 남의 도움을 받아 살려는' 사람들이 있다는 건 많이 들었다. 하지만, "일하지 않는 사람"은 도와줄 가치가 없는 건가. "열심히 일하는 것이 미덕"인 것은 분명 청교도적 색채가 강한 말인데. 언제부터 그게 '진실'이 되어버린 걸까. 같은 시공간에 존재하는 타인에게 어떤 '책임감'을 가지면 큰일이라도 나는건지.

저자의 말대로 "스스로 생각하고 너와 더불어 주체로서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도덕교육이 이루어 지기엔 현실이 너무 갑갑하다. 답이 정해진 시험으로 어떻게 '생각'을 키워낸단 말인가. 이 책은 도덕교육에서 시작하지만 사실은 교육 전반에 대한 쓴소리다. 소위 '죽음의 트라이앵글'이라는 입시체제에 허덕이는 고3 아이들과, 좋은 대학을 위해 중3때부터 고등학교 수1, 수2를 공부하는 아이들을 보면 무섭기도 하고 안타깝기도 하다. 저자가 바라는 교육은 아직 먼 이상향처럼 보이지만 그래도 어쩌랴. 조금씩 조금씩 바뀌어 '우공이산' 되길 바라는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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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8-20 2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 뒤로 갈수록 힘들었을텐데 수고했네. 그만큼 생각하는게 많았던 책이었길. 이러니까 꼭 내가 사준거 같다. -_-

멜기세덱 2007-08-20 23:26   좋아요 0 | URL
나도 이 책 읽고 싶어요....ㅎㅎㅎㅎ 이러니까 꼭 사 달라는 거 같다.-_-
근데, 두 분이 언제부터 다정한 오누이처럼 말 트기로 하셨어요? ㅎㅎㅎ 부럽게시리....ㅋㅋㅋ

Jade 2007-08-20 23:37   좋아요 0 | URL
글쎄요. 전 말 트기로 한 적 없는것 같은데...ㅎㅎ 그럼 저도 반말해도 되는건가요? ㅋㅋㅋ

dalpan 2007-08-21 00:58   좋아요 0 | URL
"악법도 법이다"를 말그대로 해석케했던 우리의 도덕교육이 공자왈 맹자왈에 지배이데올로기이 슬쩍 덧붙이기에 얼마나 능수능란했던가요? 다 배운사람들이 그리 만든거란 생각에 더 난감해지죠. 추천들어갑니다.

건그렇고...뭐야 이거? 다 트는거야? 그런거야?

마늘빵 2007-08-21 08:13   좋아요 0 | URL
그게 말하다보니 반말이 됐다는... -_-;; 음. 제이드님 다시 존대모드로?

Jade 2007-08-21 08:17   좋아요 0 | URL
ㅋㅋ 왜요? 전 반말하고 싶었는데..ㅋㅋㅋㅋㅋ

Jade 2007-08-2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정치나 사회 교과서 등에서 "악법도 법이다"는 주로 '법'은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을 속박하기 위한 구실에 많이 붙어있던 기억이 나요... 수능 끝난 후 논술 준비 하면서 이런저런 관점들 접하면서 어찌나 어지럽던지...생각있는 선생님들도 학교에서 왜곡된 가치들에 대해 일일이 설명해주거나 아이들 개개인의 생각을 키워주긴 어려울 거 같고, 결국 어렸을 때 부터 이런저런 책을 많이 읽거나 가정에서 잡아줘야 할 텐데요. 영어/수학 공부에 치여 사는 요즘 같은 때에 어려운 말이겠죠..

ㅋㅋ 아프님의 말 한마디에 "야자타임" 시작되는 분위기...ㅎㅎ

웽스북스 2007-08-21 1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완전 공감합니다 제이드님, 관심이 가는 책이네요 ^^ 다음 번 구매할 때 참고해야겠어요 감사합니다 ^^ (땡스투 기능이 이래서 생겼나봐요 ㅋㅋ)

Jade 2007-08-21 16:16   좋아요 0 | URL
ㅎㅎ 좀 어려워서 저도 뒷부분은 이해 잘 못했지만, 읽어보라고 권해드리고는 싶어요 ^^

누에 2007-08-21 19: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학교에 워낙 맺힌게 많아 추천! ^^ 특히 '악법도 법이다' 정말 뜨악! ㅠ.ㅠ


Jade 2007-08-22 00:02   좋아요 0 | URL
ㅎㅎ dalpan님은 정말 꼭꼭 찝어서 잘 말씀하신다니까요~ ㅎㅎ 추천 감사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