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며

지난 미리보기에서는 이야기가 왜 우리의 삶을 치유할 수 있는지, 그리고 왜 각자 자신만의 이야기를 가지고 인생을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한 원론적인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번 미리보기에서는 악마와 창의력의 관계를 소개하겠습니다.

1화 보실 분은 다음 링크를 타고 가세요. (링크 : http://goo.gl/1zQExc)​

2화를 읽고 나면 평생 내면의 악마와 싸워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싸우고 나면 마음이 홀가분해지고 더 나은 인생을 살 수 있다고 하니까요. 악마도 이기고 인생도 펴고 일타이피, 일거양득군요.^^

그럼 즐거운 독서가 되길 바랍니다.

*

이 책에 나오는 '신화'라는 단어는 '이야기'라는 단어로 바꿔서 읽어도 내용 이해에 무리는 없으며, 미리보기로 보여드리는 내용은 도서의 내용을 요약한 것임을 알려드립니다.

 

_문예남 올림


 

하나님은 악이 세상이라는 옷감 속에 엮인 채로 존재하도록 허락했다. 악을 이길 도덕적 능력을 입증하는 데 필요한 인간의 자유와 의지를 확대하기 위해서다.

영지주의 철학

 

 


 

 

갈등하는 악마가 

인생의 소중함을 알려준다

                                          

악마 신화와 현대인의 관계가 정말 놀랍다. 1장에서 우리는 1970년대에 진행된 연구를 인용했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은 감소하는데, 악마에 대한 믿음은 증가한다는 점이 연구에서 밝혀졌다.

이 현상은 우리에게 경종을 울린다. 많은 현대인이 삶에 환멸을 느끼고 동료를 불신하며, 무서울 정도로 미래를 불안해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 저명한 현대 작가들이 사탄을 주제로 쓴 책들을 자세히 보면, 그 자료가 우리를 압도할 정도다. 하버드대학교의 심리학자 헨리 머레이 교수의 <사탄의 성격과 경력>은 악마에 대한 탁월한 연구다. 머레이는 악마를 묘사하기 위해 처음으로 성경 구절을 언급했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구약성경 <이사야> 14:12~13]

 

그러고 나서 머레이는 오리게네스를 말한다.

 

교부(고위 성직자) 오리게네스는 <이사야>에서 말하는 왕이 사탄이라고 동료 신학자들을 설득했다. 땅 위의 왕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때부터 사탄은 자랑스러운 왕이 되었다. 사탄의 눈썹에 이렇게 쓰여 있다. '내가 지극히 높은 자와 같이 되리라!' 이로써 사탄은 올림포스 산에 올라가 제우스의 자리를 빼앗으려 한 거인들과 같은 부류에 들어갔다. 실패한 반항적인 등산가나 좌절한 독재자, 신을 죽이는 사람, 국왕 시해자 존속 살해자도 한 무리였다.

 

우리는 여기에서 악마 신화의 현실을 봐야 한다. 악마라는 개념을 구체화거나, 시공간 속에서 악마를 볼 필요는 없다. 악마는 우리에게 금지된 환상을 투사하기 좋은 피조물이라는 현실임을 봐야 한다. 그리고 여기에는 이상한 모순이 있다.

 

이 모순은 《파우스트》에서 잘 나타난다. 메피스토펠레스(악마)는 사탄의 대리자이지만, 파우스트를 유혹하는 과정에서 영혼을 팔지 말라고 설득한다. 또한 메피스토펠레스는 자신이 "하나님의 얼굴을 보고 천국의 영원한 기쁨을 맛볼" 기회를 잃고 얼마나 후회하는지 말한다. 결국, 신화(이야기)의 악마들은 갈등하는 존재들이며, 그들의 갈등은 지옥에서도 계속된다.

 

이런 이야기는 모고통이나 위기를 맞이한 사람의 위태로운 모습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신화에서 지옥의 땅을 탐험하거나 악마와 계약하는 이야기들을 보면 한 가지 분명하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다. 사람은 악마의 거처인 지하 세계, 즉 고통이나 위기의 순간을 방문해야 귀중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창의력의 원천, 

사사건건 부정만 하는 악마

                                           

악마(고통이나 위기)를 경험하면 삶의 귀중한 것을 배울 수 있다는 점에서 악마가 창의력에 꼭 필요하다는 것이 밝혀졌다. 도스토옙스키의 소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이반은 악마와 대화한다. 

 

"아니, 너는 나와 다른 사람이 아니다. 너는 나다. 너는 나일 뿐, 다른 누구도 아니다."

 

이반은 대답한다.

 

"너는 내 화신이다. 하지만 한 면만 닮았다. (...) 내 생각과 감정, 가장 추잡하고 미련한 생곽과 감정을 닮았지. 얼굴은 달라도 너는 나다. 너는 내 생각을 말할 뿐이야. 새로운 것을 이야기할 수 없지."

 

이것은 악마의 한 측면을 나타낸다. 독특한 것을 창조하는 것이 인간의 진정한 독창성이고 독창성을 부인하는 것이 악마라는 것이다. 하지만 악마가 없으면 창의력은 생기지 않는다. 악마는 부정하는 존재다. 인간의 경험을 부정하고, 하나님을 부정하고, 세상의 법칙을 부정한다. 이런 부정이 인간의 창의력에 역동성을 부여한다.

 

이런 면에서 시인 릴케가 딱 한 번 심리 치료를 받고 한 말이 옳다.

"내 악마들을 빼앗긴다면, 나는 내 천사들이 나는 것도 두려워할 것이다."

천사와 악마의 긴장 관계는 창조적 관정에서 꼭 필요하다. 악마가 없다면 창조가 아니라 침체만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악마와 투쟁한다. 그 사실을 부정할 수도 있지만 그것은 사이비 종교의 방식과 유사하다. 사이비 종교 추종자들은 일어날 일에 대한 모든 두려움을 지우고, 교주의 신념에 묵상하는 일에 집중한다. 사이비 종교 진단의 신도는 그들 마음의 문을 두드리는 아우성에 귀와 눈을 닫는다. 사이비 종교 집단의 집단 자살과 범죄가 일어나는 이유는 자신의 눈과 귀를 닫고 내면의 악마와 투쟁하는 대신 교주의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선택했기 때문이다. 선과 악의 갈등을 부인하는 모든 활동은 이런 문제를 일으킬 수밖에 없다.

 

창조적인 사람들은 영감과 악마 사이에서 긴장한다. 그 때문에 그들은 창조한다. 베토벤이 작곡할 때, 세잔이 그림을 그릴 때 그들은 독창성을 위해 치열하게 싸웠다.

 

자유와 도덕적 힘 그리고 창의성의 문제는 악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신화 《오디세이》에서 호메로스는 외친다.

"맙소사, 이제 사람이 신들을 비난하는 구나. 사람들은 악이 우리 신들에게서 나온다고 말한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죄 때문에, 운명 지어진 것보다 큰 고통을 받는다."

우리는 악의 얼굴, 악마의 얼굴을 똑바로 보기 거부할 수 있고 그럴 때 가장 큰 죄를 범한다.

 

 

악과 싸우며 느끼는 즐거움

                                          

모든 위대한 신화는 불안과 죄책감에 시달리는 독자와 후손에게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한다. 창조적인 일을 경험한 사람은 이런 사실을 안다.

 

《모비 딕》에서 악마의 화신 에이햅 선장이 죽을 때 우리는 위대한 종교적 체험을 했을 때처럼 감정이 정화되는 것을 느낀다. 그러나 카타르시스는 단순히 악마에 대한 '승리'나 악을 씻어버렸다는 느낌이 아니다. 이런 것들은 감상적인 생각이 될 뿐이다. 사람이 악마와 싸우면서 감정이 정화되는 것이 카타르시스다. 사람이 마음과 정신 속에 있는 비전을 표현하기 위해 반항하는 말로 싸우는 것이며, 악마와의 맹렬한 분쟁이 정화되는 경험이다.

 

(* 카타르시스 :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소위 감동이라고 말해지는 카타르시스는 감정의 배설을 의미합니다.  감정의 배설은 책이나 연극 등을 보고 마음에 있던 불안이나 우울함이 해소되어 마음이 정화되는 느낌을 받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 이후 어떤 교훈을 얻고 행동이나 사고의 변화를 일으키는 것도 의미하고 있습니다. 간단하게 말하면 말해주는 것을 직접 실천하게 될 정도의 큰 감동이 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악마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작가가 악마적인 존재와 싸우면서 배운 것이 있다는 말이다. 작가나 창의적인 사람들은 악을 만나지만, 그 악과의 싸움으로 우리를 즐겁고 아름답고 건강하게 하는 것을 만든다는 것도 사실이다. 사람은 결코 이 싸움을 끝낼 수 없다.

 

오이디푸스가 자기 눈을 뽑은 것도, 프로메테우스가 원시인에게 지식을 전해주며 고통받은 것도, 아테나가 《오레스테이아》에서 악마를 만난 것도, 소크라테스가 독미나리 즙을 마신 것도  그런 싸움이다.

 

여기 사탄이 있고 영혼의 필연적인 전쟁이 있다. 조지 버나드 쇼의 《성녀 조앤》에서 잔 다르크는 매달린 채 화형당하면서, 위대한 질문을 던진다.

 

"언제까지입니까? 오 주여, 언제까지입니까?"

 

이 외침은 사람들이 악마를 아는 한 영원히 들릴 것이다. 이 싸움에서 우리를 사람답게 하는 특성이 나온다. 이 깊은 곳에서 위대한 문학작품이 나온다. 이 전투는 우리가 인간인 이상 계속되며, 우리에게 가장 깊고 즐거운 경험을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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