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재능에 꿈의 날개를 달아라
박미희 지음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08년 7월
평점 :
품절


실은 그리 크게 기대하지 않고 책을 집어 들었음을 고백합니다. 피겨 선수 엄마로서의 애환이나 링크에서 겪은 에피소드들을 진솔하게 피력한 정도일 것이라 내심 짐작하며 호기심 반 재미 반으로 읽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성찰이 녹아 있고 감성을 자극할 정도로 격조 있는 글일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지요. 그런데 이런 예단은 첫 장에서부터 여지없이 빗나갔습니다. 섬세하고 유려한 문장에다가 알맹이 있는 말과 생각들로 빼곡한 그야말로 잘 차려진 성찬이었던 것입니다. 읽는 동안 내내 이런 흡인력이 어디서 나올까 의문이 들 정도였는데 나아갈수록 그 이유가 도드라지더군요. 연아 엄마의 풍부한 감성과 깊은 정신세계가 읽혀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내면의 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글이기에 가슴에 바로 와 닿았던 것이지요.
제게는 그중에서도 특히 두 가지 부분이 남다르게 다가왔습니다. 먼저 관계자들이 울고 갈 정도로 깊이가 있는 연아 엄마의 피겨에 대한 전문성입니다. 어떻게 이런 경지에까지 이를 수 있었을까 제 나름대로 추측해보았는데 그건 물론 연아 엄마의 집념어린 노력의 결과이겠지만 그 밑바탕에는 아이에 대한 지극한 사랑이 깔려 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나 싶습니다. 유홍준 교수가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에 언급하여 한동안 인구에 회자되었던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에 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는 말이 있지요. 연아 엄마의 심경과 그간의 상황 대처방식에 딱 어울리는 표현이라 하겠습니다. 열악한 조건에서 비상해보려는 아이를 뒷바라지하자니 자연 측은하기도 하고 한편 대견하기도 하여 그 아이를 어떻게든 일으켜야 하겠다는 일념이 피겨에 대해 한 차원 높게 눈을 뜨도록 이끌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연아 엄마는 링크 현장에서 아이를 애정 어린 눈으로 지켜보다 코치들도 발견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문제점을 예리하게 집어내곤 했습니다. 그리고 맞춤형 조언을 해 주었지요.


그런데 아이를 지켜보다 보니, 다소나마 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어떨 때 넘어지고 어떨 때 넘어지지 않는지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유심히 관찰하면서 아이가 어떤 자세와 각도로 탈 때 안 넘어지고, 어떨 때 넘어지는 지를 체크했다. 그래서 그 포인트를 아이한테 알려줬다. “연아야, 착지할 때 허리를 좀 더 세워봐. 아까 똑바로 세웠을 때 안 넘어졌지?” 그렇게 시작된 연구와 공부가 오늘까지 오게 되었다. 많은 분들이 내게 어떤 책을 보고 공부하느냐고 묻지만 피겨의 불모지였던 우리나라에서 공부할 만한 자료는 거의 없었다. 내 교재는 오로지 연아였다.(45)

연아 엄마의 전문성은 기술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멘탈(mental) 차원에 이르기까지 미치지 않는 구석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심리학자는 저리 가라 할 정도였지요.

아이가 조금 나태해지려 할 때 한마디만 던지면 연아는 무섭게 다시 일어났다. “너 그러다가 잠깐 반짝하는 애구나 하는 소리나 듣게 되면 어떡하니? 다들 김연아가 최고라고 생각하는데, 그런 모습 보여줘서 되겠니?”(34)

피겨는 당일 컨디션, 심리 상태에 영향을 많이 받고 운도 많이 작용하는 섬세한 경기인데 아이의 당일 컨디션과 그런 결과가 나온 이유, 문제점 등은 온종일 붙어 있는 내가 이미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니 문제 삼을 이유가 전혀 없는 것이다. 결과가 좋지 못했을 때 그 순간 누구보다 실망하고 상심해하는 사람은 본인일 텐데 거기에 비난까지 해서야 되겠는가. 한껏 위축돼 있을 아이를 위해 엄마가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뿐이다. 등을 두드리고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 그것이 백 마디 꾸짖음보다 더 큰 울림으로 남을 것이다.(163)

이런 지극한 애정이 연아 엄마를 아이에 대한 제1의 전문가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이와 코치 선생님이 신뢰를 보내고 권위를 인정할 수밖에요. 그것은 누가 강요해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우러나온  전문가로서의 권위일 것입니다. 여기서 연아 엄마를 진정한 달인으로 임명하고 싶어집니다.
또 하나 각별한 의미로 다가온 것은 연아 엄마의 자신에 대한 마인드 컨트롤입니다. 아이에게 모든 것을 바치게 되면 정작 자신의 삶은 제대로 누리지 못하게 되지요. 이때 보통 엄마들 같으면 눈물겨운 희생의 삶이라고 자탄하기 십상일 것인데 이를 멋지게 승화시키고 있습니다. 연아를 지켜보는 과정에서 오히려 자신의 내면이 더욱 윤택해졌다고 밝히는 부분에서는 가슴 한켠이 아려오기까지 했습니다.

피겨맘으로 그렇게 살아오는 동안 아이가 성장한 만큼 내 모습도 많이 변했다. 반상회에 가면 가장 구석자리에 앉아 있고, 남의 집에도 잘 못 가던 소심한 주부가, 이제 아이한테 걸림돌이 되는 일 앞에서는 참지 못하는 소문난 싸움꾼이 되었다. 새로운 음식 하나 배우는 데도 쩔쩔 매던 어설픈 주부가, 이젠 피겨 스케이팅 기술은 물론 운동역학까지 두루 꿰는 반 전문가가 되었다. “아이한테 재능이 있다”는 코치 선생님의 말 한마디와 피겨 스케이팅이라는 자신의 길을 너무도 사랑했던 아이의 모습이 내 인생까지 180도 바꿔놓은 것이다.

내 게으름 때문에 내 안이함 때문에 아이의 재능을 꽃피우지 못하고 접게 될까봐 나는 두려웠다. 그래서 학교 다닐 때보다 더 열심히 공부했고, 연애할 때보다 더 열렬히 아이에게 몰두했다. 고맙게도 아이 역시 다른 누구보다도 더 열심히 노력했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자리까지 올랐다.

얼마 전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연아가 이런 말을 했다. 더 성공해서 자신의 꿈을 이루고 나면 엄마가 잃었던 것을 모두 되돌려주고 싶다고, 아마도 자신을 위해 많은 것을 버려야 했던 이 엄마의 삶이 안쓰러워 보였던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연아를 통해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다. 지금껏 살아오며, 무언가에 몸이 부서져라 도전해보지 못했던 겁 많고 소심했던 내가. 딸 덕분에 전력을 다해 달려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6-7)

이 대목에서 안도현 시인의 시 <너에게 묻는다>가 오버랩되더군요.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연아 엄마는 자신을 이렇게 불태울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삶의 활기와 생명력이 넘쳐흘렀던 거고요. 그러니 아이 덕분에 이런 화끈한 삶을 살 수 있었는데 그간의 과정을 오로지 희생뿐이었다고 한탄할 이유가 없다는 고백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부분에서 먹먹해진 가슴을 추스를 수 없어 한동안 책이 읽히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정말 연탄재 뻥하고 찰만한 자격이 있다 하겠습니다.
이런 엄마가 있었기에 연아는 옥수수알이 팝콘이 되면서 팡하고 터지듯 도저히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결과를 보여주며 일약 백조가 되어 비상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하니 해피 엔드, 연아와 엄마가 행복한 스케이터와 즐거운 피겨맘으로 거듭나게 된 것은 이미 예정된 일이었다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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