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 권력, 지식인 - 김호기 사회비평집
김호기 지음 / 아르케 / 200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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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은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고 그 진행 및 결정 과정에 영향을 미칠 독자적인 견해를 꾸준히 제시하는 자이다. 김호기도 이런 지식인상에 걸맞게 참여적 글쓰기를 통하여 다양한 사회적 이슈들에 대한 나름의 의견을 개진하고 있다. 이번 저작은 그 결과물을 엮은 것이다.

김호기의 이번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제3부 '한국 지식인과 지식 사회의 구도'이다. 이는 2000년에 발간된 윤건차 교수의 『현대 한국의 사상 흐름』을 능가하는 의미 있는 시도라고 생각한다. 윤건차 교수가 다소 무리하다 할 정도로 학자들의 이념적 성향을 세분하기만 하여 사상적 지도를 그리는데 그쳤다면 김호기는 분류의 그물 망은 넓게 하면서도 -진보, 중도, 보수로 3분함- 분류의 근거를 이론적 배경부터 저자와의 사적인 관계 및 교유 범위까지 다양하게 제시하여 일반화할 수 있는 수준의 지형 구분을 시도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분류 대상 학자들의 주요 학문적 성과들까지 개괄적으로 소개하고 있어 이론의 섭렵 및 이를 통한 지적 호기심 충족까지 가능케 해주는 미덕도 발휘하고 있다.

그러나 김호기의 이번 저작에서는 몇 가지 문제점도 눈에 띈다. 결정적으로 내용의 다양성에 비해 주제의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비판 사회 이론과 시사 칼럼을 모은 1,2부와 지식인의 이념적 구도와 그들의 저작에 대한 논평 및 관련 대가(大家)와의 인터뷰를 묶은 3,4,5부가 겉돌고 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시사 평론집도 아니고 학술 논문집도 아닌 그저 그런 개인 문집에 지나지 않는 감이 든다. 지식인으로서 다양한 분야에 대한 관심 표명과 이에 대한 의견 개진이라는 점에서는 이해가 되나 한 권의 책으로 엮기에는 연관성이 떨어지는 산발적이고 단편적인 주제의 글들을 병렬하고 있어 명료하게 초점이 모아지는 완성도 있는 저작이라 판단하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또 하나는 대중적 글쓰기를 의식해서인지 개념에 대한 명확한 규정 없이 안이하게 접근하고 있는 부분이 더러 보인다는 점이다. 이를테면 문명의 개념에 관한 것 등에서 말이다. 너무 모호하고 의미 없게 언어적 표현에만 치중한 느낌이 들게 개념 규정을 하고 그 뒤에는 그 개념에서 비롯된 거대 담론을 당연한 듯 풀어나가고 있어 주객이 전도된 감이 든다는 것이다. 이는 글의 품격에 심각한 문제가 될 수 있는 부분이다.

따라서 시사 논평은 따로 독립된 책으로 묶고 이번에는 제3부에서 제5부까지 만을 떼어 지식인의 이념적 구도를 나누어보는 시도로 한정했더라면 일관성 있고 품격 있는 유의미한 저작이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경우 제3부의 5장 '제3세대 지식인 대망론'을 결론으로 배치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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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놉티콘- 정보사회 정보감옥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63
홍성욱 지음 / 책세상 / 200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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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제레미 벤담이 제안한 원형 감옥인 파놉티콘(Panopticon)을 권력의 감시를 죄수가 내면화하게 됨에 따라 실제적 감시 없이도 그의 영혼까지 규율할 수 있는 자동 기계로 보았다. 간수만이 죄수의 일거수 일투족을 관찰할 수 있는 시선의 비대칭성에서 착안된 파놉티콘이 죄수들에게 늘 감시당하고 모든 행태가 노출되고 있다는 의식을 스스로 받아들이게 하여 규율에 순응하게 만드는 장치로 기능 한다는 것이다.

비록 벤담이 제기한 파놉티콘은 실현되지 않고 의미도 퇴색되어 버렸지만 푸코에 의해 부활하여 다시금 생명력을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현대의 정보 사회가 다양한 감시 통제 방법으로 개인의-죄수가 아닌 일반인들까지도 포함하여- 정보를 부당하게 수집하고 프라이버시를 침해하는 상황, 곧 정보 감옥으로 화하고 있는 부정적인 측면에 대한 문제 제기가 이루어지면서 파놉티콘에 대한 논의가 재점화 되고 있다. 조지 오웰의 <1984년>의 감시자 빅 브라더를 연상하면서 말이다.

홍성욱은 여기서 파놉티콘에 근거한 정보화 사회의 역기능적 측면에만 비관적으로 매몰되지 않고 전자 매체가 지닌 새로운 가능성에 주목하여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고 있다. 즉 전자 정보 매체가 시민을 감시하고 통제하는 효율적인 수단이기도 하지만 또한 역으로 시민 사회 측에서 감시 주체들을 역감시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특히 인터넷의 쌍방향성이 그 가능성을 더해주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홍성욱은 이러한 가능성을 바탕으로 감시의 시선과 역감시의 저항적 눈길이 상호 작용을 일으키는 시놉티콘(Synopticon)에 주목하고 있다. 시민 운동 단체들의 다양한 역감시 사례들이 이미 그 가능성을 열어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감시의 시선에 비해 역감시의 수단은 법적, 기술적 제약에 의해 아직 미약하기 그지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러므로 시놉티콘이 이루어져 빅 브라더를 역감시할 수 있으려면 시민 사회의 역량이 더욱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측면과 관련하여 시놉티콘의 성패는 사회 세력들 사이의 상호 작용과 역학 관계에 달려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따라서 역감시를 주도할 시민 운동 단체의 활성화와 이를 뒷받침할 시민 의식의 성숙 및 시민 운동의 합법적 보장을 위한 제도화 노력이 요구되고 있다고 보고 있는 것이다. 홍성욱은 구체적으로 NGO들의 권력, 기업 및 언론 등에 대한 감시와 정보 독점 통제 반대 운동 전개 등과 더불어 프라이버시법 제정과 정보 공개권의 확대 요구 등이 파놉티콘을 역감시의 기제로 무력화시키고 시놉티콘을 실현할 수 있으리라 믿고있다.

이처럼 정보 사회에서의 정보 통제와 프라이버시 침해 등을 우려하여 비관적인 정보 감옥만을 연상하고 있는 우리의 암울한 시선을 오히려 역감시를 통한 주권 확보의 기회로 파악하여 시놉티콘의 가능성을 제기한 홍성욱의 탁월한 안목에 경탄하지 않을 수 없다. 아울러 그가 권고한 역감시 주체들의 세력 결집과 그들의 체계적인 운동 필요성에도 공감하며 가능한한 동참하리라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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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오지 - 이문재 시집
이문재 / 문학동네 / 199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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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나 노르베리 호지는 『오래된 미래』에서 산업 사회의 때가 아직 묻지 않은 라다크인들의 삶의 방식을 참여 관찰의 형식으로 보고하고 있는데 거기서 그리고 있는 것이 주종 산업으로서의 농업의 소중함과 이를 영위하는 가운데 나타나는 아름다운 공동체적 생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농업 공동체적 삶은 과거 오랜 기간 동안 지속되었던 보편적 생활 양식인데 이것이 작금의 인류가 안고 있는 구조적 모순을 해결하고 바람직한 미래를 구성해 나가는 지향점이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문재의 시집『마음의 오지』는 이러한 『오래된 미래』에서 지향하고 있는 생각을 감성적 측면에서 잘 승화시킨 명편들을 모은 시집이다. 일독을 권한다.

마음의 오지란 무엇일까? 이문재의 시를 읽다 보면 그것은 결국 물질적 삶의 편의만을 추구하는 산업 사회의 틀을 벗어난 불편하면서도 인간의 본연을 오롯이 지니고 있는 상태를 가리킴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오지로 우리의 의식과 감성을 내몰아 이 얼룩진 시대 - 이문재 식으로 말하자면 되새떼가 창궐하고 왜가리가 횡행하는, 자본주의적 집착에 얽매어 있는 우리의 자화상 - 의 대안을 모색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 오지의 표상이 곧 농업이라는 산업과 농경 공동체적 사고 방식임을 이문재도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이미 박물관 신세를 지며 과거를 추억하는 도구로 전락해 버린 지 오래다. 하지만 농업 공동체적 심성을 우리의 현실적 삶에서 재현, 강화시킬 수 있는 여지는 있을 것이다. 이문재는 그 방식을 길거리에 떨어져 나부끼는 낙엽을 보도 블록을 들추고 넣어주면서 장례를 생각한다든지 또 알몸으로 자연의 기운을 느끼며 바위에 누워 있는다든지 작은 자연의 변화에도 들떠 노래하는 등으로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모습과 생각들이 미미하지만 메마른 자본주의적 삶에 훈훈한 온기를 불어넣어 주고 우리의 어지러운 삶의 실마리를 제대로 된 결로 되살려 놓을 수 있는 한 계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정 오래된 미래인 농업 공동체적 삶의 모습과 그러한 의식과 과학적 지향을 감성적으로 그리고 있으며 이런 생활 양식의 내면화에 동참하라고 설득하고 있는 이문재의 빼어난 시집 『마음의 오지』를 읽으며 잔잔한 기쁨, 마음의 평안을 누려 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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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수 시에 붙인 노래들 - 백창우 아저씨네 노래창고
백창우 엮음, 굴렁쇠아이들 노래 / 보림 / 199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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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아 로버츠가 주연한 영화 <에린 브로코비치>를 보면 변호사 사무실 직원인 에린 브로코비치가 폐수를 무단 방류하여 인근 지역 주민들에게 암 질환을 유발한 메이저 석유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벌여 승리하는 내용이 나온다.

이 영화의 주인공 에린 브로코비치는 그야말로 불운과 역경의 연속인 최악의 상황을 딛고 잡초와 같은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며 이를 이겨낸 인물이다. 미천한 출신에다 전문 자격증도 보유하고 있지 못한 그에 대한 주변의 편견과 질시, 계속되는 남자 친구와의 이별에 따른 정신적 동요, 맡아서 기르고 두 아이의 양육비도 감당하기 어려운 경제적 궁핍 등 한 여자가 극복하기에는 너무도 힘겨운 환경에서 시작한 변호사 보조 업무이었지만 에린은 이를 특유의 성실함과 냉정한 분석력 및 상대방과의 정서적 교감을 통한 업무 처리 등을 통하여 훌륭히 수행해 나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결과를 이루어내며 입지에 성공한다. 그야말로 척박한 땅에서 피어난 한 송이 아름다운 꽃과 같이 말이다.

이원수의 동시에 곡을 붙인 백창우의 동요집에 들어있는 <해바라기>를 들으며 나는 에린 브로코비치를 떠올렸다. 갓났을 때부터 울타리 밖에 버림받아 서 있었던 해바라기, 누나도 할아버지도 거들떠보기는커녕 뽑아버리려 했던 해바라기, 하지만 이렇게 외롭게 자라난 해바라기가 결국은 아름답고 큰 꽃을 피워 꽃밭의 다른 꽃들이 시들어져 가는 때에도 웃는 얼굴로 해님을 바라보며 꽃밭을 지키게 될 줄이야.

노랫말에 나오는 이 아름답고 장엄한 해바라기의 피어남은 백창우의 빼어난 곡에 의해 너무나도 극적이고 실감나게 살아나고 있다. 처음 도입 부분의 처량한 해바라기의 모습을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애잔한 곡으로 숙연하게 하더니 역경을 딛고 피어나는 부분에서는 곡이 밝고 웅장하게 반전되어 화려하게 피어나는 모습이 눈에 선하게 그려지도록 만들고 있다. 절로 감정이입이 이루어지게 말이다.

동요집에 들어있는 다른 곡도 대부분 동시의 결에 자연스럽게 어울리도록 붙여져 있다. 의미 심장한 시에는 장중한 곡이, 재미있는 노랫말에는 흥겹고 다양한 악기 구성을 통한 흥미진진함이 배어 있다. 그야말로 동시에 동화된 그리하여 시와 곡이 일체가 되어 우리의 마음결을 은은하게 인도하는 노래로 살려내고 있다.

<해바라기>를 비롯한 백창우의 동요집에 들어있는 곡들은 하나같이 우리 아이들, -아니 어른들에게 더 적합하리라. 특히 메말라지기 쉬운 신경질적인 운전자들에게 권하고 싶다- 의 심성을 아름답고 윤택하게 해 주는 노래들이다. 또 아름다움 자체를 생각하게 해 주는 곡들이다. 그리하여 우리의 일그러진 심성과 의식이 한 모금 싸아한 공기처럼, 깊은 계곡의 청정한 자연수처럼 들이키고 싶어지게 하는 곡들이다. 저질 가요와 국적 불명의 노래로 오염되어 있는 우리 아이들의 심성을 정화해 줄 맑고 향기로운 그의 노래들이 많이 불리어 지게 되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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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의 노래 (1.2권 합본) - 우리 소설로의 초대 4 (양장본)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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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신히 씌어진 글을 겨우겨우 읽습니다. 김훈이 이빨 여덟 개가 빠지도록 혼신을 다한 연후에 간신히 그려낼 정도로 불가해하고 다층적이며 도도했던 이순신의 내면, 그 내면을 육화된 휘모리 장단으로 고스란히 살려낸 빼어난 문장, 그 문장에 녹아있는, 죽처럼 흘러내려 우리를 목 매이게 하는 인간적이면서도 스산한 그의 시선.

이를 어찌 한 호흡에 성큼성큼 읽어치우고 말 수 있겠습니까? 최소한의 인간적인 떨림이나 가다듬음으로도 가당찮은 일입니다. 그야말로 겨우겨우 읽어낼 따름입니다. 때론 결기가 치솟아 부르르 떨고 때론 연민으로 미어지면서 말입니다.

이순신의 시대는 봉건적 질곡의 한 정점에 닿아있던 때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사회 구조의 모순만 그러했던 게 아닙니다. 그 시대를 농단했던 인적 구성들의 의식 세계가 전근대적이기 이를 데 없습니다. 그 동토의 왕국을 다스렸던 임금이라는 작자는 미성숙한 인격에다가 조울증까지 곁들인 치기 어린 시샘의 대가였습니다. 영웅은 자기 혼자여야 하고 칭송은 독점적으로 향유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강박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김덕령에게, 곽재우에게, 이황에게 또 이순신에게 끊임없이 열등감과 권력 상실 피해 의식을 느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 왕 앞에서 의식 있는 이들이 택할 수 있는 길은 오직 두 갈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 하나는 홍의 장군 곽재우가 나아갔던 절연과 초월의 방식이고 다른 하나는 이순신 식의 자멸의 길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무사는 백성의 고통스런 현실을 외면할 수 없는 것입니다.

또 백성들을 지켜주지 못했다는 자괴감과 이제는 어루만져 주어야 한다는 책무감으로 선택의 여지가 없을 것입니다. 따라서 절연과 초월의 길을 택할 엄두를 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리하여 이순신은 절망의 길로 스스로를 소멸시켜 가는 자학적인 방법으로 나아갔던 것입니다.

그런 이순신이었기에 우리는 역사와 신화 속에 등장하는 스테레오 타입화한 영웅의 모습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흔들리고 무너지고 상처받는 나약한 인간으로서, 다른 이들에게 보호 본능을 유발하는 그리하여 연민의 시선이 절로 가 닿게되는 한 범인(凡人)을 만나게 됩니다. 정형화된 영웅의 드라마틱한 활약상이나 초월적 심성, 전능한 역량은 다만 허상이요 후대 호사가들의 의미부여 놀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에게 실제로 닥친 시대는 아픔뿐이었고 시절은 언제나 추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늘 불안했고 결핍한 상태로 쫓겨다녀야 했습니다. 통증을 느끼고 오한에 떠는 한 개별적 인간의 나약한 실존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우리와 같은 수준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지닌 한 인간으로서의 이순신을 재삼 생각하게 됩니다. 이를 악물고 무서움을 참아내며 고통을 버텨내고 울음을 삼키는, 그리하여 인간의 피가 도는 따뜻한 실존으로서의 그를 말입니다. 왜소한 인간일 수밖에 없는 가여운 단독자가 거기 쓸쓸하게 서 있는 것입니다. 이로써 그와 우리는 상호 연민의 시선으로 더 나아가 연대감으로 일체가 될 수도 있는 수준으로 다가서게 됩니다. 누구나 그러하듯이 이순신도 이처럼 하나의 인간으로 외따로이 태어나서 홀로 애쓰다가 그 만의 고통 속에 자신의 몸 속으로 죽음을 받아들이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이순신과 그 시대의 이름 없는 백성들, 또 적군인 왜병들, 아니 그런 인간의 운명 앞에 자유로울 수 없는 모든 나약한 실존들 앞에 우리는 동병상련의 마음으로 경건히 머리 숙일 수밖에 없게 됩니다. 그들 하나 하나의 삶이 익명화된 집단의 논리로 설명되기에는 너무나 벅차고 의미 있고 장(壯)한 생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김훈은 개별적 실존으로서의 이순신의 모습을 통해 우리에게 모든 인간의 저마다의 삶이 비할 데 없이 중차대한 것임을 인간의 호흡으로 우리의 사고 수준으로 일깨워주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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