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어나서 고양이 화장실 치우고 까까를 챙겨준 후 소파에 드러눕는다. 솔솔 부는 선풍기 바람에 잠이 기웃거리다 스쳐 지나가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 그대로 멈칫한다. 고양이가 캣타워 중간쯤 선반에 뛰어올라 꼬리를 살랑거리면서 창밖을 바라보는 중이다.


♬코끼리 아저씨는 코가 손이래, ♬까까를 주면은 코로 받지요


저기 앉은 고양이 뒤태는 영락없는 코끼리 얼굴을 떠올리게 한다. 꼬리가 아니고 코를 흔들흔들. 나도 모르게 동요 한 구절을 마음속으로 흥얼거린다. 고양이를 보니 이번엔 자세를 바꿔 나를 쳐다보고 있다. 내 노랫소리가 들렸나? 고양이, 화장실 갔다 와라. 이따 아침에 괜히 뛰어다니면서 나 깨우지 말고. 속으로 생각한 말이었는데, 알아들었는지 툭 뛰어내리더니 화장실로 향한다. 착한 녀석. 귀신 같은 녀석.


자세를 돌려 옆으로 눕자, 소파의 등받이가 바로 코앞에 있다. 밝은 베이지색. 내가 밤마다 누워 자는 자리는 어두운 베이지색으로 변하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침이라도 흘리면 얼룩 생기지 않을까? 그러면 안 되는데. 내 발이 닿는 부분은 까매지지 않을까? 생각해 보니, 고양이가 캣타워에서 소파로 뛰어내리면서 딛는 부분은 벌써 거뭇거뭇해졌구나. 참, 걱정도 팔자다. 이렇게 걱정을 머리에 이고 몸에 덮고 등에 지고 살아서 살이 안 찌는 건지도 몰라. 고양이가 야옹 하고 크게 한 번 부른다. 어이구, 쉬야 했어. 자알 했어. 내가 깨어있는데 자기가 화장실 다녀온 걸 알은체해주지 않으면 꼭 저렇게 한 번씩 광고를 한다. 낮에는 고양이와 아저씨의 한바탕 뜀박질이 있었겠지만, 새벽엔 이 정도로 마무리.


다시 똑바로 누워 자세를 잡는데 고양이가 캣타워 상단 아크릴 해먹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한 다리는 모서리에 걸쳐서 바깥쪽으로 뺀다. 건방진 녀석. 내가 잘못 교육을 했어. 어디 가서 욕먹지 말아야 하는데. 또 무슨 걱정거리가 있던가? 멈칫거리던 잠이 고양이를 피해 다시 달려든다.


걱정은 내일 아침에 하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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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아무것도 하기 싫어 마루에 벌렁 드러누워 창밖을 보면 곤충들이 근처에 머물다 갈 때가 있다. 매년 찾아오는 것도 있는가 하면, 올해 처음 그 모습을 드러낸 존재도 있다. 앞으로 지나가거나 배회하는 존재들을 제외하고 꼽아보자면, 일단 나방류. AI에 따르면 흰띠명나방이다. 엄지손톱만 한 크기에 짙은 밤색. 나방은 야행성 아닌가 싶지만 이 종은 낮에도 잘 돌아다닌단다. 워낙 자주 나타나다 보니, 이젠 고양이조차도 관심 밖이다. 간혹 창에 붙어 조금씩 움직일 때만 시선을 주지 바로 눈앞에 있어도 그 흔한 냥펀치조차 날리지 않는다.


두 번째 손님은 노린재. AI에게 물어보니 소나무허리노린재라고 한다. 색깔은 낙엽 색깔. 소나무의 즙을 빨아먹고 산다는데 근처 산에서 날아온 듯하다. 한동안은 고양이 채터링의 주 대상이었으나 먹는 거 빼곤 관심의 유효기간이 며칠에 불과한 고양이 덕에 요즘은 편안히 방충망에 붙어 쉬었다 간다. 나 역시 길바닥 낙엽 보듯 무시하고 있다.


세 번째 손님은 말벌. 화려한 색에 한 체급 하는 데다 절대 가만있지 않은 움직임으로 고양이의 열렬한 관심 대상이다. 다만 뚫어지게 쳐다볼 뿐 채터링을 하거나 섣불리 냥펀치를 날리지 않는다. 나 역시 뚫어지게 쳐다볼 뿐이다. 간혹 윗집 에어컨 실외기 안쪽으로 들어갔다 나왔다 하는 움직임을 보여서 잔뜩 긴장 중이다. 벌집 같은 거 만들 생각 마라. 119에 신고할 거다.


마지막 열외로 딱 한 번 등장해서 기겁하게 했던 사마귀. 방충망 위쪽에 초록색 무언가가 강렬한 날카로움을 뽐내고 있길래 다가갔더니 몸길이가 15cm도 넘을 거 같은 사마귀 한 마리였다. 얼마 전 TV에서 절에 사는 새끼 고양이가 자기 얼굴 길이의 사마귀를 우걱우걱 씹어 먹는 걸 본 적이 있는데... 우리 집 고양이는 캣타워에서 자는 중이다. 저 녀석은 물리적, 물질적으론 도무지 도움이 안 된다. 막대기를 하나 들고 와 톡톡 건드렸더니 앞발을 방충망 안으로 쑥 집어넣는다. 아니 아니, 그건 반칙이지. 손님, 무기를 집안에 들이밀면 안 되죠! 나, 가서 고양이 집어 들고 온다! 그럼, 손님 잡아먹을지도 몰라...요! 비현실적으로 작은 머리를 이리저리 돌리면서 긴 다리로 성큼성큼 한쪽으로 이동한다. 어우 야, 그 덩치, 그 모양새로 그렇게 움직이면 무섭잖아요! 방충망 안쪽에서 다시 막대기로 툭툭 건드린다. 빨리 떨어져라. 막대기와 앞다리의 몇 번에 걸친 티키타카 후 사마귀는 자리를 뜬다. 날개를 퍼덕거리며 바람을 타고 건물 옆으로 빨려 들듯 사라지는 사마귀를 보면서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 난리를 쳤건만 고양이는 캣타워에서 눈도 뜨지 않고 잔다. 이렇게 둔한 녀석이 아닌데. 의심 가득한 눈으로 뚫어지게 쳐다보지만, 고양이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이 자슥 이거...


꼬리말) 한동안 창문을 찾아오는 곤충들이 없었는데 요며칠 간혹 한 마리씩 때늦은 방문을 하곤 한다. 질척거리는 여름에 곤충도 헷갈려하는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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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씻는다. 따뜻한 물이 몸을 따라 흘러내리는 게 반갑고 편안하다. 얼마 전만 해도 시원한 기운이 몸을 감싸지 않으면 씻는 거 같지 않았는데. 물의 온기에 몸을 맡기다 엄지손톱에서 전해지는 쓰라림에 낯을 살짝 찌푸린다. 낮에 일을 하면서 무언가를 뜯을 일이 있었는데 손가락이 미끄러지면서 왼손 검지가 오른손 엄지 끝을 훑고 지나갔다. 그러면서 엄지손톱 한 귀퉁이가 살짝 들렸던 모양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잊었는데 물이 들어가면서 통증을 되살렸다. 되살린 건 통증뿐만이 아니다. 그때의 서두름과 심지어 이러다가 다칠 텐데 하는 조바심까지. 알면서 다쳤으니 내가 멍청한 거지. 오른손을 흘러나오는 물 밖으로 빼고 다시 평온함을 찾아본다. 하지만. 어색하게 든 오른손은 따뜻한 물의 온기 밖에서 과거의 나를 끊임없이 상기시킨다. 바보.


샤워를 마치고 나와 바닥에 앉는다. 따뜻한 물을 너무 오랫동안 맞았나? 덥다 정도의 느낌은 아닌데 몸에서 살짝 열기가 느껴진다. 선선한 공기가 내 피부를 공략해 보지만 역부족이다. 이런, 샤워를 하면서 여름을 뒤집어쓰고 나오다니. 정말 쪼잔하게 이런 식으로 질척거리기냐? 쿨하게 떠나라. 나중에 가을한테 엉덩이 세게 걷어차이고 후회하지 말고. 하긴, 아쉬울 만도 하겠다. 작년은 9월까지 더워서 에어컨을 얼마간 사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올해는 더위가 빨리 끝나긴 했다. 왜 서둘렀을까? 아니지. 내가 지금 남의 사정까지 챙길 때가 아니다. 이번 여름에 서두르고 조급해서 낭패를 본 건 나였으니까. 아우 씨, 주식. 마룻바닥의 시원함이 엉덩이부터 조금씩 열을 식히다가 주식에서 촉발된 열기에 밀려난다. 후끈. 오른쪽 엄지손톱의 얼얼함이 계속 신경 쓰인다. 난 실수로부터 무엇인가를 배우기는 하는 걸까? 이 나이 먹고도 이런 생각이나 하고 있나? 바보. 빨리 가라, 여름아. 추석 오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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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지고 놀던 장난감을 물그릇에 담가 놓을 때가 종종 있다. 어렸을 땐 꽤 자주 그랬고, 요즘은 어쩌다 한 번씩. 이유를 추측해 보자면, 내 관심을 끌려고. 내가 집에 없을 때, 내가 잠들어 있을 때 저런 행동을 할 때가 많았다. 그런데 꼭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 물그릇 주변에 끈 같은 게 있으면 그걸 물어서 물그릇에 넣거나, 놀다가도 물그릇 주변을 지나갈 때면 간혹 고민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걸 저기다 처넣을까? 고양이 마음을 어떻게 알겠나? ***


(아깽이 시절 그냥 커다란 유리 물그릇일 때)


오오, 빛이 반사되어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저 삐까번쩍함! 우와, 멋지다! 흔들흔들, 번쩍번쩍. 혹시 저것이 신 앞에 떠 놓고 소원을 빌 때 썼다던 정화수(정안수)라는 것인가? 잠깐, 그렇다면! (두리번, 후다닥) 이거, 내가 제일 좋아하는 너구리 꼬리 장난감인데... 이거 줄 테니까 신님아, 내 소원 좀 들어주라. 야웅, 야웅... 야웅, 야웅...


“야, 너 그걸 왜 또 담그는 건데! 물 방금 갈았는데 또 씻어야 하잖아!”


아 씨, 어디 있다 귀신같이 나타나가지고.


(자동 급수기로 바꾼 후)


물이, 물이 졸졸졸 흘러나오는데?! 아니, 어디서? 주변에 강이나 시냇물도 없는데? 오, 이것은 신이 축복한 물줄기인가? 그렇다면! (두리번, 후다닥) 이거, 내가 아직도 제일 좋아하는 너구리 꼬리 장난감인데... 너무 오래 가지고 놀아서 반 토막뿐이지만, 이거 줄 테니까 신님아, 내 소원 꼭 들어주라. 야웅, 야웅... 야웅, 야웅...


(현관문 여는 소리, 일 끝내고 돌아온 아저씨 등장) “야 인마, 또야! 아니, 왜 그러는 건데? 물통 또 씻어야 하잖아! 니가 닦아, 이눔의 자슥아!”


아이, 참, 어떻게 알고 들어왔대? 귀신이네, 귀신.


(그날 밤)


아저씨는 침대에 누웠지? OK. 그렇다면... (슬금슬금) 너구리 꼬리를 이렇게 놓고. 신님아, 이번에는 동작 좀 빨리빨리 하자, 알겠지?


야웅, 야웅... (나랑 놀아주지도 않고 먹을 것도 팍팍 안 주는 저 아저씨...) 야웅, 야웅... (살 좀 찌고 넉넉해서 마음이 여유로운 새 아저씨로 바꿔 주세요...) 응? (고개만 빼꼼 내밀고 쳐다보는 아저씨와 눈 마주침) 으악!


“이 개눔의...”


(후다닥. 소파 밑으로 피신) 진짜... 귀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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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2026 제17회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ㅣ 젊은작가상 수상작품집 17
김채원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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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 세 개가 떨어지다> /김채원


사는 게 명확했으면 싶다. 이거는 이거고 저거는 저거고. 이리 가면 이게 나오고 저리 가면 저게 나오고. 이름표나 도로 표지판처럼. 하지만 그런 삶은 많지 않다. 관계를 맺으면 맺을수록 삶은 복잡해지고 돌변한다. 그렇다고 혼자 울타리를 둘러치고 살 수는 없다. 그러면 그 사람은 안으로, 안으로 파고들다 끊임없이 상처를 헤집을 거고, 자신을 또는 타인을 용서하지 못할 테니까.


그러니 우리 삶은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있음을 인정하는 게 가장 먼저여야 할지도 모른다. 다시 시작할 수도 있고, 다시 시작해서 기쁠 수도, 슬플 수도 있고, 그냥 보다 보면 알게 될 수도 있고, 이래서도 괜찮고 저래서도 괜찮을 수 있는. 알고는 있지만 제대로 파악할 수 없는 원칙 아래에 모든 것은 우연과 찰나의 연속일 수도 있음을 수긍해야 한다. 그러면 버겁도록 환하고 무거운 개별적인 삶에서 우린 조금이나마 힘을 뺄 수 있을 것이다. 하나하나 다 소중하지만, 모두가 별이 되어 어딘가 고정된 채 환히 빛나야 할 이유 또한 없음을 깨닫게 될 것이다.


<추도> /길란


가난이 맹목적으로 이 땅을 휩쓸던 때가 있었다. 어디에나 가난이 널려 있어서 그저 처절함을 즐기면 그만이었던 시기. 사람들은 자기 자식들에게만큼은 이 가난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여겼다. 누군가는 밤을 새우고 누군가는 저 멀리 타국까지 가서 자신의 시간을 불태웠다. 그렇게 해서 가난은 점차 설 자리가 좁아졌다. 가난은 시대가 변했음을 깨달았다. 휘적휘적 다니며 길거리 돌멩이처럼 발에 차이는 처절함은 더 이상 일상적이지 않았다. 가난은 조용히 기다리며 살폈다. 풍요 속 빈곤의 시대를 지나며 가난은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허영과 욕심을 두 축으로 판을 다시 짰다. 진짜 가난한 자는 생존을 위해, 가난하지 않은 자는 투자란 이름으로, 부자인 자는 차별화를 위해 가난을 끌어들였다. 풍요 속 상대적 빈곤의 시대. 가난은 다시 세상을 휩쓴다.


2026년. 국민소득 4만 달러 시대가 열리려고 한다. 그럼에도 모두가 가난한 우린 많은 것을 잃었고, 더 많은 것을 잃게 될 것이며, 가장 중요한 것을 언제든 놓아버릴 준비가 되어 있다. 가난은 진심을 담아 우리에게 댓글을 남기는 중이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꼭 죽어야만 죽은 건 아니다.


<나는 야구를 사랑해> /남의현


필드에 가만있는 사람이 많다. 필드에서 나가는 사람이 많다. 공을 노려보고 쫓다 한 사람이 잡는다. 공만 보고 뛰다 부딪혀 다칠 수도 있다. 몰랐다.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야구가 어떤 삶을 대표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의 말까지 다 읽고 그의 삶이 반영됐을까를 생각했다. 그러다 고개를 흔들었다. 아이구야, 현실이든 허구든 자기 삶을 함께하기가 미안한 삶으로 규정하기까지 얼마나 지난한 과정을 거쳤을지 상상하기도 싫구나.


이야기에 묻어있던 많은 감정들을 돌이켜 본다. 희망? 오기? 집념? 그 어떤 것도 핵심은 아닌 거 같다. 무엇이라도 붙잡겠다고 하는 것이라면 셋 모두 가능하겠지만, 내가 느낀 건 어떤 절망이었다. 절망 앞에 ‘어떤’이란 수식어를 붙인 이유는 온전한 절망이 삶의 동력이 될 수 있나 하는 의문 때문에. 동력도 필요 없고, 그저 관성이었던 걸까? 등장인물인 ‘나’가 자신을 잘 돌봤으면 한다. 그러지 않으면 삶은 관성에 따라 흐를 뿐이다.


<히데오> /서장원


아파봤던 사람이 타인의 상처를 더 이해하기 쉽다. 히데오는 일본인 아버지와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냈다. 당시 히데오는 어머니가 한국인이란 이유로 또래 아이들에게 맞아 코뼈가 부러졌고, 그 일로 인해 그의 일본 생활은 끝을 맺는다. 대한민국에 와서 한국 이름으로 성장하지만, 그 또한 쉽지 않았을 것이다. 대학에 입학하고 연극 오디션에 지원한 그가 지원 이유를 이렇게 밝힌다. 자신도 사람을 때려 주고 싶었다고.


분하고 억울했을 거다. 어디에도 완벽히 속하지 못하고 차별받아야 한다는 게. 현실이 아닌 연극에서나마 그 마음을 해소하고 싶었던 거겠지. 능력을 인정받으면서 그는 사람들에게 조금씩 받아들여질 거고, 소설의 이야기는 아마도 여기까지인 듯. 그런데 인정받지 못해서 그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씩 쌓인다면? 그래서 상처를 잘 아는 자들이 모여 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오히려 타인의 상처를 들쑤신다면? 우린 앞으로 수많은 히데오, 수많은 차별과 맞닥뜨릴 거고,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끔찍한 광경을 목격할 수도 있다.


<귀신이 없는 집> /위수정


옛날 교토에 코요라는 귀족 집안 여성이 있었다. 총애를 받았으나 모함으로 추방되었고, 유배된 시골 마을에서 능력을 발휘해 그 마을을 번성케 했다. 사람들은 코요를 귀녀라 부르기 시작했다. 정부는 코요를 위험한 인물로 판단하고 그 마을을 토벌하기로 한다. 코요는 서른셋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고, 그 마을은 그 후 ‘귀신이 없는 마을’을 뜻하는 기나사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


우리는 한때 무언가를 간절히 원하며 모든 것을 바칠 듯 절실히 매달릴 때가 있다. 그런데 어떤 방식으로든 삶이 안정되면, 그 간절함과 절실함은 절대 예전 같을 수가 없다. 자연스럽게 관심 밖으로 밀려날 수도 있겠지만, 종종... 어쩌면 상당수가 그것을 변질시킨 채 간직한다. 날것 그대로의 감정은 사라지고, 내 삶에 유용하게, 추하지 않고 번듯하게 가꾸고 누리려 한다. 그러다 보면, 공감대는 사라져 오직 자신만의 무언가가 되고, 덩그러니 혼자 남은 자신을 발견한다. 그나마 스스로 발견하면 다행이다. 깨닫지도 못하고 남은 생을 살아가는 게 대부분일 테니.


작가에 따르면, 첫 번째 단락에 적은 일화를 기반으로 단편의 이야기를 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귀신이 없는 마을. 코요가 없는 마을. 알맹이가 없는 마을. 우린 이런 일들을 많이 접한다. 기득권이 된 정치인들의 이념, 기득권을 쥔 중년 남성들이 외치는 여성 평등, 넉넉한 자들이 외치는 사회주의.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 진정성과 정당성까지 복잡하게 얽혀 꼬여버린 갈등들.


“여기엔 아무도 없네요. 사람도. 귀신도.”

- <귀신이 없는 집> 중에서


난 이 이야기를 다 읽고 나서 한참 동안 제목을 <귀신‘도’ 없는 집>이라 착각하고 있었다.



<일일야성/一日野性 > /이미상


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 다른 사람을 이용할 때가 있다. 단순히 비교하거나 아니면 누군가와 가까워지는 방식으로. 경수는 흐릿해지는 자신의 남성성을 보상받기 위해 아내인 운주의 격을 떨어뜨린다. 같잖은 남편의 변화가 어이없지만, 한편으론 권태기와 함께 가라앉는 자신과 다르게 변화를 꾀하는 경수가 여러모로 달리 보이기도 한다. 운주는 중고등학교 때 놀던 시절을 함께 한 선숙에게 연락하고 추억에 빠져들어 분위기를 바꿔보려 한다.

이후 운주가 맞닥뜨린 건 자신이나 선숙도 결국 자존감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서로를 끌어들였었다는 사실. 그나마 선숙은 현재 자기 직업을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는 듯 보이지만 운주는 그조차도 아니다. 게다가 권력관계가 명확했던 과거를 떠올리게 하는 행동들은 운주를 계속 현실로 끄집어낸다. 돈과 폭력과 계급이 만들어내는 층위와 그것을 넘나드는 선망은 사람들로 하여금 때론 자존감을, 때론 모멸감을 선사하기도 하는 법이다. 경수는 남성성을 상실한 대신 아내를 낮춤으로써 자신을 높였고, 선숙은 육체노동으로 건강을 잃었지만 윤주를 통해 최고 의사에게 디스크 수술을 받을 기회라도 넓혔다. 상대방을 이용해 자존감을 얻는 이 게임에서 운주는 무엇을 건졌을까? 깨달음? 삶에서 얻는 깨달음은 보통 씁쓸하던데.

“산세가 깊어 캠핑 스폿으로 유명한 모 지역은 군의 슬로건까지 바꾸었다. J군에서 보내는 일일야성. 문명이 지워낸 나를 다시 찾는 하루.”
- <일일야성> 중


<적들이 산에 오를 때> /함윤이

"즐거울 테고, 아주 아름다울 거예요. ... 그 말에는 어머니의 이야기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었다. 어머니는 노아가 이름을 바꾸고 싶다고 말할 때마다 불현듯 부드러운 미소를 띠며 노아의 양손을 쓰다듬곤 했다. 그러면서 몇 번이나 한 이야기를 다시 꺼냈다. 네 이름은 더 낫고 아름다운 세상으로 모두를 인도하는 이름인걸. 그 새로운 세상에선 모두가 배부르고, 즐겁고, 따뜻할 테고..."
- <적들이 산에 오를 때> 중에서

내가 지금껏 살아온 세상에선 '믿음'이란 단어는 종교와 가장 밀착되어 있었다. 물론 어디에나 쓰일 수 있는 단어지만, 단짝을 찾으라고 한다면 믿음과 종교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믿음의 단짝이 정치로 바뀐 거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이게 맞다! 옳소! 그리고 내달린다. 넌 틀렸다! 옳소! 역시 내달린다. 확신에 찬 소리가 양쪽에서 울려 퍼지고, 거칠게 충돌하며 울리는 파열음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이 소란 속에서 정말 모두가 즐겁고 배부를 수 있는 세상이 다가올까? 확신은 나와 우리를 견고하게 둘러싸고, 그 외부는 불신과 혐오가 넘친다. 믿음과 손을 잡은 정치는 아이러니하게도 불신과 의심을 휘두르며 사람들을 포섭한다. 내게로 오라. 저들을 물리쳐 우리가 즐겁고 배부른 세상을 만들어보자. 적들을 만들어내고 믿음을 강탈한 세상. 도대체 저 문장 어느 구석에서 '좋은' 세상이 나올 수 있을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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