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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세자의 입학식 - 조선의 국왕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ㅣ 키워드 한국문화 4
김문식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평점 :
해마다 이맘 때면 공중파 텔레비전에서는 유명 인사의 자제나 인기 연예인들의 입학식과 졸업식 장면을 내보낸다. 세계 각국의 새로운 화젯거리가 실시간으로 안방까지 배달되고 다양한 볼거리가 넘쳐나는 21세기에도 유명인들의 입학식과 졸업식 장면은 흥미를 자극한다. 지금으로부터 600여년 전, 가까이는 300여년 전 조선시대 백성들의 흥미를 자극하는 볼거리는 무엇이었을까? 별다른 볼거리가 없었던 조선시대의 백성들에게 국왕의 행차는 대단한 구경거리였다. 정조의 능행 때면 백성들이 구름같이 몰려나와 행차를 구경하고 자신들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조선시대 국왕의 행차와 더불어 또 하나의 구경거리는 왕세자의 입학식이었다.
왕세자의 입학식은 매우 성대하게 거행되었다고 한다. 왕세자의 행차를 보기 위해 수천 명의 백성들이 길가로 몰려나와 평생에 한 번 보기도 어려운 행사를 구경했는데, 실록은 구경꾼들이 모두 목을 길게 늘이고 손을 모아 송축했다고 전한다. 실록의 기록은 왕세자의 입학식이 궁궐에서 거행되지 않았다는 것을 암시해준다. 그렇다면 왕세자의 입학식은 어디에서 거행되었을까?
문학동네에서 출간한 [왕세자의 입학식]은 왕세자 입학식의 절차와 그날의 풍경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세밀히 소개한다. 조선시대 국왕 교육 시스템을 연구한 김문식 교수님이 왕이 되기 위한 통과의례였던 왕세자의 입학식 절차와 의미를 꼼꼼하게 짚어주며 국왕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를 알려준다. 장차 나라를 다스리게 될 국왕의 후계자인 왕세자는 훌륭한 국왕이 되기 위해 수많은 통과의례를 거쳐야 했다. 입학식도 그 중 하나인 것이다. 그런데 다른 행사는 모두 궁궐에서 거행하지만 입학식만큼은 궁궐밖 성균관에서 거행했다고 한다. 궁궐에서 편하게 자라던 왕세자가 왜 궁궐이 아닌 성균관에 가서 입학식을 거행했는지 궁금하다. 왕세자의 입학식에 국왕도 참석했을까? 몇 살에 입학하고, 몇 월에 입학해서, 무엇을 배웠을까? '머리말'을 읽으면서 왕세자의 입학식에 관한 여러 가지 궁금증이 일시에 증폭되었다.
책은 내 궁금증을 알아차린 듯 입학식의 유례부터 절차, 식후행사까지 다양하게 다루고 있다. 입학식 절차는 대략 이렇다. 궁궐을 나와 성균관에 도착한 왕세자가 학생복으로 갈아입은 뒤 공자를 비롯한 성현들에게 술잔을 올리고 그날의 스승인 박사에게 절을 하고 예물을 드리는 의식을 치른 뒤 수업을 받는다. 입학례를 마친 입학자가 궁궐로 돌아와서는 문무 관원이나 종친들의 축하를 받는 순으로 진행된다.
입학식 절차는 성인이 소화하기에도 매우 복잡하고 빡빡한 일정으로 보인다. 그런데 이렇게 복잡한 의식을 8세의 어린 왕세자들이 거행했다고 하니 안쓰러운 마음이 든다. 여덟 살의 나이로 복잡한 의식을 치른 문종과 단종, 예종을 생각하니 마음이 짠하다. 아버지 세종의 병간호로 병약했던 문종과 어린 나이에 숙부에 의해 왕위를 빼앗기고 억울하게 죽임을 당한 단종이 유독 마음에 걸린다. 성종은 이를 간파하고 연산군이 10세가 되었는데도 입학식 일자를 계속 미루다가 12세가 되던 해에 입학식을 거행했다. 인조와 현종도 관례로 정한 8세 입학식을 거행하지 않고 미루었다. 복잡한 입학의식을 제대로 거행하기에 8세의 나이는 너무 어리다는 판단에서다. 아들을 생각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느껴지는 대목이다. 당시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10세를 전후하여 입학식을 거행했는데, 혹시 주희의 '8세 입학설'과 오늘날 초등학교 8세 입학이 관련있는지 저자이신 김문식 교수님게 여쭙고 싶다.
입학식 절차를 따라가다 보면 흥미로운 이야기를 곳곳에서 만난다. 우선 성균관에 도착한 왕세자가 학생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점이 눈길을 끈다. 왕세자의 학생복이 오늘날 학생들이 입는 교복의 원조가 아닐까 싶다. 왕세자가 입었던 학생복을 볼 수 없어서 조금 아쉽다. 또 하나의 흥미로운 사실은 입학식 날 스승인 박사에게 수업을 받는 학생이 왕세자뿐이라는 점과 수업을 받을 때 왕세자는 책상을 사용하지 못하고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는 점이다. 스승은 책상 위에 책을 펴놓고 강의를 하는데 왕세자는 무릎을 꿇고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었다는 것이 놀랍다. 아무리 왕위를 계승할 후계자라 할지라도 성균관에서는 스승에게 깍듯이 예절을 지키며 유학을 배우는 학생에 불과했던 것이다. 일반 백성들도 집에서 책상을 사용하는데 왕세자가 바닥에 꿇어 엎드려 책을 읽었다니 너무하지 않았나 싶다.
이를 두고 인조와 효종은 왕세자가 사용할 책상을 만들라고 명령하지만 예조는 관례를 들어 강력하게 반대했다. 왕세자가 바닥에 엎드려 공부하는 것이 예법에 맞다는 것이 신하들의 주장이다. 조선은 유교적 이상국가를 지향했다. 유교(儒敎)는 중국을 대표하는 공자의 사상으로 수 천 년 동안 중국, 한국, 일본을 지배해온 동양사상이다. 유교는 인(仁)을 모든 도덕을 일관하는 최고의 이념으로 삼으며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 왕에 의한 법치보다는 인치를 주장하는 것이 유교의 이념이고, 왕세자 입학식의 기원은 유교 경전의 하나인 [예기]에 두고 있다. [예기]에 보면 '한 가지 일을 실천하여 세 가지 선을 이루는 것'이란 구절이 나온다. "세 가지 선이란 부자의 윤리, 군신의 윤리, 장유의 윤리를 말하는데, 왕세자는 입학식이라는 의식을 통해 이러한 윤리를 실천하게 된다. 그러면 이를 지켜보던 백성들은 왕세자의 행동을 모범으로 삼아 자신들도 오륜으로 표현되는 윤리를 실천하도록 자극을 받게 된다는 것이다."(108쪽) 왕세자의 입학식은 중국에서 시작되었지만 양나라와 당나라를 제외하고 더 이상 시행되지 않았다고 한다. 조선이 태종부터 고종까지 꾸준히 계승한 것은 "학문과 예의를 중시했던 조선 왕실의 특징이 잘 나타나는 의식"(33쪽)이라고 설명한다.
조선시대 왕세자의 입학식 풍경을 엿보면서 성균관은 어명의 사각지대라는 느낌을 받았다. 성균관 안에서는 왕세자나 왕세손이란 지위도 특권도 용납되지 않았다. 오직 학생으로서의 대우만 존재했다. 왕세자는 격이 낮은 서쪽 계단을 이용하고, 스승에게 먼저 절을 올리고, 바닥에 엎드려 책을 읽고, 왕세자의 수행원들을 성균관 건물 안에 한발작도 들여놓지 못하게 하고, 이의 부당함을 말한 명종과 영조의 명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사실이 이를 말해준다.
또 하나 떨치기 어려웠던 생각은, 유교 사상을 내세워 왕세자에 대한 예우에 소홀하지 않았나 하는 것이다. 스승을 우위에 두고 스승을 우대하는 것은 마땅하다고 할만하나, 절대군주를 사전에 차단하려는 물밑작업이 아닌가 싶다.(비약적인, 혹은 무지한 해석일 수도 있어 상당히 조심스럽지만) 장차 왕이 될 왕세자를 학생으로만 대우한 것은 사대부들의 목소리에 힘을 실어주어 나라보다는 당파에 목숨을 거는 당파 정치를 양산했다고 보여진다. 519년 조선 역사가 당파 싸움으로 얼룩지고 왕들이 소신껏 정치를 펼치지 못한 데에는 왕세자의 입학식 제도가 일정 부분 기여하지 않았나 조심스레 추측해본다. 중국에서조차 사라진 입학식 제도를 조선의 현실에 맞게 정비하며 계승한다는 데 조선은 문화적 자부심을 느꼈다지만 오늘 내 눈에 아쉬운 점이 발견된다. 지나치게 스승을 우위에 둔 점이 그렇고 국왕의 어명이 번번히 가부당하는 게 그렇다. 그러나 왕세자의 입학식을 기념해 대대적인 사면이 내려지고 입학식을 축하하는 과거를 치르며 많은 백성에게 혜택을 준 것은 흐믓하고 기쁜일이다.
문학동네의 '키워드 한국문화' 시리즈는 우리 역사와 문화를 복원하는 작업이다. 이 시리즈는 몰랐던 우리 역사와 문화, 혹은 잘못 알려지고 가려진 우리 역사와 문화를 바로 알려주는 안내서라고 하겠다. 이 시리즈를 통해 잠자거나 잊혀진 우리 고유의 문화와 역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제 빛으로 비추어졌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