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책] 호라이즌
배리 로페즈 지음, 정지인 옮김 / 북하우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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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인 배리 로페즈는 자전적인 여행 에세이를 쓰고자 이 책을 구상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자신의 모습부터 시작해서 여행을 다니며 깨우치고 쌓여가는 생각들을 900페이지에 달하는 이 책에 욱여넣을 의향이었고 그렇게 했다. 솔직히 책의 전체 모습이 들어오기 전까지, 그러니까 한번 제대로 완독하기 전까지 그의 글은 쉽게 다가오지 않는다. 워낙 방대하기도 하고, 오지에 가까운 낯선 곳들이 등장하는 데다 문장 자체가 길기도 해서다. 그래서 처음 책을 다 읽고 글을 써보려 했을 때, 내 계획은 내가 했던 여행을 소재로 배리 로페즈처럼 이야기를 구성해 보자는 거였다. 하지만 두 번째 읽으면서 그 계획은 바로 접었다. 그는 이 책을 위해 몇 군데의 여행지를 선택해서 글감으로 삼았다. 그러면서 선택되지 못했지만 자꾸 신경이 쓰이는 다른 세 곳의 이미지를 언급했다. 중국과 캐나다와 아프가니스탄. 중국에선 열악한 환경에서 지내는 하층계급과 야시장에 전시된 각종 동물의 모습을, 캐나다의 북단에선 빙하가 사라져 북극곰이 사냥의 터전을 잃어가는 모습을, 아프가니스탄에선 전쟁으로 인해 많은 것을 잃고 회복 불가능 상태에 빠진 한 여인의 모습을 포착했다. 그의 머릿속에 각인된 이미지가 이런 것이라면, 내 여행 글을 여기 덧붙일 순 없었다. 삶의 경중을 논할 바는 아니지만 그의 여행은 너무나 진지하고 압도적으로 이질적이었다. 그래서 그가 책 첫머리쯤에서 했던, 같지만 다른 질문 두 개로 내 글을 시작한다.


"이 순간의 아름다움 속에서 갑자기 내 안에 이런 의문이 떠오른다—우리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

"지금, 이 호전적인 파벌의 시대, 일상적인 폭력의 시대에 우리 모두에게는 어떤 일이 일어날까?" (P17)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두 개의 시선과 하나의 질문. 이제 시작이다. 내 글도 길어질 거 같다. 내 탓이 아니다. 900여 페이지를 쓴 작가 때문이다.


- 파울웨더곶


사람이라면 누구나 우월감을 가져본 적이 있다. 꼭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어떤 확신을 갖고서 상대방을 대할 때가 있다. 내가 옳다, 내가 더 낫다, 내가 더 많이 안다. 동일 분야, 특히 기술적 측면에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시야를 넓혀서 다른 분야, 다른 생활 방식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저런 태도를 보이는 게 가능할까? 더 크게 확장해서 다른 문명에 대해서도? 내가 옳고, 그래서 너는 아무것도 아니며 내 뜻대로 해야 한다는 독선이 가져다주는 폐해를 우린 현실에서 너무 많이 목격하는 중이라 새로울 것도 없는 얘기다. 작가는 그중에서도 제국주의가 한창일 때 서구 열강이 침범하고 무시했던 여러 문화를 바라본다. 그 말살에 대한 책임과 이후 이어져야 했던, 하지만 그러지 않았던 선주민들에 대한 사과를 논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보다 사라지고 잊힌 문화가 제시했을 지혜, 현 상황을 판단하고 대처할 수 있는 그들만의 시각을 안타까워한다. 그 어느 때보다 다양성이 요구되지만, 독선과 오만에 압살되어 버린 인류의 또 다른 시선을 말이다.


작가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주로 찾는 곳은 파울웨더곶이다. 이곳은 제임스 쿡이 처음으로 북아메리카 서해안에 도착했을 때 상륙한 곳이라고 한다. 제임스 쿡은 영국 군인이자 지도 제작자였으며 3차에 걸친 원정을 통해 남극 대륙 내부를 제외한 태평양의 모습을 대부분 그려낸 인물이다. 그리고 한 명의 인물이 더 있다. 래널드 맥도널드. 백인과 치누크족의 혼혈로 개항 전인 일본에 들어가 침략에 대응하도록 영어를 가르쳐준 인물이다. 작가가 이 둘을 집착에 가까운 관심으로 쫓는 것은 일단 그들이 제국주의 시대와 어떤 식으로든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쿡 선장은 본인의 의도는 아니었으나 제국주의 확장에 결정적 역할을 했고, 맥도널드는 제국주의의 피해자로서 정체성의 혼란을 겪는다. 그러나 둘 다 작가에 따르면 미지에 대한 경외와 존중을 지녔고, 삶의 방향을 정하고 나아갈 수 있는 의지와 도전 정신을 갖췄다. 다만 어떤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종착역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했으나 그 과정에서 보여주는 미숙함이나 갈등은 인간적인 면모이기에 그 또한 작가의 관심에 한몫한다. 작가는 이 두 사람을 통해서 과거를 살피고 자신의 질문에 대응할 방법을 찾고 싶어 한다. 우린 어떻게 해야 하나? 우월감과 확신을 바탕으로 소유와 소비를 위해 자연과 문명을 침범해 그들의 설 곳을 없애버리는 이 세상에 우린 무슨 대응을 해야 할까?


- 스크랠링섬


작가가 두 번째로 펼쳐내는 여행지는 그린란드 부근 스크랠링섬이다. 여행이란 단어에 헷갈릴 수 있지만, 작가는 이곳에 고고학자들의 유물 발굴에 참여하기 위해 온다. 이 섬엔 도싯 문화와 툴레 문화의 거주지가 있고, 두 문명은 몇백 년간 시기가 겹친다. 현재 시점에서 볼 때 도싯인은 멸종했고, 툴레인은 흔히 에스키모라고 부르는 이누이트족의 직계 조상이 된다.


여기서도 작가는 많은 이야기를 쏟아낸다. 저널리스트라고 할 수 있는 자신이 고고학자들과 함께 작업할 때 신경 써야 할 점, 사라진 문명이 남긴 흔적을 통해 그들과 소통하려는 노력, 비극으로 끝난 미국의 북극 원정대가 남긴 마지막 흔적들. 수많은 에피소드를 오가며 작가가 끊임없이 되새기는 것은 타인이나 다른 문화를 대하는 자세다. 그리고 그가 반복해서 그 의미를 찾는 이유는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부분이 그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아닌 다른 존재에 대한 감정이입이나 존중, 배려 등 타자에 대한 인정이 부족한, 어쩌면 아예 할 줄 모르는 현대문명의 우월한 이기심을 향한 걱정. 동시에 그 이기심을 극복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유적지에서 작가 자신이 했던 부끄러운 행동을 통해서 읽는 이들에게 상기시킨다.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에게 줄 수 있는 유일하게 올바른 선물은 그들의 말을 듣는 것, 주의를 기울이는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대체로 그런 상황에서 무언가를 말하고 싶은 충동에 굴복하는 것은 그저 자기 탐닉적이거나 이기적이기만 한 일이었다." (P339)


- 푸에르토아요라


저 지명만 놓고 보면 어디야 싶겠지만 갈라파고스 제도에 속한 지역이다. 맞다. 다윈과 종의 기원, 진화론으로 유명해진 곳. 따지고 보면, 이곳만큼 이 책의 주제 의식과 잘 맞아떨어지는 곳도 흔치 않다. 진화론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다윈은 자신의 생물학적 이론으로 인간은 신의 모습을 본떠 만들어졌다는 특별한 위치에 치명타를 가했다. 물론 사람들은 그 정도에 굴복하지 않고 자신들이 우월하다는 새로운 방식을 생각해 낸다. 인간은 완성을 위해 변화해 가는 중이며, 그래서 생태계의 최정점에 선 존재라는 식으로. 우리가 흔히 잘못 생각하는, '진화'라는 단어에 '진보'라는 단어를 덧씌운 개념이다. 그런데 정작 다윈은 진화를 환경에 적응하는 방향성의 증가라고 판단하면서 '고등'이나 '하등'이란 단어를 쓰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세상 사람들은 다윈의 의도와 다르게 그의 이론을 차별적인 방향으로 적용했다. 어찌 보면 배리 로페즈가 쫓던 제임스 쿡과 같은 선상에 있는 인물이 찰스 다윈인 셈이다.


작가는 다윈의 그림자가 강력하게 드리워진 이곳의 섬들과 바다를 넘나들며 계속해서 사고를 확장한다. 특히 바다거북 새끼가 해변에 묻힌 알에서 깨어나자마자 포식자를 피해 바다로 향하는 장면과, 뒤이어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야생화된 개들에게 쫓기는 작가의 모습이 연이어 배치된 부분에선 과연 인간은 이 생태계에서 어떤 존재인가를 돌아보게끔 한다. 또한 이곳은 갈라파고스 특유의 삶과 죽음이 존재하지만, 상어 지느러미 획득과 같은 인간의 욕심이 불러온 삶과 죽음이 침범해 들어온 곳이기도 하다. 각종 바다 생물과 함께 유영하며 실질적인 치유와 경이를 선사 받기도 하지만, 남태평양의 낙원이나 돈벌이 같은 환상이 들러붙어 기대와 실망, 희망과 반목이 충돌하는 곳이기도 하다. 지역적으론 특이하지만, 보편적으론 세상의 축소판 같은 곳. 사람들 사이에서 우월함을 주장했던 문명이 동식물을 대상으로 겸손할 리 없다. 이곳에서 작가가 던지는 질문은 이렇다. 우린 지배자나 지도자가 아닌 생태계의 동등한 일원이어야 하지 않나?


"호모 사피엔스가 오로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관점만이 아니라 생태학적 관점을 취하고, 물리적 환경이 인간 유전체에 선택압을 가한다는 사실을 인지하면 단순명료한 하나의 판단에 이르게 된다. 바로 환경을 보살피는 일이 자신을 보살피는 일이라는 깨달음이다." (P453~454)


- 자칼 캠프


아프리카 케냐의 나키라이라는 곳에 있는 발굴 캠프다. 나키라이는 이곳 선주민인 투르카나족의 언어로 '자칼들의 장소'라는 의미라고 한다. 작가는 이곳에서 발굴자들과 함께 호모 사피엔스의 기원을 찾는 작업에 동참한다.


다윈이 주창한 진화론의 특징 중 하나는 불확실성이다. 화석 증거가 있어야 어떤 실체를 상정할 수 있고, 그것을 바탕으로 계통을 이어가야 하므로 현시점에서 과거의 모습은 뚜렷할 수가 없다. 미래 또한 마찬가지다. 생물 진화의 한 시점은 언제나 과도기다. 그렇기에 지금 우리 실체도 과도기에 해당하고, 미래엔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런 배경을 바탕으로 인류의 화석 증거를 찾겠다고 하는 것은 쿡 선장이 태평양을 항해했던 때처럼 도전 의식과 열린 사고를 갖추어야만 나아갈 수 있는 일이다. 결국 어떤 의미에서 작가는 장소와 대상만 바꾸며 같은 얘기를 반복적으로 하는 셈이다.


하지만 동어반복이 다는 아니다. 작가는 이곳에서 인류 문명이 같은 방향으로만 흐르지 않는, 결과의 불확실성 또한 포착한다. 선주민들 역시 사람이기에 똑같은 호기심과 욕심을 지녔고,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일구어낸 나라의 국민은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거꾸로 가해자의 위치에 서려고도 한다. 심지어 물질문명을 향한 광신으로 그 이외의 것들은 모두 가치 없다고 판단하기까지 할 정도다. 작가는 이런 모습들을 캠프의 모습과 병치시키며 생각들을 풀어낸다.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모습이라는 듯이.


작가는 이번 여행지를 통해서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가 예외적인 존재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가 선택한 단어는 '뛰어난'이 아닌 '예외적인'이다. 그가 인류의 기원, 정확히는 그 흐름을 찾고자 하는 것은 생태계 전반에 영향을 미치는 무분별함의 특별함을 추적하고자 함이 아니라 생태계 한 귀퉁이에서 출발한 생태계의 일원임을 확인하고픈 욕망일 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그는 질문의 형태를 보다 근본적인 형태로 바꾼다. 인류의 기원을 찾듯이 모든 질문의 시작을 찾아서.


"호모 사피엔스가, 다시 말해 문화적으로 진보한 인간이 예외적인 존재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더욱 도발적인 질문은 그 예외적인 성질이 그들을 어디로 데려갈 것인가다." (P510)


- 포트아서에서 보타니베이까지


갑자기 친구의 불평이 떠오른다. 국민학교 시험 문제였는데, 1950년 한국전쟁의 표기로 '6.25'와 '6·25' 중 어떤 것이 맞는지를 고르는 문제였다. 점을 가운데 찍는 것이 정답이었는데 친구는 오답을 선택했었다. 그는 두고두고 투덜거렸다. 점의 위치가 뭐가 그리 중요하냐고. 사소한 일화지만 이건 우리 세대가 반공 교육의 틀 속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하나의 예시다. 그런데 그런 우리들조차 한국전쟁의 참사를 우리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여기지 않는다. 제주 4.3, 광주 5.18. 이 단어 배열이 무얼 의미하는지 알지만, 요즘 세대가 이 의미를 삶의 주변부로 밀어냈다고 내가 뭐라 할 자격이 있을까? 그래도 한 가지만은 말하고 싶다. 이념이나 신념, 성향을 떠나 희생자가 존재한다면, 그에 대한 배려가 필요하다고. 또 그에 앞서 상대방의 입장을 미루어 살필 줄도 알아야 한다고. 그런데 이 세상은 경쟁과 이익과 소비를 위해 그런 가치를 잃어버렸다.


공동체를 이루고 문명을 일구어낸 인류는 진보를 내세워 확장을 꾀했다. 그 과정에서 다른 문명을 억눌렀고, 심지어 자국의 국민에게까지 차별의 잣대를 들이댔다. 호주의 포트아서는, 영국이 자국의 죄수나 함량 미달이라 판단한 사람들을 격리 또는 교화시키려고 영국 밖으로 추방한 자들을 위해 만들어진 식민지였다. 작가가 방문했을 당시 이곳은 과거 교도소의 모습을 간직한 관광지였고, 얼마 후 한 남자에 의해 총기 테러가 일어나 수많은 사람이 죽고 다쳤다. 그는 포트아서를 거쳐, 자원 획득이란 명목으로 선주민을, 그들의 문화를, 자연을 대상으로 각종 수탈이 이루어지는 중인 호주를 둘러보며 또 하나의 질문을 던진다.


"사회 및 환경에 가해진 해악의 상당 부분에 대해 ‘터보차저를 장착한’ 자본주의가 극악무도한 원흉으로 수시로 지적되기는 하지만, 하이퍼 자본주의를 제거하는 것이 핵심 질문에 대한 답은 아닌 것 같다. 그 핵심 질문이란, 우리 인간은 왜 서로에게 그토록 참혹한 해를 입히는가다." (P633~634)


이건 질문이기도 하지만 이전 장에서 던진 질문에 대한 답일 수도 있다. 그래서일까? 작가는 호주의 어떤 공원을 거닐다 문득 희망을 붙잡는다. 어떤 종류의 희망인지 설명은 못 하겠지만 이런 느낌을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살아남기 어렵다는 하지마비 새끼 고양이를 극진히 보살펴서 살려낸 노부부를 담은 유튜브 클립에서. 방송국의 도움으로 다리를 수술하고 더 개선될 가능성이 보이자, 눈물을 머금으며 고맙다고 인사하는 할아버지, 할머니의 모습에서. 세상은 '아직도' 살만한 곳이라는 안도 섞인 희망을.


- 그레이브스누탁스에서 포트패민 도로까지


지구상에서 아주 독특한 남극 대륙에 관한 얘기다. 선주민의 역사가 존재하지 않고, 방문자의 위치에 따라 생명체라곤 자신 이외에 전혀 존재하지 않으며, 인류 역사상 드물게 이곳에서 얻은 지식을 나누겠다는 평등한 남극조약이 맺어진 곳. 뚜렷한 목적의식과 도전 정신을 지닌 과학자들과 개척자들을 불러 모으는 곳. 작가는 대자연의 압도적인 풍경 속에서 겸허하게 세상을, 인간을, 생명을 바라본다. 나 역시 책에 나온 문장들로 이 챕터의 감상을 대신하겠다. 절대 긴 글을 쓰다 지쳐버린 게 아니다.


“예전에 한 신학 교수님이 종교를 갖는다는 건 확신을 갖는 일이 아니라 불확실성과 함께 살아가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지. 의심을 편안히 받아들이는 것, 그리고 어떤 심원한 신비에 대해 품었던 존중을 계속 유지하는 것이라고.” (P751)


이제 내 글도 끝이 보인다. 이 책은 작가의 생각들이 바다처럼 광대하게 펼쳐져 있다. 처음 접하면 그저 막연할 뿐이지만 해류의 흐름과 바람의 방향을 잡아내면 읽는 이를 어디로든 데려갈 수 있다. 해류와 바람이 각양각색이듯 도착지도 다들 다를 것이다. 심지어 한눈이라도 잠깐 팔면 자신도 모르게 일정 거리를 지나쳐버릴 수도 있다. 즉, 일관된 흐름은 있지만 생각의 방향이 사정없이 뻗어나갈 여지가 있고, 호흡이 긴 문체 특성상 집중하지 않으면 문장 단위로 헤맬 수도 있단 얘기다. 게다가 작가는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쓰지도 않는다. 그러니 이 책을 읽을 작정이라면 다독을 권한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곳에 적어놓은 문장은 일부러 길게 늘여 쓴 편이다. 게다가 일관된 흐름 속에서도 챕터를 나눠 여러 에피소드를 집어넣었고 다소 산만한 느낌까지 줬다. 그러니 이 문장들이 읽기에 버겁거나 불편하다면, 사방팔방으로 펼쳐질 길이 부담스럽다면 시간을 투자할지 말지 신중히 결정했으면 한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번 독서가 내겐 아주 특별한 경험이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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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이 좋은 아침이면 고양이와 나는 가는 방향이 다르다. 베란다 창이 거의 동쪽을 향하고 있어서 아침마다 햇볕이 마루로 담뿍 들어온다. 다른 계절이라면 아침마다 반가운 손님인데 여름엔 아니다. 어찌나 기세가 등등한지 집을 반으로 딱 갈라서 마루와 안방은 후끈하고 그 나머지는 견딜만하다. 나한텐 그렇다. 하지만 고양이는 아닌가 보다. 뜨겁기는 매한가지이나, 그래도 녀석은 일단 햇볕을 쫴야 한다. 그러다 보니 고양이는 베란다 창가로, 나는 그 반대쪽으로 움직인다. 내가 슬슬 햇볕을 피해 부엌 쪽으로 가면 녀석은 나를 쫓아와서 베란다로 가자고 눈치를 준다. 그곳에서 뒹굴며 궁디팡팡을 받고 싶단다. 그럼 끌려가서 퉁퉁퉁 두드리다 햇볕에 정신이 혼미해져 내가 두드리는 게 고양이인지 수박인지 가늠하다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난다. 그럼, 고양이는 또 나를 따라와 햇볕으로 나를 몬다.


털도 어두운색이면서 덥지도 않냐? 날 내버려둬라, 고양이!

냐~웅~


마지못해 끌려가다 햇볕에 들어가기 직전 발끝을 살짝 빛의 영역에 넣어본다. 뜨거운데. 나 타서 없어지는 거 아닌가?


고양이, 아저씨 흡혈귀 같지 않냐?


언젠가부터 쓸데없는 소리엔 답하지 않는 고양이다. 분명 한글을 알아듣는다. 녀석 배에 달린 지퍼를 찾아서 꼭 열어 볼 거다. 외계인이 그 안에 있을 거야, 분명. 궁디팡팡과 구박과 연행을 반복한 후 열기에 증발할 뻔한 정신머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탈출에 성공한다. 고양이도 만족했는지 베란다 창턱이 만들어놓은 얇은 그늘 안에 몸을 욱여넣고 그루밍을 한다. 독한 것.


나를 악몽의 끄트머리에서 완전히 빼낸 것도, 내게 일상에서 피어나는 소소한 웃음을 늘려준 것도 이 녀석이었다. 어두운 외모와 달리 양지의 기운이 꽤나 강한 고양이로세. 저기 말이지, 기왕 그럴 거 조카네 가족이 우리 집에 오면 코빼기라도 내비치면 안 될까? 꼬맹이가 널 그렇게 보고 싶어 하는데 어떻게 하루 종일 숨어서 안 나올 수가 있냐? 진짜 독한 것.


음... 나는 만만한 건가? 고양이, 이리 와 봐. 나랑 얘기 좀 합시다. 너, 나를 뭐로 보는 거냐?


꼬리말) 6월에 썼던 글. 요즘처럼 습하고 비 오는 날엔 쨍한 아침 햇살이 그리울 법도 하다는 핑계를 대며 올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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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양이는 집사를 관찰한다. 그래서 습득하고 파악하고 이해한다. 물론 고양이의 머리로. 간혹 이 녀석이 머릿속에 그려낸 나는 어떤 존재일지 궁금할 때가 있다. ***


고양이별에서 대한민국에 배정된 고양-202106... 뭐였더라? 암튼 입양 둘째 날부터 임무 수행 중. 아저씨는 컴퓨터 앞에 앉아 무언가 열심히 하고 있음. 문지방 옆에 숨어서 지켜봄. 아무래도 들킨 거 같음. 다음에는 더 잘 숨어야지.


고양-202106... 에잇! 아저씨는 날이 어두워지니 바닥에 엎어져 잠을 잠. 숨을 것도 없이 대놓고 쳐다봄. 가끔 끙끙대는 소리를 내는데 추워 그런가 싶어 내 몸을 아저씨 몸에 가져다 댐. 따뜻하네. 냥, 졸려라.


월이. 까까 먹는 시간, 체크. 나랑 놀아주는 시간, 체크. 일하러 가는 시간과 집에 들어오는 시간, 체크. 얼레... 이 아저씨, 사람이 아니라 커다란 고양이 아닌감? 생활 방식이 매일 붕어빵임. 여기 지구별이 아닌가?


월이. 지켜보다 응가 마려워 뛰어가는데 아저씨가 소리 지름. ‘너 이 자슥, 또 똥 싸냐?! 반칙이다, 반칙!’ 뭐가 반칙인 줄은 모르겠지만 내가 생각해도 이상하긴 함. 내 임무를 눈치채고 아저씨가 나를 암살하려 하는 걸 수도. 근데 응가 많이 싸면 죽나? 암튼 더 철저히 숨어야지.


월이. 아저씨, 책상에 기대 핸드폰 들여다보다 두리번거림. 책상 밑에서 감시 중인데 내 시선을 느낀 모양. 많이 예민해서 감시 임무에 스트레스 상당함. 헉, 밟힐 뻔함. ‘야, 너 거기서 그러고 뭐 하냐?!’




월이. 위험 부담을 줄이기 위해 밀착 마크로 변경. 무릎 위에 올라가 모든 행동을 관찰. 아주 좋은 방법임. 그루밍 하기도 좋고, 따뜻해서 자기도 좋고, 그러다 깨면 바로 임무로 복귀해서 좋고. 이봐, 아저씨, 살 좀 쪄라. 자리가 너무 좁다. 그리고, 가만히 좀 있으면 안 되냐? 왜 자꾸 자세를 바꿔서 잠을 깨우는 건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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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는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한 TV는 바보상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1958년엔 TV가 정보 전달의 가장 앞선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가 정보 전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항상 의문이 든다.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공정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용기가 있을까? 더 나아가 사람들은 그 정보들의 옥석을 가려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1958년에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던 저 문장은 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 TV든 핸드폰이든, 미디어를 실어 나르는 도구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또 많은 이들이 그런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도 그 도구는 바보상자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폭탄을 담은 상자처럼 느껴진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편견을 재배열하는 것뿐이면서 자신은 사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인 미디어가 가능해지면서, 그들 중 일부가 언론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은 편 가르기가 수월해졌다. 경제적으로 선을 긋던 세상이 이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선을 긋고 이쪽과 저쪽을 요구한다. ‘이쪽’은 ‘저쪽’과 대립하지 않는다. ‘이쪽이 아닌’ 모든 것을 배척한다. 내가 옳다, 우리가 옳다. 선 긋고 배척하기 놀음에 정치인과 기존 언론이 올라탄다. 타협과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도, 공정을 쫓아야 할 언론도 자신을 망각한 지 오래다.


"모든 사람은 경험의 포로다. 편견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편견을 거듭 인식할 뿐이다.“


간식을 달라고 그렇게 앵앵대던 고양이 녀석인데, 먹다 말고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난리가 났다. 커다란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와서 날아다니는 통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움직이는 걸 쫓는 게 고양이의 기본 습성이긴 하지. 창문을 열어놨다 해도 방충망은 닫혀 있는데 이 파리는 어디로 들어왔을까? 내 고민과는 별개로 고양이는 신났다. ‘내가 잡는다, 내가!’ 도망갈 때 빼고 저렇게 빠른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잠깐 기대했지만, 그것도 잠시. 한숨과 함께 파리약을 들고 나와서 뿌렸다. 버둥대는 파리의 최후를 함께 지켜보다가 휴지로 덮어놓은 후 창틀을 살핀다. 이 커다란 게 어디로 들어왔지? 창틀에 있는 빗물 구멍 하나가 열려있다. 내가 뭘 하건, 고양이는 휴지에 쌓인 파리가 더 궁금하다. 앞발을 들어 괜히 휴지를 두어 대 후려친다. 호기심 역시 고양이의 본능이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 귀엽기라도 하지.


2005년에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나잇앤굿럭>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는 소위 '빨갱이 색출'에 열을 올리던 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해서 매카시 의원의 마녀사냥에 맞선 언론인들의 모습을 그린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실존 인물이다. 그리고 이 글에 적은 인용문은 58년에 에드워드 R. 머로우가 했던 연설 중 일부이며, 영화 대사의 일부이다. 이 영화를 2006년에 봤다. 흐린 날이었고 우중충한 날이었다. 영화 내용은 20년 전이라 기억이 안 난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곧이어 머로우 역을 맡은 배우(David Strathaim)가 연단에 올랐다. 그가 입을 떼자, 그 서늘함이 모든 모호한 색깔들을 날려버렸다. 그리곤 난 웃었다. 틀려버린 모든 것을 들이박겠다는 그 꼬장꼬장함이 무척이나 그립다.


좋은 밤 보내시길, 그리고 여러분의 계좌에(주식이든, 코인이든, 지식이든, 양심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행운이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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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원 그 아저씨와 일본 여행을 계획 중이다. 겨울에 2박3일 정도로 나카센도 일부와 시라카와고에 가 볼 생각이다. 계획대로 가게 되면 네 번째 일본 방문이 될 듯. 하지만 일본말은 전혀 할 줄 모른다. 함께 가는 사람이 일상 대화 정도는 가능해서 전적으로 의지한 채 졸졸 쫓아다니는 분위기랄까. 게다가 난 모르는 사람과 대화하는 것도, 한국어 이외의 언어도 무서워한다. 그래도 이번엔 일본어 공부를 좀 해볼까 하는데... 이 고양이 녀석이 문제거든.


재작년 말.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영어 회화 공부를 시작했었다. 학원? 모르는 사람과 모르는 언어 천지일 텐데 내가 그런 곳에 갈 리 없다. AI를 이용한 영어 회화 앱! 잠깐 써보니 나 같은 사람이 회화 공부하기엔 더없이 좋았다. 그래서 1년 치를 한꺼번에 내고 하루 한두 시간씩 꾸준히 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뜻밖의 훼방꾼이 있었다. 회화라면 당연히 소리를 내야 하고 최소한 중얼중얼 이라도 해야 하는데 그때마다 고양이가 난리법석을 떨었다. 이리 뛰고, 저리 뛰고. 그러다 나를 보고 울고. 어렸을 때부터 유독 핸드폰에서 나는 소리에 민감하긴 했지만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처음엔 몇 개월 지나면 적응할 줄 알았다. 하지만 나도, 고양이도 적응에 실패했다. 영어 문장을 말하는 와중에 ‘야 이 개눔의 자슥, 그만 뛰어라! 정신 사납다!’ ‘야~~웅’ 같은 한국어와 고양이어가 수시로 뒤섞였고, 공부를 마칠 때쯤엔 영어와 고양이어에 기를 빨려 퀭해 있기 일쑤였다. 결국 집수리 일정까지 겹치면서 7개월 만에 도중하차. 그래서 결론은, 고양이도 나와 같이 영어 울렁증이 있구나, 정도. 이번 일본어 공부도 앱으로 하려고 하는데, 회화는 포기하고 글자만 알고 가야 하나? 어이, 고양이, 혹시 외국어는 다 싫어하니? 나도 그렇긴 해. 근데 너 한국어가 모국어니? 그건 아닐 거 아니야, 그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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