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性적 에너지일까, 정신 에너지일까
융
심리학으로
나를 성장시키는 '리비도' 알아보기
- 《융의 영혼의 지도》 도서 요약 3편
융 심리학 입문서 《융의 영혼의 지도》 도서 요약 3편은 무엇이 인간을 살아가게 하는가에 대한
내용입니다.
인간은 생각하기
때문에 살아가는 걸까요? 아니면 먹고 자고 싶은 욕구 때문에
살아가게 되는 것일까요? 이런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고자 하는
심리학 용어가 '리비도'인데요. 이번 도서 요약에선
'리비도'에 대한 융 심리학의 입장을 살펴보겠습니다.
지난 화에선
‘콤플렉스’와 ‘자아’에 대해서
다루었는데요.
아래 링크를 통해
보실 수 있습니다.
-
1화 자아
: http://goo.gl/m3epXv
-
2화 콤플렉스
: http://goo.gl/iZqYVq
프로이트의
아버지 쇼펜하우어와 리비도
이 내용은 《융의 영혼의 지도》에서 나오지 않는 내용이지만 알고 있으면
좋을 것 같아서 혹은 재미있을 것 같아서 간단히 소개합니다. 프로이트와 융 심리학에서 말하는 리비도라는
단어는 쇼펜하우어라는 철학자가 사용한 의지(Will, 사납고 집요한 생명력, 자발적 능동성, 오만한 욕구의 의지)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일부 철학서에선 쇼펜하우어를 프로이트의
아버지라고 말하기도 하구요.(윌 듀렌트의
《철학
이야기》를 참고하면
됩니다.)
프로이트는
쇼펜하우어의 의지 중 성 에너지를 강조하여 리비도라고 강조한 반면,
융은 리비도를 쇼펜하우어가 사용한 의지와 비슷하게 보려고 했다고
합니다.
아무튼 쇼펜하우어가 이 의지를 중시하게 된
역사적 배경도 다소 흥미로운 내용이 있어 소개하지 않을 수 없네요. 쇼펜하우어는 1788년부터 1860년까지 살았으며, 1819년에 그의 대표작인 《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를 발표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정말 단순하게
표현하면,
이성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욕구라는 의지가 사물을 통해 나타는 것을 표상의 세계라고 주장한 책입니다. 우리가 흔히 인용하는
10%의 의식과 90%의 무의식으로 표현하면
10%의 의식은 껍데기에
불과하며,
90%의 무의식이
세상을 만들고 있다 정도가 되겠네요. 그런데 무엇이 쇼펜하우어란 철학자로 하여금 90%
무의식,
즉 의지 영역을 주목하게 했을까요?
윌 듀렌트에 따르면 나폴레옹 때문이라고
합니다.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선 모르는 분이 없으실 겁니다. 왕권을 무너뜨리고 공화정을 세운
혁명이었죠.
당시 정권을 잡은
국민공회는 공포정치를 감행했다고 합니다. 왕족이나 왕권을 인정하는 사람도
숙청하고,
공화정에 따르지
않는 사람도 숙청했다고 하네요. 물론 사정이 있긴 했지만 여기선 자세히
다루지 않겠습니다.
어쨌든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통해 프랑스 국민을 공포정치로부터 구원하여 줍니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의
본래 정신을 실현시켜 줄 영웅 같은 존재였으나, 모든 사람들의 기대를 버리고 나폴레옹은
스스로 황제가 되어버립니다. 이 때문에 혁명의 정신은 무너지고 옛 봉건
귀족들이 되돌아왔으며, 사람들은 희망을 잃었다고
합니다.
지식인이든
일반인이든 이성을 가지고 이상적인 세상을 꿈꾸는 일에 지쳐버린 것이죠. 윌 듀렌트는 이런 시대 분위기가
쇼펜하우어로 하여금 이상보단 ‘의지’를 발견하게 했다고
합니다.
한 가지 재미있는 점은 이상보다 현실을
명료하게 설명하여 주는 쇼펜하우어의 철학은 의사, 변호사, 상인 등 중간계급의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고 하네요.
현실의 삶과
무의식에 집중한 철학의 탄생을 이렇게 보고나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듭니다. 현실의 삶에 집중하고 있을수록 이상적인 삶
혹은 이상적인 사회에 대한 열망은 멀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구요.
서론이 길었네요. 그럼 이제, 리비도에 대한 융 심리학의 입장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쇼펜하우어에 대해 윌 듀렌트가
《철학 이야기》에서 말한 내용은 아래 링크에서 추가적으로
보실 수 있습니다.
철학입문서로 가장
재미있고 좋은 책 중 하나이니 철학에 관심이 있다면 꼭 만나보시길 바랍니다.
- 나폴레옹 황제 즉위와
염세주의 철학자 쇼펜하우어
읽기 : http://goo.gl/QCWvoS
성性과
리비도
“인간
발달의 어떤 단계에서 집단적이고 개인적인 성性적
리비도는 현저(顯著,
뚜렷이
드러남)하고
근본적이지만,
다른
단계에서는 그러한 현저함과 근본성이 떨어지기도 한다.”
-
p. 96
《융의 영혼의 지도》의 저자 스타인 박사는 리비도를 욕망, 감정, 정신에 생명을 불어넣는 피라고
합니다.
자연과학의 말을
빌려 말하면 만유인력의 법칙과 같이 사물이 운동하는 법칙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고요. 심리학에선 이것을 영혼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고 하네요. 비록 프로이트가 리비도라는 현대 심리학
용어를 만들기는 했지만, 리비도라고 할 수 있는 감정이나 욕망에
대한 연구는 프로이트가 처음은 아니라고 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 이전부터 있었던
고민이었죠.
앞서 쇼펜하우어란 철학자의 이야기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쇼펜하우어는 인간의 근원적 동기부여자를 의지(Will)라고 생각했고 프로이트는 이것을 리비도라고 했습니다. 프로이트는 리비도를 사용하며 인간 본성에
감각적이고 쾌락을 추구하는 요소가 있다는 점을 강조했고, 영혼이란 본질적으로 성적 에너지와 다르지
않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프로이트는 성적 에너지가 어떻게 인간의
다양한 활동에 참여하는지를 연구했고, 신경증과 정신분열증 등 대부분의 심각한
정신병의 원인이 된다고 생각했다고 하는데요, 돈을 세거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것처럼
성적이지 않은 행동에도 성적 에너지가 관여한다고 보았다고 합니다.
하지만 융은 프로이트와 의견을
달리했죠.
융이 프로이트에게
반박하는 내용의 편지도 있다고 합니다.
“선생의
광범위한 견해에 대해서 제가 유보하는 것은 경험 부족 때문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심리적 경계 현상은 다른 기본적 추동인 고픔hunger,
이를테면
먹기,
젖
빨기(주로
배고픔),
키스하기(주로
성)
같은
갈망의 견지에서 더 적절히 고려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
윌리엄
맥과이어,
《프로이트와
융의 서신 교환》에서
이렇게 반박한 후에 프로이트에게 변명하는
것 같은 편지를 보냈다고 하네요.
“선생께서
아시다시피,
저는 항상
외부에서 내면으로,
그리고
전체에서 부분으로 나아갑니다.”
-
윌리엄
맥과이어,
《프로이트와
융의 서신 교환》에서
위 융의 편지를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든 걸 성적인
것으로 볼 수 없다고 딱 잘라서 말해버리고 있네요. 때로는 배고픔도 있고 다른 것도 있을 수
있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프로이트에게
죄송한 마음이 들었는지, 제가 연구하는 방법이 이러해서 그런 말을
하게 되었습니다는 느낌의 편지를 보내구요. ^^
‘선생님
말은 틀렸어요!
근데 제가
틀렸다고 말하는 이유는 제 생각이 선생님과 좀 달라서 그러니 이해해 주세요.(선생님
몰래 :
근데
선생님 말은 틀린 것 같아요.)’와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저만 느끼는 감정일까요.^^
《융의 영혼의 지도》의 저자 스타인 박사는 프로이트의 성적 리비도 이론은 순환논법이라면서 좀 더 쉽게 프로이트 이론의
허점을 밝혀줍니다.
순환논법은
A를 증명하려고 내세운
B라는 조건이 A가 없으면 성립되지 않는 경우를
뜻합니다.
스타인 박사의
인용을 빌려 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현실에 대한
집착은 성적 관심에 의해 생긴다. (증명하려는
A)
정신 장애는
성적 흥미를 잃어서 그렇다. (A를 증명하려는
조건 B)
그러므로 성적
관심은 현실에 대한 집착을 의미한다.(증명하려는
A와 같은
말)
음.. 가벼운 예를 들면 아래와
같을까요?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증명하려는
A)
우유는 젖소가 만든다.(A를 증명하려는
조건 B)
그러므로
젖소는 우유를 만든다.(증명하려는
A와 같은
말)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얼마나 이상한지
이해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이런 논리는 우리가 흔히
‘상식’이라고 말하는 조언을 마주할 때 품는
의문과 비슷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노력은 성공을 만든다’, ‘성공은 노력으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성공은
노력이다.’라는 상식을 들었을 때 어떤 분은 불쾌함을
느끼실 수도 있을 것입니다. 개인의 노력을 인정하지 않는 사회에서
노력이 성공이란 조언은 크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니까요.
아무튼 이런 점 때문에 융은 프로이트의
리비도 이론을 그대로 발전시키지 않고, 쇼펜하우어가 사용한 넒은 의미의
리비도,
즉
의지(Will)라는 정신 에너지를 리비도로 보게
됩니다.
여러분은 프로이트의
이론이 더 옳다고 생각하시나요? ^^
정신
에너지의 변화
“어떻게
단순한 본능의 한 표현인 강한 충동에 다른 방출(즉 배가
고파서 먹거나 성적 자극을 받아 교접하는 것)에서
문화적 표현과 노력(즉 고급
요리나 음악을 만드는 것)으로
변화되는가?
언제
이러한 활동들은 ‘본능적’이란 말이
주는 의미를 떠나 꽤 다른 의미와 의도를 갖게 되는가?
융은
《무의식의
심리학》에서,
이러한
에너지의 변형은 유비analogy(유추하고
비슷한 것을 비교)를
만들어내는 인간 마음의 타고난 능력 때문일 수 있다고 말한다.”
-
p. 97~98
모든 일이 그렇지만 남의 말에 딴지를
걸거나,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것만큼 쉬운 일은 없습니다. 정상적인 성인이라면 말에 책임을
져야겠죠.
프로이트의 의견에
반대한 이상 융에게도 자신의 의견을 증명할 책임이 부여되었습니다. 그리고 융은 리비도의
‘변화’를 증명하고자 합니다.
융은 인간의 모든 활동이 단순한 배고픔이나
성적 욕구에 의해 비롯한다고 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만약 인간이 단순한 욕구로만 움직인다면
배고픔을 해소하기 위해 고급 요리를 연구할 필요도 없을 것이니까요. 융은 정신
에너지에 뭔가 다른 것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바로
‘변화’를 시키는 힘이죠. 프로이트의 말대로 성적 에너지로 시작된
것이라도 은유적인 상상을 하고, 같은 행위를 비슷한 것으로 바꾸기도
하고,
상징을 만드는
인간의 행동은 때로 처음과는 전혀 다른 것을 만들기도 한다고 말이에요.
그런 의미에서 융은 정신 에너지를
‘변화’ 혹은 ‘성장’의 의미를 가지는 ‘의지’로 본 것이 아닌가
합니다.
아마도 여기서
프로이트와 융이 갈라서게 된 것 같습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만 프로이트와 융의
리비도에 대한 입장의 차이는 아래와 같은 느낌이 아닐까합니다.
프로이트의
리비도 : 현재
행동(혹은
정신이상)의 원인이
되는 성적 에너지
융의 리비도
:
모든 변화와
성장(혹은
정신이상)의 원인이
되는 의지
읽는 분에 따라 느끼는 차이가 다를 것
같습니다,
문예남에게는 아주
큰 차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면 프로이트의 이론이라면 지금 현재의
문제를 설명할 수는 있어도, 어떻게 앞으로 발전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긴
어려울 것 같아서입니다.
이런 입장의 차이 때문인지
《융의 영혼의 지도》 저자 스타인 박사는 융이 자신의 저작물의
제목에서 ‘리비도’라는 단어를 삭제해 버린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 볼 것을 독자에게 당부하기도 합니다.
“융이
《변화의
상징》
1952년
개정판에서는 이 어구를 삭제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리비도의
변화와 상징》은
《무의식의
심리학》으로
영역되었는데,
이
《리비도의
변화와 상징》은
《변화의
상징》으로
개정되었다.)”
-
p. 101
당시 심리학계를 대표하는 프로이트가 창안한
리비도라는 단어를 후발 학자가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큰 모험이 아니었을까란 생각이 듭니다. 칸트의 뜻을 이어가는
학자,
막스의 뜻을
이어가는 학자 등 학문은 앞선 학문을 이어가며 발전하기도 하니까요. 좀 거칠게 말하면 융은 자신의 족보를
잃어버릴 수도 있는 입장은 아니었을까 하네요.
아무튼 융은 리비도가 성적
욕망이나,
성적
집착이나,
성적 억압의
결과물이라고 보아서는 안 되며 쇼펜하우어가 말하는 ‘의지’에 가까운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삶의 전반부의 의지는 성장을 위한 것이고,
후반부의 의지는 죽음을 위한 것이라고 의지를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이 중 죽음을 위한 의지가 있다는 융의
의견은 프로이트보다 10년 정도 더 빨리 제시한 것이라고
하네요.
여기까지
리비도에 관한 역사적인 이야기와 프로이트와
융이 바라본 리비도의 차이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이 밖에 리비도의 퇴행과 전진에 대한 이야기 리비도와 희생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들이 더 있지만
여기선 간단하게 다루고 넘어가겠습니다. 리비도 즉, 의지가 퇴행하면 내적 분열이 생기거나
자신을 성찰하게 되고, 의지가 전진하는 경우 긍정적인 효과가
생긴다고 합니다.
여기에 내향적인
성격과 외향적인 성격이 만나 다양한 종류의 행동들이 나올 수 있다고도 하네요. 퇴행 + 내향, 퇴행 + 외향, 전진 + 내향, 전진 + 외향 등처럼 말이에요.
또한 융은 리비도에
관한 이론 중 ‘희생’이란 개념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했다고 합니다. 부모의 자녀를 위한
희생,
앞세대의 다음
세대를 위한 ‘희생’이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유지하는 것은
아닌가 하고 말이에요. 융의 관점에 따르면 ‘희생’ 또한 프로이트가 말한
‘성적 에너지’처럼 가장 근본적인 인간의 욕망이라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리비도는 융이 바라본 것처럼 ‘미래’를 꿈꾸고
있을까요?
^^
이상으로 《융의 영혼의 지도》를 참고한 ‘리비도’ 요약을 마무리 합니다. 다음 요약은 남녀의
차이,
창조력의 차이를
만드는 ‘아나마와 아니무스’에 관한 내용입니다. 관심이 있는 분은 다음 요약에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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