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는 우리를 가르칠 수 있습니다. 계몽하고 영감을 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려면, 우리가 그런 목적으로 사용해야 합니다. 그러지 않는 한 TV는 바보상자에 불과할 뿐입니다."


1958년엔 TV가 정보 전달의 가장 앞선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아니다. 유튜브를 비롯한 온갖 미디어가 정보 전달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항상 의문이 든다. 과연 그럴 자격이 있을까? 공정하며 그에 따른 책임을 질 용기가 있을까? 더 나아가 사람들은 그 정보들의 옥석을 가려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1958년에 누군가의 입에서 나왔던 저 문장은 이 시대와 맞지 않는다. TV든 핸드폰이든, 미디어를 실어 나르는 도구는 사람을 가르칠 수 있다. 또 많은 이들이 그런 목적으로 사용한다. 그런데도 그 도구는 바보상자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보다 더 심각한 폭탄을 담은 상자처럼 느껴진다.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은 자신들의 편견을 재배열하는 것뿐이면서 자신은 사고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1인 미디어가 가능해지면서, 그들 중 일부가 언론의 역할을 하면서 세상은 편 가르기가 수월해졌다. 경제적으로 선을 긋던 세상이 이젠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선을 긋고 이쪽과 저쪽을 요구한다. ‘이쪽’은 ‘저쪽’과 대립하지 않는다. ‘이쪽이 아닌’ 모든 것을 배척한다. 내가 옳다, 우리가 옳다. 선 긋고 배척하기 놀음에 정치인과 기존 언론이 올라탄다. 타협과 화합을 추구하는 정치도, 공정을 쫓아야 할 언론도 자신을 망각한 지 오래다.


"모든 사람은 경험의 포로다. 편견을 없앨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단지 편견을 거듭 인식할 뿐이다.“


간식을 달라고 그렇게 앵앵대던 고양이 녀석인데, 먹다 말고 이리 펄쩍 저리 펄쩍 난리가 났다. 커다란 파리 한 마리가 들어와서 날아다니는 통에 난리도 이런 난리가 없다. 움직이는 걸 쫓는 게 고양이의 기본 습성이긴 하지. 창문을 열어놨다 해도 방충망은 닫혀 있는데 이 파리는 어디로 들어왔을까? 내 고민과는 별개로 고양이는 신났다. ‘내가 잡는다, 내가!’ 도망갈 때 빼고 저렇게 빠른 걸 본 적이 없었는데. 잠깐 기대했지만, 그것도 잠시. 한숨과 함께 파리약을 들고 나와서 뿌렸다. 버둥대는 파리의 최후를 함께 지켜보다가 휴지로 덮어놓은 후 창틀을 살핀다. 이 커다란 게 어디로 들어왔지? 창틀에 있는 빗물 구멍 하나가 열려있다. 내가 뭘 하건, 고양이는 휴지에 쌓인 파리가 더 궁금하다. 앞발을 들어 괜히 휴지를 두어 대 후려친다. 호기심 역시 고양이의 본능이다. 본능에 따라 움직이면 귀엽기라도 하지.


2005년에 조지 클루니가 감독한 <굿나잇앤굿럭>이란 영화가 있다. 영화는 소위 '빨갱이 색출'에 열을 올리던 50년대 미국 사회를 배경으로 해서 매카시 의원의 마녀사냥에 맞선 언론인들의 모습을 그린다. 등장인물 대부분은 실존 인물이다. 그리고 이 글에 적은 인용문은 58년에 에드워드 R. 머로우가 했던 연설 중 일부이며, 영화 대사의 일부이다. 이 영화를 2006년에 봤다. 흐린 날이었고 우중충한 날이었다. 영화 내용은 20년 전이라 기억이 안 난다. 다만 한 가지는 확실히 기억한다. 영화가 시작하고 곧이어 머로우 역을 맡은 배우(David Strathaim)가 연단에 올랐다. 그가 입을 떼자, 그 서늘함이 모든 모호한 색깔들을 날려버렸다. 그리곤 난 웃었다. 틀려버린 모든 것을 들이박겠다는 그 꼬장꼬장함이 무척이나 그립다.


좋은 밤 보내시길, 그리고 여러분의 계좌에(주식이든, 코인이든, 지식이든, 양심이든 그것이 무엇이든 간에) 행운이 있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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