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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의 눈물 ㅣ 샘깊은 오늘고전 12
나만갑 지음, 양대원 그림, 유타루 글 / 알마 / 2010년 1월
평점 :
나라가 수치를 당한 국치일하면 보통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1910년을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 역사에는 나라의 통치권을 빼앗긴 수치 말고도 치욕적인 역사가 하나 더 있다. 바로 '삼전도의 치욕'이다. 삼전도의 치욕은 병자호란 패전의 결과이다. 삼전도의 치욕은, 청나라의 침입에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던 인조가 삼전도(지금의 송파구)에서 행한 항복의식으로 청 태종 앞에서 3번 절하고 9번 머리를 조아리는 이른바 삼배구고두례를 행한 것이다. 인조는 물론 인조의 장남 소현세자와 50여 명의 사람들은 피눈물을 흘리며 이를 지켜보았다. 인조 15년(1637년) 1월 30일은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씻을 수 없는 굴욕적인 국치일이며 인조 자신에게도 치욕적인 날로 남았다. 역대 임금 그 누구도 다른 나라의 임금 앞에서 맨땅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항복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기 때문이며, 그 어떤 임금도 왕자의 대우를 받는 의전상 치욕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삼전도의 치욕은 병자호란 패전의 결과였으나 사실 그 뿌리는 인조반정에 있다. 광해군의 등거리외교와 폐모론에 대한 반대를 명분삼아 인조반정을 일으킨 반정 정권이 급격하게 반청 정책을 펼쳤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명, 청 중립 외교는 국가나 백성들 입장에서 볼 때 탁월한 정책이었다. 그러나 반정 정권은 청을 천자국으로 받드는 것은 반정 명분 자체를 부인하는 자기모순이었기 때문에 '명나라를 향한 큰 의리'에 목소리를 높였다. 이런 목청뿐인 허세에 심기가 불편해진 청의 대답은 병자호란이었고, 그 결과는 삼전도의 치욕이었다.
[남한산성의 눈물] 1636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으로 피신한 인조를 수행해 함께 피신한 공조 참의 나만갑이 남한산성에 쓴 전쟁 일기이다. 이 책은 나만갑이 남한산성에서 직접 보고 듣고 겪은 일들을 낱낱이 기록한 [병자록]을 현대적인 언어로 리라이팅 한 책이다. 나만갑은 남한산성에서 임금을 수행하는 업무와 식량 통제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조정 대신들의 행태와 백성과 병사들의 움직임도 함께 지켜볼 수 있었고 이를 생생한 기록으로 남겼다. 370여 년 전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 안팎에서 벌어졌던 일들, 즉 병자호란 발발 원인, 친명반청 정책을 주장하며 망해가는 명나라와의 신의를 중요하게 여긴 척화파와 청과의 전쟁을 피하자는 주화파의 대립, 임금과 대신들이 우왕좌왕하는 모습, 추위와 굶주림에 시달리는 병사, 전투를 치르며 겪은 불안과 공포, 남한산성 안팎의 위험하고 긴박했던 순간, 강화도 함락과 삼전도의 치욕, 60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담한 상황, 강화도 함락 과정 등이 모두 담겨 있다.
어린이와 청소년을 상대로 한 [남한산성의 눈물]은 쉬운 말로 다듬어서 이해하기 쉽게 병자호란을 이야기한다. 청소년이나 어린이들이 이 책을 읽으며 무슨 생각을 할까 잠시 생각해 보았다. 아마 인조가 삼전도의 치욕을 치른 것보다 조정 대신들의 추태를 더 부끄럽게 여기지 않을까 싶다. 국제 정세를 까맣게 모르고 오직 당리당약과 명분을 앞세우는 한심한 국정자들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어보인다. 370여 전이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하지 않은 위정자들의 모습은 청소년 세대가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를 앗아가고 있는 것이다. 역사의 교훈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는 것이 역사를 배우는 이유일진대 과거나 지금이나 똑같은 행태를 일삼는 위정자들에게서 청소년들이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깨닫겠는가.
허위로 보고를 하고, 추위와 굶주림으로 병사들을 죽게 하고, 오판으로 병사들을 떼죽음 당하게 하는 장면은 문신정권의 허점을 여실히 보여준다. 벼슬아치들이 군대를 거느리는 나라는 아마 조선밖에 없을 것이다. 읽는 동안 가슴이 여러번 답답하고 안타까웠다. 강화도를 지키고 빈궁과 왕실 가족을 지켜야 하는 강화도 검찰사가 전쟁의 긴박한 상황에서도 술판을 벌이며 재산을 축적하기에 혈안이니 분통이 터진다. 강화도는 유사시 최후의 보루인 곳으로 천혜의 요새였으나 김경징의 안일한 수비와 업무 방임으로 함락당한 것이다. 적이 온다는 부하의 보고를 군대를 어지럽힌다며 목을 베려하고 급박한 상황에서도 무기와 화약을 아낀다고 조금씩 나누어 주는 것을 보면 답답하기 짝이 없다. 그런 와중에 몸에 여러 대의 화살을 맞으면서도 적의 활과 화살, 그밖의 무기를 수없이 빼앗으며 적의 배 여러 대를 침몰시킨 충청도 수군절도사 강진흔이 있었다는 게 자랑스럽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후 죽을힘을 다해 싸운 강진흔은 김경진, 장신과 함게 목이 베인다. 병자호란 패배의 '책임묻기'에 강진흔은 희생양이 되어야 했던 것이다.
병자호란이 주는 교훈은 국제 정세를 파악하는 능력과 현명한 판단, 국력 신장, 실리 외교, 국익과 장면으로 배치되는 당리를 추구할 때 불러오는 재앙, 전쟁 불감증을 들 수 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병자호란이 굴복적인 항복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병자호란이 남긴 후유증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의 볼모, 군사력을 가질 수 없는 조선, 청에 바치는 조공과 백성들의 엄청난 부담, 이런 것들은 오래도록 조선을 괴롭혓다. 적어도 우리 세대는 이런 부끄러운 역사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지 말아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