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ction! -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로버트 링거 지음, 최소영 옮김 / 한언출판사 / 200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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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하루에도 수십번의 선택을 하면서 살고 있다.

아침에 눈 떠서 샤워를 할까 머리만 감을까를 놓고,

점심에는 갈비탕과 된장찌개 사이에서, 잠들기 직전엔 양치질을 할까말까를 선택하는 것이 우리의 일상이다.

우리의 하루하루는 선택의 연속이다.

크든 작든 선택은 하루 종일 우리를 뒤따라 다니고 그 선택에 대한 결과는 우리의 몫이다.

사소한 일이든 중차대한 일이든 우리는 선택의 결과에 대한 대가를 치뤄야 한다.

잘못된 선택에서 오는 혹독한 대가를 치르지 않기 위해서는 선택을 잘 해야 하는데,

저자는 올바른 선택을 하려면 '자기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자기훈련이란, 자기의 행동을 절제하고 규제하며 충동적인 욕구를 누르고 이성적으로 행동하라는 것을 뜻한다.

이러한 자기훈련이 밑받침이 된 선택은 더 많은 성공의 기회를 제공해 준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대부분의 선택을 무의식적으로 하고 있다.

의식적인 별 노력 없이 충동적,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많은 경우의 선택이 '긴급'을 요하지 않는데도 말이다.

 

 

 

살면서 선택의 실수를 저지르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을까마는 그러한 시행착오를 거치면서 조금씩 신중해지는 것 아닐까.

문제는 실수를 용납하지 못하는 세상의  편협함이다.

현실은 결과만 보고 사람을 평한다.

그만큼 냉혹하고 살벌하다.

결과 속에 가려진 과정의 진실을 감안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과정은 알려고 하지 않을 뿐더러 중요하지도 않다.

결과만  중요하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다.

그래서 1등만 알아주고 1등만 인정해 주는 오늘의 현실에 이르렀는지도 모르겠다.

 

 

 

저자는 완벽한 때나 완벽한 계획 같은 것은 없다며

그런 걸 기다리다간 영영 행동하지 못하니 당장 시작하라고 재촉한다.

머뭇거리기 전에 먼저 행동하라고.

그러면 동기가 따라올 것이고  동기는 의지를 불러올 것이라고.

사이가 좋지 않은 부부관계나 연인관계는 일찌감치 헤어지는 게 낫다는 것이 그의 견해이다.

끝을 보기까지 관계를 유지하는 대가로 오랫동안 고통의 시간을 견디는 것을 그는 낭비로 생각한다.

돈이야 나중에 벌면 되지만, 고통스럽게 보낸 시간은 결코 다시 채울 수 없으며

시간은 무서울 정도로 정확하게 한정돼 있기 때문이라는 그의 설명이다.

행동하기에 완벽한 상황이 되기만을 기다리는 것은 실패에 대한 어리석은 변명에 지배당하고 것이라는 의견엔 나도 동의한다.

하지만 성공을 위해서 앞만 보고 질주하는 경주용 차라 되라는 식의 주장은 무리가 있어 보인다.

물론 행간의 의미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요시타세이이치는

작가의 인간적인 가치가 바로 작품의 가치로 드러나는 문학이 수필이라고 말한바 있다.

그러나 그것이 비단 수필에만 국한될까?

무서울 정도로 냉철하고 계산적이며 극도로 이성적인,인간적인 냄새를 맡기 어려운 그의 논리에 나는 혼란스러웠다.

일상의 자잘한 행복과 기쁨,

사람과 사람 사이의 끈끈함, 이런 것들도 살아가는데 성공 못지않게 중요한 것이다.

또한 내면의 성숙 없이 오직 성공만을 위해 달려간 이의 성공은 신기루와 다를바 없을 것이다.

그 성공을 담을만한 그릇이 준비되어 있지 않기에 그리 오래 갈 것 같지 않다.

성공 그 이전에 인격의' 성숙'이 선결되어야 하며, 사람 사이에서도 인간적인 관계 성립되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미국에서 대중 연설자로 왕성하게 활동하는 링거의 연설보다

진중하고 여유를 중요시했던 우리의 옛 선인들의 가르침이 더 깊은 울림을 준다는 것을 이 책을 읽으면서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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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
이희진 지음 / 소나무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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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이 우리 국민에게 끼친 영향력과 우리나라 역사에 미친 영향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알고 싶었다.

식민사학과 대한민국의 고대사는 무슨 연관이 있는지도 궁금했다.

그리고 어렴풋이 알고 있는 '식민사학'의 정의를 좀더 명확하게 알고 싶었다. 

사전을 뒤져봐도 식민사학에 대한 명쾌한 정의는 찾을 수 없었다.

이것은 내가 [식민사학과 한국고대사]를 만난 이유이다.

이러한 궁금증을 안고 이 책을 펼쳤다.

 

 

서문은 한마디로 충격이었다.

대학에 몸담고 있는 교수들이 자기네 집단의 이익을 위해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한다는 게,

더군다나 일제가 자기들 편하게 만들어 놓은 식민사관의 틀에 우리 역사를 담아서 가르친다는 사실은 믿기 어려웠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자들이 대한민국 고대 사학계를 장악하고 있다는 사실도 충격이었다.

지금은 일본의 식민지가 아닌데 무슨 이유로,

해방된 대한민국에서 왜 이러한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해방된지가 언제인데 아직까지 식민사학을 심는 사람들이 있다니.

그리고 그런 자들이 활개치고 다니게 왜 가만 놔두는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저자는 복잡하고 유서 깊은 그 이유에 관해 쉬운 언어로 다듬어서 독자를 이해시키고 있다.

그의 살아 있는 경험담과 예화는 설득력을 높여주며 공감대를 형성하는데 일조를 한다.

 

 

'식민사학'이란 역사를 통해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려는 의도로 만들어진 역사학을 일컫는다.

식민사학의 뿌리는 고대사와 직결되어 있고, 고대사는 각 시대사 가운데 사료가 적어 조작하기 쉽다고 한다.

일제가 만든 식민사학의 구조를 이해하려면 반드시 고대사를 살펴보아야 하는데,

대한민국의 고대사는 황국사관과 식민사관에 찌든 일본의 연구 성과를 그대로 베끼고 있다고 한다.

식민사학의 영향을 받은 학계의 원로들이 살아 남으려면,

자신들이 키운 제자들이 학계를 장악해야하고 굳건하게 자리매김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세력이 모인 집단이 한국 고대사 학계의 기득권층이다.

 

 

한국 고대사 학계에 몸담은 지 15년이 되어가는 저자는 한마디로 아웃사이더인 셈이다. 

그는 고대사 학계의 비리와 병폐를 누구보다 잘 하는 한국 고대사의 전문가다.

이 책은 젊은 학자가 학문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으로 포장된 원로와 선배, 동료들의 역사왜곡과 비리를 폭로하고 있다.

같은 길을 가는 사람이,

그것도 젊은 학자가 그 계통의 대표겪인 원로 학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공개하면서

그들을 실랄하게 비판, 고발하는 것은 위험천만한 행동이다.

교수라는 그의 직업까지도 위태롭게 만드는 모험일지도 모른다.

나는 이런 위험을 무릎쓰고  한국 고대사 학계의 식민사관과 모든 문제점을 고발한 저자에 대해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학계의 주류에 속하지 못하는 억울함 때문일까,

자신의 학풍을 잇지 못하는 울분일까,

식민사관에 물든 자들이 그의 앞길을 막기 때문에,

아니면 대한민국 고대사를 바로잡기 위해서일까?

 

 

그렇다.

대한민국 고대사를 바로잡아 다시 쓰기를 바라는 저자의 애타는 심정을 충분히 느꼈다.

어찌보면 달걀로 바위치기나 매한가지지만, 그 출발선에 이희진 교수가 서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는 그를 응원할 것이다.

그와 생각을 같이하는 많은 학자들이 그와 더불어 연구하고 새롭게 고대사 학계를 변화시키기를 바란다.

그에 주장에 따르면 아주 꿈같은 바램이지만, 어려울 뿐이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니라.

이 책을 읽는 중간중간 교수들의 이름이 그대로 공개되어 적잖이 놀랐으나, 일면 시원한 감도 없잖아 들었다.

이 책을 그들이 읽는다면 무슨 생각을 할지 생각하니 씁쓸한 웃음이 번졌다.

 

 

식민사관을 넘어서기 위한 책 임에는 분명하나

내가 기대했던 내용과 다르게 구성된 점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식민사학이 우리에게 준 영향과 잔재,앞으로의 과제와 대책 등을 다루었으면 공감대가 더 높아지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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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마흔에 생의 걸음마를 배웠다 - 신달자 에세이
신달자 지음 / 민음사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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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부란 무엇인가?

그리고

결혼 생활은 어때야 하는 것일까? 라는 물음을 남기는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뭔지 모르고 하고 나중에 알고 나서는 으악 하는 것이 결혼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말하려 하지 않는다고.

그것은 너무 무거운 은밀한 생의 깊은 비밀이고 상처이므로 자신의 결혼 생활에 대해 말하지 않는 것이라고.

그러나 누군가가 말을 꺼내면 모두 그래그래 하면서 정말 하지 못할 말들은 꼭꼭 숨긴 채 말해도 될 것들만 한다고.

아니, 말해도 될 것들을 하기보다 남들과 비슷한 것들만 골라서 말하게 되는 것이 결혼이라고 한다.

 

정말 결혼은 다들 비슷한가보다.

싸우다 어르고 달래고, 삐치고 미워하다 안쓰러워하고, 꼴도 보기 싫다가도 불쌍해지는 것이 정말 비슷하다.

 

이 책은 시인 신달자의 화려한 삶 뒤에 감추어진 처절한 고통을 솔직한 언어로 담아낸 책이다.
9년간 환자로 누워 계신 시어머니와 뇌졸중으로 쓰러진 남편을 24년간 병수발하며 얻은 깨달음을

시인 어머니가 소설가인 딸에게 말하는 형태로 쓰여진 에세이다.

 

 

내가 만난 시인은 후회 없는 삶의 전형이었다.

주관적이지만, 그녀의 남편은 필요악 같은 존재였다.

많은 부부들이 그렇듯 시인의 결혼 생활도  사랑해서 만나 서로를 증오하는 관계로 변해 있었다.

나무와 개를 좋아하는 남편은 시인을 모르고

모짜르트와 그림과 영화를 좋아하는 시인은 남편을 모른다고 생각했다.

서로 '후화하지?' 라는 물음을 담고 있으면서 내뱉지 않는 그런 부부 생활이었다.

마치 철길 위의 레일처럼 평행선을 그으며 좀처럼 간격을 좁힐 기미를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 관계가 엄청난 시련을 기점으로 사선으로 기울면서 맞점을 향해 나아가는데 그 과정이 눈물겹다.

온몸이 퍼렇게 멍이 들 정도로 매질을 당하면서도 환자를 불쌍해하고,

남편의 갖은 짜증을 다 받아주며 안쓰러워하고,

온갖 비위를 다 맞춰주면서 남편을 달랜다.

무려 24년간이나.

얼마나 지루했을까, 정말 지루할 만큼 지루했을 것이다.

처절할 정도로 자신을 낮추고 자기 몸을 부셔가면서

남편을 뒷바라지한 시인의 그 고집스럼움이 나는 답답했다.

 

자존심이 뭐길래. 자식이 뭐길래.

하지만 그녀도 사람인지라 소리 없는 총으로 남편의 심장을 수없이 겨누었단다.

증오심이 끓어서 남편의 마지막 시간이 언제인지 하나님께 질문하려다 입을 닫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니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했다.

설상가상으로 시어머니까지 9년간이나 환자로 누워 있는 상황에서도,

정신병원을 들락거리는 상황에서도.

아쉬움 없이, 한 점 후회 없이 남편에게 전심전력했다.

자기 자신에게도.

그녀는 고통의 한 가운데에서 돈을 빌려서 대학원에 진학하고

박사학위와 집필, 그리고 교수 생활까지 이 모든것을 수행해 냈다.

위대하다고, 장하다고 뜨거운 갈채를 보내고 싶다.

 

 

대부분의 부부들이 10년 이상 살고나면 그냥 그렇게, 덤덤하게 산다.

애틋함 없이 건조하게, 대화 없이 심심하게 산다.

이렇듯 무미건조한 자신의 결혼 생활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며 산다.

그래서 일탈을 꿈꾸기도 하고, 기웃거리기도 하고, 삐딱선을 타다가 마음을 다잡기도 하는 것 아닐까?

이것이 보통 사람들이 사는 모습일 것이다.

다람쥐 쳇바퀴 같은 일상에 들어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아니, 보더라도 행복의 조건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그러다가 불행한 일을 겪게 되면 그때 비로소 일상의 행복에 눈 뜨게 된다.

그리고 뒤늦게 후회하고 아쉬워하는게 우리네 모습이다.

그런데 이게 말처럼 쉽지 않다.

말처럼 쉬웠다면 이 세상은 지금 행복하다는 아우성으로 귀를 막아야할지도....

사람들이 남의 불행을 보며 자신의 행복을 체크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일상은 분명 감사한 일이다.

지극히 상식적인 삶을 사는 것도 행복한 일이다.

너무 눈부시지 않은 인생은 빛을 만들어 낼 가능성 있는 것이기에 소망찬 삶인 것이다.

혹시

재미 없는 배우자, 섭섭한 아내, 미운 남편과 살고 있는가?

그렇다면 그 배우자를 '원소'로 생각하자.

상대를 미워하고 섭섭해하고 싸우면서 나를 숨 쉬게 하고 생명을 유지시켜주는 원소로 말이다.

시인이 그랬던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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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 고흐, 영혼의 편지 (반양장) 반 고흐, 영혼의 편지 1
빈센트 반 고흐 지음, 신성림 옮김 / 예담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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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인 슈베르트와 쇼팽, 브람스, 

이들은 근본적으로 항상 외로운 사람들이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이들은 현실세계에서는 가능하지 않은 환상을 끊임없이 좇았기에 외로웠고,

너무 강렬한 주관과 범용으로 가득 찬 세상 사이의 갈등 때문에 고독했다고 한다.

대중들의 외면과 냉소의 산물로 그 반대급부로 영원히 기억되는 명작들을 남기긴 했지만,

그들은 외로운 사람들이었다.

 

동생 테오에게 보낸 고흐의 편지는 슈베르트와 쇼팽, 브람스 생각을 불러 왔다.

고흐는 19세기 낭만주의 작곡가들보다 더 외롭고 가난했으며,

그들처럼 당대 사람들에게 외면 받았다.

화랑 위주의 화풍에서 벗어난 그의 그림은 당대에는 인정을 받지 못했다.

그는 이런 저런 유파에 속하지 않고 인간의 감정을 진정으로 표현하는 그림을 남기는 것을 목표로 하며

자기만의 화풍을 만들어냈다.

"내가 표현하고 싶은 것은 뿌리 깊은 고뇌다. 사람들이 이 화가는 깊이 고뇌하고 있다.

정말 격렬하게 고뇌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의 경지에 있고 싶다."던 그는 정말 고뇌하며 그림을 그렸다.

그림그리는 것외에는 아무 것도 하지 않을 만큼 그림에 대한 열정을 멈추지 않았고,

색에 대한 탐구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인생 후반에 미치지 않고서는 그 열정을 감당하기 어려웠을 정도로 고뇌와 고민과 노력을 기울였다.

당대에 대중들에게 쉽게 사랑 받았던 소위 '외롭지 않고 가난하지 않았던' 화가들은 지금 사람들의 기억 저 편에 있다.

그들은 그들에게 배당된 행복을 당대에 모두 누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전에 단 한 점의 유화만 팔렸다는 일화로 유명한 고흐와

그의 친구였던 가난한 화가 고갱은 외롭고 가난했던 삶을 후대의 평가가 보상해주고 있다.

비록 당대 사람들에게 인정 받지 못하고 가난의 굴레를 끝내 벗어버리지 못한 채 늘 고독하게 살다가

서른일곱의 나이에 스스로 생을 마감했지만, 지금 고흐를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으며

명작 "해바라기"와 "별이 빛나는 밤"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이것이 가난해도 아파도 고통스러워도 발작을 일으켰을 때에도 끊임없이 그림을 그렸던 그에게 주어진 

후대의 배당금이 아닐까한다.

 

 

미술방면에 그닥 아는 게 없는,

그림의 문외한인 내가 고흐와 그의 그림들을 만난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이 책은,

고흐의 평전이겠거니하며 속도를 내서 하루에 다 읽으려했던 나의 생각을 보기 좋게 뒤집어 놓았다.

이 책의 내용은 한번에 쭉 읽기보다는 틈틈히 읽으며 음미하고 곱씹어봐야 할 내용으로 가득차 있다.

내가 만난 고흐는 그림이 전부였던 화가이자 철학자이자 독서가였다.

그는

검은 빵과 커피 한 잔으로 하루를 버티며 끊임없이 노력하며 그림을 그리는 가난한 화가였고,

자연과 예술의 본질을 깊이 통찰하는 철학자였으며,

독서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던 독서가였다.

고흐는 동생 테오에게 668통의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책은 그 중 80통의 편지와 그의 그림을 적절히 배치해 그림에 대한 이해와 그림의 탄생배경을 설명해준다.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른다.

왜 명작인지, 어째서 명화인지, 흔히 고흐하면 강렬한 색상을 말하는데 무엇이 강렬하다는 건지 나는 모르겠다.

그렇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고흐의 그림은 질리지 않고 따뜻하다는 것이다.

자연을 끔찍히 사랑했던 그가 그려낸 자연은 정말 따뜻하다.

사람에 대한 애정이 깃든 다른 그림들도 마찬가지다. 

중도하차하긴 했지만 신학을 공부하고 잠시나마 전도사의 길을 걸었던 그가

자연을 향해 "신의 실패한 습작"이라고 폄하한 것은 유감이지만.

 

 

 

그의 따뜻한 그림 만큼이나 따뜻한 영혼을 소유한 고흐는

또 한명의 따뜻한 영혼을 소유한 동생의 재정적인 후원을 받으며 그림을 그렸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동생에게 고마움과 미안함을 떨치지 못했다.

동생에 대한 이런 부담감은 그림에 더욱 매진하게 했다.

그래야만, 아니 그것 밖에는 동생에게 해 줄 것이 없었기에.

고흐가 죽은 뒤 6개월 뒤에 건강이 갑자기 악화된 동생은 형의 뒤를 이어 죽음을 맞이하고 형 옆에 나란히 묻힌다.

동생은 형을 후원하고, 형은 동생을 격려하며 감동스런 형제애를 보여주었던 그들은

아마도 영혼의 동반자라는 소울 메이트가 아니었나싶다.

동생이 형에게 보낸 편지는 정말 가슴 뭉클하다.

마치 형을 뒷바라지 하기 위해 태어난 사람처럼 형을 걱정하는 테오의 마음 씀씀이는 가슴 찡하다.

불행한 삶을 살다간 고흐의 일생에 유일한 행운은 바로 동생 테오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형이 짐스러웠을 법도 하련만 늘 형을 안심시키는 테오를 동생으로 둔 고흐는

여러명의 여인들과의 사랑은 실패했어도 단 한사람의 사랑은 확실히 얻고 간 행운아다.

정말 그를 행운아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이렇게라도 그를 위로하고 싶을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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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설헌, 나는 시인이다
윤지강 지음 / 예담 / 200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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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난설헌은 우리 나라 최초의 한글 소설 [홍길동전]의 저자인 허균의 누이다.

난설헌은 황진이, 신사임당과 더불어 가장 많이 알려진 조선의 여류시인이다.

이 책은 스물 일곱해를 살다간 그녀의 슬픈 삶을

역사적 사실인 씨줄과 그녀의  시상을 날줄로 한 뒤 작가의 상상력으로 매듭지어 놓은 책이다.

 

난설헌은 남성 중심의 조선에서 시를 지은 여류시인이다.

그것도 규방시가 아닌 저항시와 자유시를 노래한 천재시인이다.

중국의 문인들은 그녀의 천재적인 시재에 찬사를 보내고 난설헌의 시를 모아 문집을 만들어 암송했으나

조선의 사대부들은 입을 모아, 특히 조선의 셰익스피어라 불리는 연암은 그녀의 시를 철저하게 비난했다.

그녀는 너무 앞서 태어나 빛을 보지 못하고 스러져간 불운한 여인이다.

천부적인 재능을 인정 받지 못하고, 드러내놓고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한 시대적 비극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어린 두 자녀를 먼저 보낸 고통과 태중의 아이를 잃은 슬픔,

이로 인한 시어머니의 모진 냉대와 구박, 남편의 주색, 친정 아버지의 객사와 오빠들의 귀양 등

비극은 그녀를 비껴가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억압하는 굴레를 벗어버리고자 시가를 뛰쳐나온다.

그리고 꿈에도 몾잊을 첫사랑 성현과 극적으로 해후한다.

그토록 서로가 사랑하면서도 끝내 성현을 받아들이지 않는(못한다는 표현이 적절하겠다.)

고집스러움에 안타까움보다 진한 연민을 느꼈다.

 

그녀는 세상과 작별한 후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렇게 빨리 갈 줄 알았더라면, 이렇게 일찍 세상과 이별할 것이었다면

성현을 받아 주고 내 마음도 보여 줄 것을 하며 후회하지 않을까.....

아니면 이승의 고단한 삶을 다 잊고 저승에서 만난 아버지와 어린 아들, 딸들과 기뻐했을까.

애초에 잘못된 결혼이었다.

문제를 안고 출발한 정략결혼은 당사자 뿐만 아니라 그들의 자녀와 집안까지 불행으로 이끌었다.

 

시대가 허락치 않았으나 긑내 시인이기를 열망한 그 정신처럼,

성현과 감격적인 해후에도 불구하고 끝내 외면한 그 고집처럼,

결혼에 맞서 강하게 저항했더라면 그녀의 삶이 지독하게 외롭지는 않았을텐데,

새가 되어 하늘을 나는 꿈에 젖지 않았을텐데,

억압된 삶을 살지 않았을텐데 하는 아쉬움으로 책을 덮었다.

 

그리고 또 하나의 아쉬움은,

난설헌이라는 개인의 삶을 소개한 저자에게 느낀 실망감이다.

필요 이상으로 야한 부분이 몇 대목있다.

흐름상 꼭 필요하지도 않은데 순전히 흥미 위주로 이런 내용을 삽입했다는 인상을 받았다.

일반소설이 아닌 역사소설이라 그런지 낯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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