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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의 미래와 생태학적 세계관
박이문 지음 / 당대 / 1997년 10월
평점 :
절판
사물이나 현상에 대한 구조적 접근을 통한 대상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한 근본적 문제 해결 방법을 제시하는 거대 담론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박이문의 글은 선뜻 와 닿지 않는다. 박이문의 논리 전개 과정이나 글의 구성은 대륙의 합리론을 바탕으로 한치의 비약도 없이 서서히 내적 논리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결론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런데 기껏 도달했다는 결론은 한 차원 높은 숭고한 것이 아닌 논의 과정에서 이미 충분히 검토되었고 따라서 당연히 예견되어지던 수준에서 귀결되고 있는 것이다.
동양적 직관이나 서양적 방법론에서도 구조 결정론적 접근에 길들어있는 우리의 사고 구조로는 너무나 싱거운 결론인 것이다. 오로지 끈질기게 분석 철학의 기조를 견지하며 따분하고 힘겹게 논리를 엮어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우리가 당연시하며 거의 동질적으로 인식하고 있는 환경, 생태계 및 자연의 개념 범주를 엄밀히 구분하는 데에도 지나치다 싶을 정도의 집착을 보이고 있다. 박이문은 '철학적 탐색의 대상은 현상이나 사실이 아니라 신념을 표상하는 언어와 주장을 구성하는 명제간의 논리적 관계로 그 범위가 제한되며 그러한 것들을 탐색하는 작업은 분석적이게 마련이다.'고 하며 개념의 투명성 확보에 헌신하고 있고 그런 바탕 위에서만 아주 조금씩의 발걸음을 내딛고 있는 것이다.
이런 형식 논리의 바탕 위에서 박이문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는 생태중심적 세계관으로의 전환이다. 이것은 그간의 세계관에 대한 반성에서 비롯되고 있다. 인간과 자연을 차원을 달리하는 별개로 보는 2원론적 형이상학과 인간 중심적 가치관으로 규정할 수 있는 서양적 세계관인 기존의 틀로서는 인류의 미래가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세계관의 전환은 인류의 생존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관의 선택이 왜 중요한가 하는 것은 우리가 파악하는 것은 세계나 우주 자체가 아니고 어떤 대상에 대한 인식적 틀이나 양식, 패러다임에 따른 표상이므로 눈의 구조나 안경에 비유할 수 있는 인식적 틀이나 패러다임에 그것의 의미가 좌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어떤 세계관을 지니는 가에 따라서 인식과 실천이 달라질 것이므로 그 선택이 앞으로의 인류의 미래와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박이문이 말하는 생태주의적 세계관은 우선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자연중심주의로 시각 전환을 의미하며 과학적 이성에서 미학적 감성으로의 지향 변화이며 개인주의적이고 배타적인 심성에서 공동체 중심적이고 관용적인 심성으로의 이동이고 대상 중심에서 가치 중심으로 소유와 쾌락 중심에서 관조와 내면적 체험을 중시하는 가치관으로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이러한 근본적인 방향 전환이 이루어질 때 세계사의 물결이 위험한 방향으로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박이문은 이러한 변화에 우리 나라의 지성이 기여할 바가 크다고 여기고 있다. 자연중심적인 일원론적, 형이상학적 비전을 깔고 있다는 것을 인정할 때 동양의 전통 사상은 생태학적 세계관의 모델이 될 수 있으며 동양의 오랜 전통에 뿌리박고 있으면서 서양의 근대 사상과 과학 기술을 짧은 시간에 소화할 수 있었던 나라 가운데 하나인 한국은 생태학적 세계관을 정리하고 생태학적 문화를 창조하는데 앞장설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박이문의 진단대로 한국 지성들에 의하여 이러한 인류사의 근본적인 변혁이 주도되고 그에서 비롯된 바람직한 성과물들이 많이 축적되어 인류의 미래가 바람직하게 구성되어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