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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마리암을 대신 살고 있는 사랑하는 나의 딸 라일라에게
라일라, 너는 언제나 그렇듯 너무 착하고 사랑스러운 아이로구나. 여기 하늘나라 내 옆에 있는 엄마에게는 소련군 점령 시절 무자히딘 전사로 지하드에 참여했다 순교한 두 오빠, 아마드와 누르의 대역으로 위안을 주더니 이젠 네 남편 라시드의 첫 번째 부인 마리암이 못다 이룬 삶을 마무리하는 역할을 자임하고 있다니.
네가 마리암의 아빠 잘릴의 편지를 읽는 걸 보고 기분이 참 묘했다. 편지도 잘릴의 유품 가운데 하나였지. 마리암이 그렇게도 보고 싶어 했으나 냉정하게 거절했던 게 마음에 걸렸던지 피노키오 만화영화 테이프를 넣었더군. 그리고 살아 있을 때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던 마리암 몫의 돈도 함께 들어 있었지. 그 편지를 네가 읽어 나갈 때 여러 갈레 생각이 교차되었단다. 우리 딸이 이뻐 보이기도 했지만 솔직히 샘이 더 많이 났음을 고백할게. 그리고 아빠가 네게 뚜렷이 남겨준 게 없구나 하는 자책도 밀려왔지. 편지 속에서 잘릴은 딸이 좀더 관대했으면 하는 희망을 피력하고 자신이 주지 못했던 행복과 평화와 사랑을 마리암은 찾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기원했을 때 가슴이 먹먹해져 한동안 어찌 할 줄 몰랐단다. 아빠도 같은 심정이었거든. 그래서 천국에 있는 아빠도 우리 딸을 축복하는 마음을 듬뿍 담아 너에게 전해질는지 모를 편지를 이렇게 쓰고 있는 거란다. 아마 똑똑하고 마음결 잘 헤아리는 딸이기에 아빠의 심경도 자연스레 읽을 수 있으리라 믿는다. 그리고 난 네 속에 영원히 살아 있으니까 충분히 가능할거야.
라일라, 너를 낳았을 때 엄마와 난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단다. 앙증맞은 너를 보며 세상 온갖 시름을 잊곤 했지. 자랄수록 너는 어깨까지 내려오는 금발머리에 짙은 속눈썹, 청록색을 띤 눈, 보조개, 높은 광대뼈에다 샐쭉거리는 입술까지 어찌 그리 이뻤던지. 그리고 머리는 또 얼마나 좋았고. 해마다 각 학년 최우수 학생에게 수여하는 아왈 누므라 상을 도맡아 받곤 했었지. 그러나 한편으론 늘상 무거운 것에 가위 눌린 듯 이만저만 걱정이 아니었단다. 아빠와 우리 아프간이 처한 현실이 딸로 태어난 너를 얼마나 힘겹게 할는지 눈에 선하게 그려졌기 때문이었어.
그런데 내 딸아, 원래 우리 아프간은 그런 나라가 아니었다. 아니 어쩜 지금도 그런 나라가 아닐게고. 이런 살풍경은 우리의 모습이 단연코 아냐. 장미와 튤립으로 가득한 눈부시게 아름다운 곳이지. 하늘의 천사들도 그곳의 푸른 초원을 부러운 눈으로 내려다보곤 했단다. 그러니 도시의 지붕 위에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달들이 반짝이고 벽 뒤에는 천 개의 찬란한 태양들이 숨어 있다고 17세기 페르시아 시인 사이브에타브리지는 노래했던 거야. 아프간은 이렇게 천 개의 찬란한 태양이 비치는 밝고 아름다운 나라야. 다만 그 햇빛이 벽 뒤에 가려져 있을 뿐이지. 그런데 사람들은 그 너머에 비치고 있는 셀 수 없을 정도의 태양은 보지 못하고 암울한 이쪽만 응시하고 있단다. 그러니 아프간은 사악한 나라가 되고 만거야.
특히 작년에 칸다하르 도상에서 선교팀이 피랍되어 애를 끓이던 한국이라는 나라 사람들은 더욱 심한 편견을 갖고 있을거야. 악마가 우글거리는 지옥이 따로 없다고 여기겠지. 그런데 그 나라 사람들은 진실을 제대로 바라보는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더라. 아니 어쩜 빤하게 보이는 일까지 불편해 하더라고. 1992년인가 미국 LA에서 흑인 폭동이 일어났던 일을 아빠가 말해줬었니? 유색인종으로 소외받던 자들의 울분이 용출되던 그 때, 많은 흑인들이 분풀이 대상으로 왜 한인 상점을 택했는지, 그렇게 어이없는 약탈을 감행했는지 그들은 아마 잘 몰랐을거다. 같은 유색인종으로 주류 사회 구성원이 아닌 처진데도 말이야. 그때 보니 그들은 백인들보다 오히려 더 심하더라. 와스프(WASP)의 우월 의식을 완전 자기 것인 양 내면화하고 있더구나. 그러니 공분의 표적이 될밖에. 아직도 많은 한국인들은 아프간을 무자비한 야만인들이 사는 미개한 나라로 여겨 그들을 계몽한다는 명목으로 선교팀을 시혜하듯이 파견하고 있지. 아마 이런 생각은 탈레반과 알 카에다에 대해 알려지며 더욱 공고하게 굳어진 것 같아. 오사마 빈 라덴의 알 카에다가 9.11테러를 미국 심장부에서 자행하고 세계문화유산인 바미안 석불을 흔적도 없이 폭파했으며 여성들에겐 교육과 취업 기회를 봉쇄한 것 등이 공개되고 난 다음 말이야. 그런데 실은 이런 것들이 아프간 민중과는 아무 상관없는 일인데.
그러나 예외적인 경우도 있더구나. 황석영이란 작가가 있는데 한국인 바리와 파키스탄 출신 무슬림 압둘의 아름다운 연대를 담고 있는 <바리데기>란 소설을 썼거든. 그는 오히려 약자를 배제하고 전지구적 문제를 야기한 장본인이 미국을 위시한 서구 주류 사회라 보고 그들 행위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더라. 문제의 이면, 그 가려진 실상을 조목조목 시원하게 짚어 내더라고. 세상의 진실과 정의는 늘 일방적인 논리로 강변되기 일쑤임을 보여준거지. 그 작품에서 황석영은 지배적 담론을 형성하고 있는 사회적 강자들과 늘 억눌려 있던 뭇 약자들, 그들의 공존이 절실히 요구되는 상황임을 상기시키더니만 이렇게 요원한 일을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바리와 압둘이 더불어 나아가는 모습을 제시하고 있더구나. 선의의 인간들이 맺는 인연의 연쇄가 전지구적 차원의 문명 공존을 이루는 작은 출발점이자 중요한 연결 고리가 될 것이라고 보았기 때문일거야. 그 작가가 쓴 <장길산>이라는 소설에 나오는‘장산곶 매’설화는 바로 라시드의 죽음 이야기에 다름 아닌 것 같더라. 너를 독점하려는 생각에만 휘둘려 오히려 너를 해하려했던 그가 바로 장산곶 매를 자기 마을에서만 오롯이 차지하기 위해 발목에 매듭을 묶어두었던 사람들과 마찬가지라는 말이야. 그런 집착은 결국 매를 죽음으로 몰아가고 말았지. 매듭이 나뭇가지에 걸리고 말았거든. 너는 마리암 때문에 간신히 살아났었지. 단번에 그 한국인 작가에게 빨려들겠더라.
라일라, 우리 아프간의 아름다운 곳을 비록 많이는 아니지만 몇 군데 가보았지. 아빠와 함께 갔던 석불 여행 기억나니? 그 때 타리크도 동행했던가. 아마 백 살까지 산대도 그렇게 장엄한 것은 다시 못 볼 절경이었지. 절벽에 조각된 불상이 마치 2천 년 전 실크로드 대상을 내려다보듯 우리를 보고 있지 않았니. 불상의 머리 위쪽에 올라가 바라본 바미안 계곡의 풍요로운 장관은 또 어땠고. 이렇게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가 꽃피었던 곳이야. 앞서 얘기했던 황석영이란 작가가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와 썼던 수기 제목이 아마 <사람이 살고 있었네>일거야. 뿔 달린 빨간 괴물들이 살고 있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북한 사람들도 고결한 것을 흠모하며 나름대로 정겹게 살아가는 모습에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지. 황석영 작가가 아프간에 와 보았다면 아마 같은 제목의 글을 썼을걸.
하지만 세월의 질곡은 우리 아프간을 피해가지 않았지. 그 와중에서 라일라 네 삶도 힘들었겠지만 지금 네가 그렇게 애틋해하고 하나가 되었으면 생각하는 마리암있지, 그녀의 신산한 삶을 생각해봐. 마리암은 마치 잘릴의 집 방에 놓여있던 마트료슈카 인형처럼 겹겹이 중첩된 사슬에 얽매어 있었잖아. 우선 세상이 악마로 여기는 무슬림에다가 남자의 부속물로 취급되는 하등한 존재 여자, 아프간에서 여자는 천형을 타고난 존재였지. 특히 탈레반 치하에서는 너무나 혹심하게 다루어져 도무지 인간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였잖아. 부르카를 입고 남자가 동반해야만 외출할 수 있었고 병원 진료도 제대로 받지 못했으며 교육과 취업 기회를 완전히 박탈당했지. 그들은 신이 여자를 남자와 다르게 창조하여 뇌부터 차이가 나므로 여자는 남자처럼 사고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강변했어. 또 서얼 하라미로 잘릴의 정부인과 적자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했잖아. 그런 몇 겹의 질곡에 시달리던 잡초같은 존재였어. 그런 와중에 소련의 침공으로 공산화가 되고 또 무자히딘 전사들의 약탈과 살육을 고스란히 지켜보았으며 탈레반의 학정까지 겪었으니 그 고달픈 삶은 더 말해 무엇하겠니. 그런데 그녀는 하나의 전쟁을 더 치러야 했어. 바로 라시드와의 그것이지. 폭력적인 가부장으로 지배자의 상징이었던 그. 뭇사람들의 싸움의 와중에서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을 너무나 많이 봐 와서 폭력에 익숙해있던 마리암이었지만 라시드에게 당했던 것은 인내의 한계를 넘어섰다 해야 할거야. 인간의 몸이 어떻게 그런 악의적이고 규칙적으로 가하는 폭력을 견디고 계속 기능을 할 수 있을까 의문이 들 정도였지. 그리하여 마리암에게는 내리는 눈송이 하나하나가 고통 받고 있는 여자들의 한숨처럼 보였던 것일 거야.
그런데 이상하지. 아니야 정말 대단하지. 그런 중첩된 폭압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고 발랄하게 나름의 주장을 펼쳐왔다는 게 말이야.
그런 마리암과 너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존재인 태양처럼 우정을 나누었지. 물론 처음엔 서로의 마음 문을 닫은 채 모욕을 주기도 했고. 그래서 약간 걱정도 했단다. 마리암과 너를 이어준 건 의외로 아지자였지. 영특한 아이. 자면서 방귀를 뀌는 모습에 서로 쳐다보며 눈물이 나도록 웃다가 자연스레 격의 없이 흉허물을 터놓는 걸 보고 아빠는 마음을 놓았단다. 그런 아지자를 고아원에 맡기고 둘이서 뒤돌아 나오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짠해 진단다. 뒤에서 공포에 질린 비명 소리가 들렸을 때 목구멍으로 올라오는 울음을 참으며 함께 통로를 달려가는 모습을 보고 나도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다. 이렇게 서로를 인정하고 의지하며 더불어 나갔으니 존중받은 경험이 없고 늘 세상이 자신에게 불친절하다고 느껴왔던 마리암일지라도 마음 문을 활짝 열밖에. 그래서 너를 위해 기꺼이 모든 것을 걸 수 있게 된 거고. 타리크의 귀환 소식을 듣고, 독점욕에 눈이 멀어 질투와 분노에 휩싸인 라시드가 끔찍한 만행을 가해 네가 거의 죽을 지경이 되었을 때 마리암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의 행로를 스스로 결정하는 용단을 내리게 되었던 거야. 그러니 조금의 거리낌도 없을 수밖에. 그 당당한 태도에 형을 집행하려던 탈레반 병사까지 숨죽이고 올려다보았잖니. 우리 딸 라일라의 마음속에 마리암은 아마 천 개의 태양이 내뿜는 눈부신 광채로 빛나고 있을거야. 아빠 역시 네 속에서 그렇게 반짝거렸으면.
라일라. 생각해보니 마리암과 너 둘이는 너무 앞서나갔던 것 같아. 지금 여기의 우리 아프간과는 어울리지 않았던 거지. 그러니 시대와의 불화로 까맣게 타들어 갈 수밖에.
그러나 라일라 너는 기어이 그 간난을 이겨 내었지. 그리고 이제 파키스탄 여름 휴양지 마리에서의 꿈 같이 안락한 삶을 정리하고 버겁고 팍팍한 나날이 기다리고 있을 아프간으로 다시 돌아가겠다는 결정까지 내리게 되었고. 9.11 이후 마리에서의 삶은 뭔가 불충분하고 중요치 않으며 낭비 같다고 여기던 네가 떠오르는구나. 넌 역시 아프간이야. 아빠를 닮은 자랑스런 딸이고. 아프간이 너를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단박에 가슴으로 체감했던거지. 새 조국에서 네가 할 일이 정말 많거든. 그래서 결국 타리크와 함께 아지자와 잘마이를 데리고 돌아왔구나. 타리크와 너는 참 잘 어울린단다. 네 엄마가 걱정했지만 나는 처음부터 그가 마음에 들었다. 기품 있는 외모에 자상한 심성을 지닌 타리크. 너랑은 하마터면 페르시아판 <로미오와 줄리엣>인 <라일리와 마즈눈>이 될 뻔했지. 그리고 로켓탄이 우리 집에 터지던 그 날 말이야. 거기서 17일만 먼저 출발했더라면 우리 온가족도 무사하고 타리크와 함께 파키스탄에서 잘 지낼 수 있었을 텐데 신의 뜻은 정말 알 수 없구나. 하나 결국 그와 너는 인연의 끈으로 다시 하나가 되었지. 그리고 이젠 동반자고. 네가 마리암의 미완의 삶을 완수하고 이제 아지자의 인연이 배어 있는 고아원으로 향할 수 있게 된 데는 타리크의 정신적 지지가 큰 몫을 했을거야.
아 참! 돌아오는 길에 마리암의 추억이 깃들어있는 헤라트에 들르기로 한 건 너무 좋은 생각이었다. 역시 정이 많고 삶의 의미를 아는, 인간미 넘치는 내 딸이야. 마리암과의 작별과 진혼을 소홀히 할 순 없지. 그녀 역시 아빠나 엄마 같이 지금의 너를 있게 한 고마운 존재니까. 마리암, 아무런 불평 없이 시대를 견디고 자신을 덮쳐오는 물살에도 불구하고 품위를 잃지 않던 그 의연한 모습, 잊히지 않는다.
이제 새로운 나라는 마치 새 이름 짓기 놀이를 하듯, 완전히 달라진 구조로 만인이 참여하는 가운데 건설되겠지. 네가 사과나무 묘목을 심고 페인트칠도 깨끗이 하는 등 작은 일에서부터 아프간 재건 사업에 발 벗고 나서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단다. 그건 아프가니스탄에 돈을 주겠다던 원조 약속이 지켜지지 않고, 재건축이 너무 천천히 진행되고 있으며,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고, 탈레반이 다시 결집하여 돌아와 복수를 할 것이며, 세계는 다시 한 번 아프간을 잊을 것이라고 불평하며 조급해 하는 사람들에 대한 통쾌한 답변이 될 것이야. 아프간 사람이 쳐부술 수 없는 유일한 적은 우리 자신의 내면을 바꾸는 일이라고 아빠가 전에 말했었지. 그런데 그게 바로 네 몫이라는 생각이 든단다. 우린 지혜로운 민족이니까 아름답고 안전한 곳, 푸른 보리밭이 있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 아빠는 아카시아 나무 밑에서 책을 읽고 타리크는 가슴에 손을 얹고 낮잠을 자고 너는 시내에 발을 담그고 불상들 밑에서 좋은 꿈을 꾸었던 곳 같은 멋진 나라를 만들어 내고야 말거야. 그리고 그건 어디서 찾을 게 아니라 당연히 네 손으로 만들어나가야 할 것이고. 우리 딸은 꼭 해내리라 믿는다.
라일라, 마지막으로 너에게 당부하고 싶은 게 있다. 너와 마리암 같은 사람은 아프간에만 있는 것이 아냐. 이제 그들을 위해서도 나아갈 수 있었으면 해. 다른 나라의 어려운 이들에게도 도움의 손길이 얼마나 필요한지 아니. 그런 의미에서 타리크가 프랑스 NGO의 장애인 의족 보급 사업에 참여하고 있는 것은 너무 고무적인 일이다.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고아 교육 사업도 국제적으로 펼쳐 나갈 수 있을거야. 아프리카나 다른 분쟁 지역에도 따뜻한 보살핌이 필요한 어린이들이 셀 수 없이 많으니까. 네가 NGO의 활동가나 UN같은 국제기구의 대표 자격으로 그런 곳에 가서 활동하는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아빠 바비가 라일라에게 바랐던 것이 그런 모습 아니겠니. 분노에 무력해지지 않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우리 딸이니 이것도 충분히 이루리라 믿는다. 내 딸 라일라, 네 앞길에 이제 좋은 일만 있기를 빌어줄게.
하늘나라에서 사랑하는 아빠 바비 하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