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투를 빈다 - 딴지총수 김어준의 정면돌파 인생매뉴얼
김어준 지음, 현태준 그림 / 푸른숲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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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 (나도 총수님처럼 번호를 매기련다.)  상담 관련 책이나 자료를 읽고 이처럼 후련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쌈박한 기분의 뒤끝을 즐기며 무엇이 나를 이렇게 유쾌하게 이끌었는지 따져보았는데 몇 가지 짚이는 게 있었다. 우선 기대 이상으로 많은 지식을 얻었다. 애초 딴지 총수님의 독설로 도배된, 그리하여 마스터베이션 부류가 아닐까 지레짐작하여 약간 꺼려지기도 했는데 웬걸, 전문가 뺨치는 정교한 이론이 빼곡하였던 것이다. 상담 이론의 정수를 꿰고 있는 듯 그의 논리는 종횡무진하면서도 질서정연하게 배열되어 있었다. 그것도 있어야 할 적재적소에 배치되어 복잡 미묘한 인간의 심리를 빤히 보이듯 그려내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무릎을 친 게 한두 번이 아닐 정도. 또 하나 우리 사회의 넘쳐나는 꼴불견들, 그들의 허위의식을 예리하게 짚어 내더니만 특유의 똥침을 제대로 가해 대리만족의 즐거움을 만끽하게 한 것도 이유 중의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뒷골 뻐근해지도록 불편한 심사가 일어나 왜일까 한참을 멈칫거리게도 만들었는데 얼마 있지 않아 연유가 환하게 그려졌다. 총수님이 쏘아붙이고 있는 비열하고 저급하며 유아틱한 모습이 다름 아닌 나의 그것이었기 때문이었다. 

1. (우선 유쾌 상쾌 통쾌한 부분부터)  <건투를 빈다>에 등장하는 상담자의 모습은 스테레오타입화 되어 있는 총수님의 이미지와 잘 겹쳐지지 않는다. 능글능글하게 징그러운 면모는 간데없고 풋풋하며 더욱이 착하기까지 하다. 물론 도덕군자의 반듯한 행실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순일무잡의 지경을 보여주었단 얘기다. 그런데 이렇게 잡스런 사설 없이 또렷하게 인간의 심리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지적으로 충만한 총수님의 역량 때문이라 하겠다. 그간에 이루어진 상담은 대부분이 좋은 이야기를 늘어놓아 분위기를 누그러뜨린 다음 피상담자를 위로하여 그 일을 덮어버리려는 무마 위주의 것이었다. 하여 알맹이 없이 허접하기 이를 데 없는 것이어서 기껏 이런 말 하려고 그렇게 뜸을 들였는가 하고 치밀어 오르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총수님은 역시 달랐다. 총수님이 이런 상담 코너를 운영하게 된 것도 형식적인 위로 위주의 상담에 질렸기 때문이라 한다. 하여 총수님은 문제의 근원과 해결방법에 대해 에둘러 말하지 않고 직설적으로 다가가고 있다. 이런 접근 방식은 문제의 본질을 파악할 줄 아는 직관력과 이를 명료하게 설명할 수 있는 많은 배경지식이 있었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게다가 그런 지적 토대 위에 본인의 다양한 경험까지 축적되어 있으니 상담 내용이 알차고 지혜로운 것이 될밖에. 하여 <건투를 빈다>는 이론과 실전을 겸비한 멋진 심리학 임상 실험서라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나의 지적인 성감대를 자극하며 두드러진 의미로 다가온 몇 가지를 들어본다. 우선 자신은 자기 선택의 누적분이라는 것. 그간의 선택 결과가 쌓여서 오늘의 자기가 있게 되었다는 말이다. 선택의 중요성과 그 파급 효과의 지속성에 대해 이보다 더 실감나게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대목에서도 고개를 끄덕일밖에. 어머니가 바라고 있는 것을 자신도 바란다는 사실은 그렇게 길들여져 별 저항 없이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있던 것인데 그 심리적 실체를 또렷이 알고 나니 뜨악해졌다 할까. 게다가 에고, 지적 허영 및 자기 객관화 등 우리가 평소 놓치고 있던 것들의 진면목도 가감 없이 드러내어 지적 수준을 한 단계 상향 조정해주고 있다. 하여 가히 지적 향연을 즐겼다고 할만하다. 심지어 사회의 권력관계에 대한 현실적인 지혜까지도 담고 있어 효용이 너무나 컸다 할까. 헤어지자는 말을 습관적으로 하는 연인에 목매달아 하는 이를 향해 “모든 관계는 기본적으로 권력관계다. 그녀는 그 점을 체득하고 있다. 그 한마디가 그녀에게 관계의 헤게모니를 쥐게 한다는 걸 알고 있단 말이다. 보다 정확하게는 이별에 대한 당신의 공포를 이용해 관계의 우위에 서는 법을 안다는 말이다.”고 정확하게 진단하고 단호하게 일러주는 상담자를 보았느냐 말이다. 

그런데 김어준의 상담 내용이 더욱 각별하게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그의 심성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어 절로 감정이입이 되게끔 몰고 가기 때문이다. 특히 인간에 대한 신뢰를 피력한 부분에서는 그의 내면에 잠재되어 있는 진지하고 결곡한 유전 형질을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인간의 자기 정화 및 치유 능력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었기에 상담자의 인위적이고 의도적인 개입 없이 피상담자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나갈 수 있게끔 자연스레 도와주는 방식으로 상담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러면서 시종일관 어설픈 도덕군자의 윤리적 판단을 삼가고 가능하면 객관적으로 상황을 보려는 스탠스를 유지하고 있어 더욱 빨려들 밖에. 

또 하나 즐거운 점은 싸가지들을 후련하게 질타하여 대리만족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 잘 보여준 대목. 명품족이나 삐끼족 등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로부터 칙사 대접받는다는 사실 자체를 즐기는 싸가지들에게 김어준은 일갈하고 있다. 호강에 받쳐 요강에 똥 싸고 있다고 질타하며 상대방에게는 단호하게 선을 그으라고 권고하고 있는 것이다. 제삼자인 나까지 후련하게 말이다. 이런 상담이 다 있다니. 

2. (이제 뒷골 뻐근해지도록 불편한 얘기) 그런데 갈수록 후련함을 즐길 수만은 없겠다는 생각에 심사가 여간 혼란스러운 게 아니었다. 총수님이 그렇게 퍼붓고 있는 대상이 바로 나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는 데 생각이 미쳤기 때문이다. 

먼저 남의 시선 의식하기, 곰곰 돌이켜보니 그간 내 삶을 산 게 아니라 남의 눈에 비치는 나의 모습을 만들려는 생각에서 비롯된 선택의 연속이었다는 사실이 아프게 다가왔다. 오로지 남에게 나쁜 놈으로 비치지 않기 위해서 말이다. 그 대목에서 요즘 회자되고 있는 난(NAN)방송 안상태 기자의 리포트가 떠올랐다. “난 엄마뿐이고, 엄마는 내 인생 틀어쥐고 있고, 난 내 맘대로 선택해 본 적이 없이 엄마가 닦아 놓은 길만 갔을 뿐이고...” 그 푸념을 듣고 뒤로 넘어가면서도 저건 딱 내 얘긴데 하고 뜨끔했던 기억이 새삼 되살아났던 것이다. 물론 인류사 자체가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단 욕구에 의해 구동되어 온 인정 투쟁의 역사이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나 좋은 사람이 되겠단 욕심을 버리면 나만의 행복에 이르는 길이 환히 열릴 것인데. 

또 반드시 지불해야만 하는 대가를 치르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유아적 본능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그런데 김어준은 삶의 선택에는 리스크가 필수적으로 수반된다는 점을 누차에 걸쳐 강조하고 있다. 공짜가 없다는 진리를 말이다. 그동안 나의 선택이나 행동은 그것에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려는 응석으로 점철된 것이었다. 약자와 피해자인 척 하면서 위로와 동정을 유발하여 상황을 모면하려던 자가 다름 아닌 나였던 것이다. 

방어기제의 화신인 나의 일그러진 모습도 확인할 수 있었다. 내 맘에 드는 모습만 기억하며 그렇지 않은 면은 외면하고 부정해버리곤 했기에 때론 남들은 다 아는 명백히 나쁜 나의 면모도 까맣게 잊곤 했다는 것을 총수님의 글을 통해 절감했던 것이다. 주변 사람들은 다 아는데 나만 그러는 줄 모르고 살아온 그 무명의 나날들을 생각하면 뒷덜미가 뻐근할밖에. 

3. (그럼 결국은)  김어준의 상담 기록을 보고 다잡아먹은 마음이 있다. 그냥 생겨 먹은 대로 살자고 말이다. 물론 이는 엄청난 용기와 투쟁이 필요한 일임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자신의 못난 면마저 그대로 받아들여 더 이상 뚜껑 열리지 않는 단계, 쓸데없는 자기비하나 턱없는 과대평가 없이 그저 나름의 삶의 기준을 정립하여 삶을 오롯이 나의 것으로 장악하고 자존감을 향유하는, 그런 지존의 경지에 오르기가 호락호락하지 않을 것임은 불 보듯 빤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건투를 빈다>에서 그런 지경에 이를 수 있는 완벽한 즉답을 주었다고 단언할 수는 없겠지만 상당 부분 지침으로 삼을만한 소중한 지혜를 제공해주었음은 부인할 수 없겠다. 

4. (사족)  그리고 그 동안 의아했던 것 하나의 실마리를 풀었음도 고백한다. 내 주변에는 사람이 모이지 않는데 왜 아내는 모두에게 사랑받는 존재일까 하고 질투 반 의문 반 연구 대상이었는데 <건투를 빈다>에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바로 아내의 예리한 지성과 넉넉한 심성이 누구나 자신의 속내를 오롯이 드러내며 하소연 할 대상으로 여기게 되었다는 걸 말이다. 김어준은 지성을 타인에 대한 이해와 자기 객관화 능력으로 보았다. 그리고 그런 능력을 지닌 자는 스스로에게 떳떳한 자만이 내뿜는 자존감의 괴력을 발휘한다고도 했다. 그리고 그 기운이 다른 사람에게 전해져 그의 자장 안으로 빨려들게 만든다는 것이다. 과연 아내는 그러했다. 지성의 아우라가 어려 있었기에 사람들이 자연스레 주위로 모여들었던 것이다. 게다가 남의 심정을 자신의 그것으로 느낄 줄 아는 가슴까지 지녔기에 연민의 공감이랄까 타인을 무장 해제시키는 힘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많은 이들이 아내의 영향력 범위 안으로 들어와 더불어 위로받고 위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을 밖에. 물론 이는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는 빈 구석. 하지만 어쩌랴. 인위적으로 어쩔 수 없는 부분인 것을.
하여 <건투를 빈다>를 통해 아내의 사랑받는 비결을, 또 내게 결여된 부분이 무엇인지를 또렷이 알게 해 준 총수님께 어떻게 고마운 마음을 전해야 할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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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일곱 살의 털 사계절 1318 문고 50
김해원 지음 / 사계절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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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때 아들 아니었던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여기서 아들이라 함은 생물학적 F1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기존 사회 질서와 권위를 대변하는 존재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 일탈과 독립을 꿈꾸는 자 말입니다. 그리하여 반항하던 아이 아니었던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누구든 아버지의 영역, 그 두터운 막을 뚫고 마음껏 날개를 펼치고 싶은 의식을 본원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런 터널을 어떻게든 통과하고 난 다음이 문제입니다. 어른이 된 다음에는 그만 어린 시절의 그 간절했던 열망을 까맣게 잊어버리기 일쑤이지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을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 어른들의, 그것이 아버지건 혹은 학교라는 조직체의 교사건, 영역 안에서 다시금 아이들은 목말라 할 수밖에 없게 되고요. 이렇게 가슴 저린 연쇄가 어쩜 인간의 숙명이라고 생각하니 먹먹해집니다.

김해원의 <열일곱 살의 털>은 이런 아들과 아버지의 숙명적인 관계를 실감나게 그리고 있습니다. 고답스런 훈계조가 아닌 것은 물론, 요즘 감각에 맞는 속도감 있는 스토리 전개에다가 통통 튀는 문체 속에 아름다운 우리말을 곁들여 살갑고 생생하게 대립과 화해의 과정을 살려내고 있습니다. 더욱 각별하게 다가온 것은 유난히도 쩔쩔맸고, 겨우겨우 그 시절을 견뎌내던 나의 모습이 오버랩되었기 때문입니다. 도무지 남의 얘기로 읽히지 않았거든요. 나의 그 시절을 다시 불러내어 곱씹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기 아프게 청소년 시절을 겪다 결국은 아버지의 굴레에서 일탈해버렸던 아들이 있습니다. 그는 아내와 아이를 남겨둔 채 밖으로 겉돌기만 했지요. 그런 그가 어떤 계기인지는 모르지만 사랑하는 이들 곁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오자말자 난처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자기 아이가 17년 전 바로 자기 앞에 가로놓여 있던 것과 같은 문제로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아이 일호, 범생이였던 일호는 어느 날 자신이 너무 무르거나 단단하여 힘 조절을 잘 못하는 어정쩡한 아이임을 자각합니다. 그리하여 심정적으로 뭔가 분발의 계기를 찾고 있던 차에 예기치 않은 장면을 목격하고 맙니다. 체육복을 입지 않고 두발 규정을 지키지 않았다는 이유로 학생의 머리에 라이터로 불을 붙이려는 체육교사 매독을 보고 내면의 꿈틀거림을 느낀 것입니다. 그 순간 “머리칼은 네 자신을 나타내는 징표다. 머리칼을 함부로 다루는 것은 네 자신을 망가뜨리는 것과 같다.”는 할아버지의 말씀이 섬광처럼 스치면서 ‘이건 말도 안 돼!’라는 속엣 말을 내뱉을 사이도 없이 달려들고 말았지요. 그 사건 이후로 일호는 두발 규정 철폐를 위한 선구적 행동을 펼치는 의식 있는 아이로 변모합니다. 일순간의 분노가 의식을 각성시켜, 내면에 잠재되어 있던 의로운 기개를 드러내게 한 것이지요.

이런 일호를 지도하기 위해 학부모를 호출하려고 학생부장 오광두는 전화를 걸게 되고 이를 마침 17년 만에 귀가한 일호의 아버지가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는 그 순간 17년 전의 자신을 떠올렸겠지요. 다음날 일호와 함께 학교로 출두하면서 극적 반전이 이루어집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사과와 함께 자식 가정교육을 제대로 시키겠다고 다짐할 것이라는 교사들의 기대와는 딴판으로 일호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반응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 30일 정학이라는 중징계가 내려지고, 그리고 일호는 결심합니다. 필 받은 김에 내처 달리자고 말입니다. 피켓을 들고 교문 앞에서 일인 시위를 벌이게 된 것이지요. 언제 끝날지 모르는 막막한 싸움이었지만 자부심을 가지라던 할아버지와 단단하게 크라던 엄마, 그리고 싸워서 얻어야 한다던 아버지, 그들이 하거나 하지 못한 것을 직접 경험해보고 싶다고 일호는 자신을 다잡습니다. 땀으로 세상이 다 잠기더라도 자신의 주장을 당당히 펼치겠다고 말입니다.

일호의 할아버지는 국가 시책에는 무조건 순응하는 사회 모범생, 그러나 재개발로 자신의 자산 가치는 늘어나겠지만 세입자들의 신세는 처참해질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세입자 편이 되고 맙니다. 그러다 일호가 정학을 당한 후 일인 피켓 시위를 하는 장면을 보고야 말지요. 당혹감에 학교장에게 선처를 빌러 삼부자가 학교로 갔다가 할아버지까지 일호의 동지가 되고 맙니다. 비인간적인 교문 지도와 두발 불량자 강제 삭발 광경을 보고 말입니다. 오광두가 아이들의 머리 한가운데를 아무렇게나 바리캉으로 미는 것을 보고 탄식을 하며 할아버지도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게 된 것이지요. 하여 폐쇄했던 학교 이발소에서 강제 삭발당한 아이들의 머리를 정리해주겠다고 제안을 합니다. 그런데 할아버지는 그 아이들의 뒷머리에 커다랗게 별모양 하나씩을 박아 주었지요. 분개한 교장 선생님의 방문에 할아버지는 수십 년 전 단속에 걸려 머리를 깎이고 이발소에 들른 아이들 얘기를 들려줍니다. 그 때 항변하던 아이가 바로 지금의 교장일 줄이야. 할아버지는 알아보았지만 넌지시 말만 던질 밖에요.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한 거지. 어른들도 학생 때는 우리와 똑같았지 뭐. 어른들 중에는 장발 유행할 때 머리 길게 기르고 단속 피해 도망 다니던 사람들도 있고 별 사람 다 있을 거 아냐.”라고 하던 정진의 말이 실감나는 순간이었지요.

그리하여 해피 엔드, 두발 규정 철폐에 관한 학운위가 열리고 오광두는 할아버지의 이발소에서 이발을 한 다음 반듯한 손자 두었다고 인사까지 하게 되지요. 그리하여 할아버지, 아버지와 아들은 난생 처음 세상과의 싸움에서 의미 있는 결과를 거둔 것입니다. 그것은 아들과의 싸움에서 오히려 아들 편을 들어주었기에 가능했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은 물론이고요. 그 신선한 경험을 어찌 쉽게 잊겠습니까. 의식이 한 차원 거듭나게 될 밖에요. 할아버지는 아버지의 권유를 받아들여 더욱 세입자 편에서 재개발을 반대하며 이발소 영업까지 중단할 지경으로 나아가게 됩니다.

후련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소설을 즐겁게 읽고 났지만 뭔가 뒷덜미를 누르는 듯한 거북함 또한 떨칠 수 없었습니다. 우리의 현실이 내내 마음에 걸렸던 것입니다. 아직도 실상은 소설에서 그리고 있는 것 같은 해피 엔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녹록한 게 아니지요. 아버지와 아들 그들의 숙명적인 갈등은 오늘 여기에서 여전히 되풀이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말 아버지와 아들 사이건 학교와 학생들 간이건 말입니다.

이처럼 김해원의 <열일곱 살의 털>은 우리 사회의 당면과제이자 인류의 영원한 숙제인 아버지와 아들 세대 간의 갈등과 화해라는 의미심장한 주제를 맛깔스런 문장에 아름답게 녹여내어 우리의 마음결을 후련하게, 한편 심란하게 건드렸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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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중력 증후군 - 제13회 한겨레문학상 수상작
윤고은 지음 / 한겨레출판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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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어나지 않은 사건을 목격했다는 게 말이나 돼요?”(276쪽)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마음이 뇌에 신호를 보내 원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내게끔 명령하도록 부추기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 시신경은 유사한 것만 봐도 실제 그것인양 여겨버리는 것이다. 하여 인간의 눈에 잡힌 외계의 영상은 내면의 반영이기 일쑤다.

연전 우리 사회를 강타했던 황우석 박사의 환자 맞춤형 줄기세포 사건이 생각난다. 그것은 과학 선진국으로 나아가야한다는 사회적 당위와 난치병으로 고생하는 환자 가족들의 절절한 염원이 낳은 신화였다. 그러기에 학계의 검증 결과 허위로 판명되었음에도 진실인 양 맹목적으로 집착하는 것은 물론 문제를 제기한 측을 폄훼하며 몰아붙이는 비이성적 입장을 끝까지 고수하던 세력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의 눈에는 원하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 결코 들어오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불거져 정권의 안위까지 위태롭게 만들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문제만 해도 그렇다. 과학적 근거에 입각해 여러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값싸고 질 좋으며 안전하기까지 하니 아무 문제없다고 강변하는 이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 그런데 그들은 말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내심으로도 철석 같이 믿어 의심치 않고 있다. 그들의 눈에도 바라는 것만 보일뿐이다. 우리 사회 집단 무의식의 현주소를 또렷이 보여주고 있는 사례라 하겠다.

이런 비이성적인 행태가 횡행하는 데는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공허감이 크게 작용한 듯싶다. 급속한 산업화로 인해 물질적 부는 어느 정도 충족되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은 아직 전근대적인 수준에 머물고 있어 이런 부조화 때문에 늘 채워지지 않는 허기 같은 것이 상존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뭔가에 과도하게 집착하거나 권위 같은 데 기대어 빈 구석을 매우고 싶어 하는 마음의 발로가 이런 방식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하고 말이다.

<무중력 증후군>에 등장하는 이들은 하나 같이 유사한 심리적 증후군을 앓고 있다. 특히 노시보에게는 한결 더 증폭되어 나타난다. 그리하여 무중력 증후군이라고 명명된 질환 보유자의 모델로 꼽히게 된다. 그것은 앞에서 든 사회적 상황에다가 개인적인 요소까지 더해져 통제 불능의 지경으로까지 나아갔기 때문이다. 자신의 반쪽이던 미라가 떠난 일이 뒤숭숭하고 불안정한 집단 문화와 겹쳐지며 전형적인 무기력하고 공허한 증상을 보인 것이다. 그 상실과 소외로 얼룩진 마음의 결이 뇌로 아니 온몸으로 전이되어 나타난 것이다.

“미라가 떠난 후 찍었던 가슴 사진과 오늘 새로 찍은 가슴 사진이다. 새로운 가슴 사진과 그 이전 것을 비교해 보다가 깜짝 놀랐다. 새로운 가슴 사진에는 있어야 할 것들이 없고, 없어야 할 것이 있었다. 눈을 꾹 감았다 다시 떠도 마찬가지였다. 폴라로이드에서 갓 뽑아낸 사진처럼 허공에 대고 몇 번을 흔들어도 똑 같았다. 가슴 속에는 하얀 원형의 이미지만 덩그러니 남아 있었던 것이다. 누가 의심할 것도 없이 그것은 달이었다.”(290쪽)

달의 증식과 이로 인한 무중력 증후군의 만연, 연이은 사회적 일탈은 집단 무의식과 개인적인 상처가 빚은 비현실적 병리 현상이었다. 실연의 상처가 가슴에 뻥 뚫린 달처럼 하늘에도 달을 만들어 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섯 개의 달이 뜨고 무중력 증후군이 발병한 것은 결국 상실과 소외로 말미암은 공허를 매우기 위해 과도하게 다른 보상 대상에게 집착하고자 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하겠다. 가슴이 머리로 하여금 초월적 상상물을 낳게 한 것이다.

“가슴팍이 뻥 뚫린 것처럼 허전했다.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도 애매했다. 다만 인터넷 한구석에서 ‘붕대로 가슴을 꽁꽁 싸매는 방법’을 찾아냈다.”(288)

주인공의 이런 고백은 바로 우리의 그것이기도 하다. 이 척박한 현실, 부대끼는 심경으로 어찌 상처 없이 이 시대를 견디겠는가 말이다. 하여 작가는 노시보의 경우를 통해 한국 사회의 병리 현상과 우리의 심리적 징후를 이런 엽기적인 상상으로 그려내었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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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
박미희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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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은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고 책을 집어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피겨 선수 엄마로서의 애환이나 링크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진솔하게 피력한 정도일 것이라 내심 짐작하며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성찰이 녹아 있고 감성을 자극할 정도로 격조 있는 글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예단은 첫 장에서부터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에다가 알맹이 있는 말과 생각들로 빼곡한 그야말로 잘 차려진 성찬이었던 것입니다. 읽는 동안 내내 이런 흡인력이 어디서 나올까 의문이 들 정도였는데 나아갈수록 그 이유가 도드라지더군요. 연아 엄마의 풍부한 감성과 깊은 정신세계가 읽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내면의 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글이기에 가슴에 바로 와 닿았던 것이지요.
제게는 그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 부분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먼저 관계자들이 울고 갈 정도로 깊이가 있는 연아 엄마의 피겨에 대한 전문성입니다.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제 나름대로 추측해보았는데 그건 물론 연아 엄마의 집념어린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그 밑바탕에는 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언급하여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이 있지요. 연아 엄마의 심경과 그간의 상황 대처방식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비상해보려는 아이를 뒷바라지하자니 자연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 대견하기도 하여 그 아이를 어떻게든 일으켜야 하겠다는 일념이 피겨에 대해 한 차원 높게 눈을 뜨도록 이끌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연아 엄마는 링크 현장에서 아이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다 코치들도 발견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점을 예리하게 집어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맞춤형 조언을 해 주었지요.


그런데 아이를 지켜보다 보니, 다소나마 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떨 때 넘어지고 어떨 때 넘어지지 않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심히 관찰하면서 아이가 어떤 자세와 각도로 탈 때 안 넘어지고, 어떨 때 넘어지는 지를 체크했다. 그래서 그 포인트를 아이한테 알려줬다. “연아야, 착지할 때 허리를 좀 더 세워봐. 아까 똑바로 세웠을 때 안 넘어졌지?” 그렇게 시작된 연구와 공부가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내게 어떤 책을 보고 공부하느냐고 묻지만 피겨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공부할 만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내 교재는 오로지 연아였다.(45)

연아 엄마의 전문성은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멘탈(mental) 차원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심리학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지요.

아이가 조금 나태해지려 할 때 한마디만 던지면 연아는 무섭게 다시 일어났다. “너 그러다가 잠깐 반짝하는 애구나 하는 소리나 듣게 되면 어떡하니? 다들 김연아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모습 보여줘서 되겠니?”(34)

피겨는 당일 컨디션, 심리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고 운도 많이 작용하는 섬세한 경기인데 아이의 당일 컨디션과 그런 결과가 나온 이유, 문제점 등은 온종일 붙어 있는 내가 이미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문제 삼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결과가 좋지 못했을 때 그 순간 누구보다 실망하고 상심해하는 사람은 본인일 텐데 거기에 비난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한껏 위축돼 있을 아이를 위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등을 두드리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그것이 백 마디 꾸짖음보다 더 큰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163)

이런 지극한 애정이 연아 엄마를 아이에 대한 제1의 전문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와 코치 선생님이 신뢰를 보내고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요.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전문가로서의 권위일 것입니다. 여기서 연아 엄마를 진정한 달인으로 임명하고 싶어집니다.
또 하나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연아 엄마의 자신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입니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되면 정작 자신의 삶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지요. 이때 보통 엄마들 같으면 눈물겨운 희생의 삶이라고 자탄하기 십상일 것인데 이를 멋지게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연아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이 더욱 윤택해졌다고 밝히는 부분에서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까지 했습니다.

피겨맘으로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아이가 성장한 만큼 내 모습도 많이 변했다. 반상회에 가면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있고, 남의 집에도 잘 못 가던 소심한 주부가, 이제 아이한테 걸림돌이 되는 일 앞에서는 참지 못하는 소문난 싸움꾼이 되었다. 새로운 음식 하나 배우는 데도 쩔쩔 매던 어설픈 주부가, 이젠 피겨 스케이팅 기술은 물론 운동역학까지 두루 꿰는 반 전문가가 되었다. “아이한테 재능이 있다”는 코치 선생님의 말 한마디와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자신의 길을 너무도 사랑했던 아이의 모습이 내 인생까지 180도 바꿔놓은 것이다.

내 게으름 때문에 내 안이함 때문에 아이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접게 될까봐 나는 두려웠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연애할 때보다 더 열렬히 아이에게 몰두했다. 고맙게도 아이 역시 다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했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자리까지 올랐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연아가 이런 말을 했다. 더 성공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 나면 엄마가 잃었던 것을 모두 되돌려주고 싶다고, 아마도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려야 했던 이 엄마의 삶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연아를 통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 지금껏 살아오며, 무언가에 몸이 부서져라 도전해보지 못했던 겁 많고 소심했던 내가. 딸 덕분에 전력을 다해 달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6-7)

이 대목에서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가 오버랩되더군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아 엄마는 자신을 이렇게 불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활기와 생명력이 넘쳐흘렀던 거고요. 그러니 아이 덕분에 이런 화끈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간의 과정을 오로지 희생뿐이었다고 한탄할 이유가 없다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먹먹해진 가슴을 추스를 수 없어 한동안 책이 읽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연탄재 뻥하고 찰만한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엄마가 있었기에 연아는 옥수수알이 팝콘이 되면서 팡하고 터지듯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결과를 보여주며 일약 백조가 되어 비상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니 해피 엔드, 연아와 엄마가 행복한 스케이터와 즐거운 피겨맘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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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 - 한 소심한 수다쟁이의 동유럽 꼼꼼 유랑기
이정흠 지음 / 즐거운상상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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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석 님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라는 노래가 생각납니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있네' 라는 구절처럼 나도 그렇게 무념무상 길을 나섰으면 하고 아직도 꿈꾼답니다. 아무 생각 없이 느리게 음미하듯 걷고 있노라면 그곳이 어디든 바로 천국이 아닐까 하는 생각에 아득해지기도 합니다. 한동안 걸으면 문득 세상 시름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오로지 자신과만 대면할 수 있게 됩니다. 혼란스런 마음결 추스르는데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맛을 느끼기에 안성맞춤인 곳은 인적이 드물면서도 문화의 향기가 유장하게 감도는 곳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정흠 님이 동유럽의 뒷골목을 걷고자 한 것도 아마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입니다.

저도 여행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여행은 원래 새로 접하게 되는 풍경이나 주변의 사회적 상황을 자신의 내면에 비추어 지극히 사적으로 해석하기 일쑤인 개인적 체험의 과정이지요. 이를 통해 한 개체로서 자신의 존재 의의를 자각하기도 하고 때론 약삭빠르게 돌아가는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기도 하고요. 동유럽의 뒷골목을 걸으며 이정흠 님이 건져 올린 소중한 깨달음도 이에 다름 아니었을 것입니다.

체코 프라하 페트르진 전망대에서 거짓말로 할인받은 딱 그 금액만큼을 소금과 후추 값으로 지불하고 나서 페트르진의 저주를 느껴던 대목에서 약간 우스우면서 안쓰럽기까지 했습니다. 거기다가 여행자의 뒤통수를 치는 자 저주 받으리라! 라고 악담을 퍼붓는 모습이라니.

그런데 일순 대반전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체코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의 공연 입장료가 4,500원밖에 하지 않아 돈에 의한, 돈을 위해 존재하는 천박한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이라는 자각이 들면서도 기분이 좋아지고, 또 카를교의 생동감 넘치는 문화를 향유하고 위로를 받으니 우울했던 기분이 말끔히 날아갔다고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설핏 웃음이 났습니다. 그리하여 행복의 핵심적 요소는 물질적인 것이나 미학적이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심리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는 깨달음에 이르게 됩니다. 여행의 불예측성이 선사했던 외로움과 우울함이 또 다른 불예측성이 가져다준 우연에 의해 해결된 것이지요. 그러면서 세상만사가 계산대로만 되지 않는 것임을, 또 대가 없이 이루어지는 것은 없음을 냉엄하게 깨닫게 되었음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거창한 얘기는 아니지만 잔잔하게 다가와 공감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같이 동유럽 뒷골목을 걷고프게 만듭니다.

<오후 5시, 동유럽의 골목을 걷다>는 이렇듯 지극히 개인적이고 사소한 일상에 대한 감상적인 기록이지만 가식 없이 전해지는 인간적인 모습에 함께 아파하고 기뻐하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생각만해도 가슴 한 켠이 싸아해지곤 하는 동유럽, 그 빛나는 문화와 숨겨진 매력으로 빼곡한 곳을 애정어린 시각으로 따뜻하게 다가가 구석구석 그 진면목으로 이끌고 있는 이정흠 님. 그가 걸었던 여정을 따라 동유럽의 뒷골목을 나도 음미하며 걸어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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