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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으로 인문학 하기 - 랩과 힙합 속 인문 정신을 만나다
박하재홍 지음 / 탐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어쩜 우린 선입견으로 세팅되어 있는 자동기계가 아닐까 싶다. 뇌리에 붙박여 있는 관념들에 얽매어 사고의 유연성을 스스로 차단하곤 하니까 말이다. 랩(Rap)에 대한 생각도 예외가 아닐 터. 랩뮤직이라 하면 으레 파괴와 반항, 청소년기의 데카당스부터 떠올린다. 그러니 자연 백안시할 밖에. 하긴 갱스터랩, 디스(dis)랩 같은 장르도 있으니 그럴 법도 하다. 그런데 박하재홍의 [랩으로 인문학 하기]는 이런 통념을 일거에 깨뜨리고 있다. 혼란스럽다. 랩이 성찰과 존중을 담고 있다니.
하지만 랩을 문학에, 래퍼를 작가에 비유하며 풀어나가는 얘기를 얼마쯤 듣고 있으려니 절로 무릎을 치고 고개를 끄덕이며, 쿠웅 ~ 딱의 리듬으로, 따라 읽는 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그는 래퍼들 간 다툼으로 두 명의 생명을 잃은 다음 반성과 성찰의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디스(dis)보다 피스(peace)를 외치는 쪽으로 랩의 트렌드가 선회하였음을 얘기한다. 그러면서 랩이 원래 약자들의 평화로운 항변을 담은 온건한 담론에서 비롯된 것이기에 공격적, 마초적이지 않고 존중과 성찰의 가치, 긍정의 미학을 노래하고 있다고 밝힌다.
필자를 통해 눈뜨게 된 사실은 래퍼들이 정말 다채로운 이야기와 음악을 통해 인문정신을 보여주고 있다는 것. 흥겨우면서도 진지하게 펼치는 랩 속에는 철학, 문학, 역사, 예술 등 온갖 인문학의 정수들이 담겨 있다. 랩으로 하는 인문학.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조합이 이처럼 절묘하게 어울릴 줄이야. 환경캠페인에 참여하여 테마에 맞는 힙합 공연을 하고, 전쟁 반대 시민운동가들의 거리 퍼포먼스에 참여하여 관심을 고조하기도 하였으며, 인문학 책방 전국 순회공연으로 동네 책방 활성화를 기하기도 하다가 공정 여행으로 팔레스타인 추수 캠프에 참석하여 랩으로 평화를 노래하기까지 했으니.
이 책의 압권은 크게 두 부분. 하나는 국내 래퍼들의 글을 소개하고 인문정신으로 해석한 대목이고 다른 하나는 랩의 형식에 근접한 포이트리 슬램(poetry slam)이라는 장르를 청소년들에게 적용하는 방식을 소개하고 또 실제 창작된 작품을 보여준 것이다. 국내 래퍼들의 작품은 재기발랄하고 의미심장한 것 투성이였고 그 속에 잠재된 인문학적 의미를 밝힌 필자의 혜안 또한 경탄할 정도였다.
MC sniper의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에서 전태일을 떠올리며 역사성을 일깨우고, 개인의 방황, 도전, 불만, 열등감, 순수, 포용, 관찰 등 깊은 내면을 탐색한 랩의 의미도 읽어내고 있으며 사회와 환경을 노래한 작품도 언급하였으니. 필자가 쓴 <순이 베러 블루스>에 붙인 글에 담겨있는 포용심, 정의와 인권에 대한 인식과 감성 앞에선 아득했다.
21세기의 정의는 동물의 권리까지 포용할 것이다. 정의는 여성을 포용하지 않으려는 남성과, 흑인을 포용하지 않으려는 백인을 설득했다. 이제는 동물을 포용하지 않는 인간을 설득할 차례다. 이미 준비는 되었다.(147쪽)
사회적 이슈에 대한 주장을 랩으로 펼치면 이슈의 쟁점도 또렷해지고 논쟁의 강도나 성격도 감정적 비난으로 흐르지 않을 것이다. 여기 논술 수업에 적용하면 딱 안성맞춤일 대목이 있다.
랩으로 한판 뜨는 건 이럴 때 하는 거다. ‘MC 부르카’와 ‘MC 안티부르카’의 프리스타일 대결! 누구의 불만이 더 정의로운지 관중이 평가한다. ‘MC 부르카’는 ‘종교의 자유’에 대해 늘어놓을 테고, ‘MC 안티부르카’는 인간의 ‘신체의 자유’에 대해 내뱉을 것이다. 정반대의 주장을 펼치지만 둘 다 ‘자유’를 써먹는다. 정의를 논할 때 ‘자유의 가치’를 빼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본인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되어야 정의를 논할 수 있다.(131)
포이트리 슬램은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당장 사용해도 될 법한 장르라 하겠다. 세미 랩이랄까? 작법 강좌도 흥미롭다. 아이들의 단순하고 성의 없는 토막글에서 랩에 버금갈 정도로 정선된 글이 탄생하는 과정을 단계별로 보여주고 있다. 이를테면 ‘학교 책상에 앉으면 졸린다.’는 푸념을 살짝 손을 보았더니 어느새 ‘네모난 학교 책상에 털썩 앉으면 나도 모르게 남태평양 나무늘보처럼 잠이 쏟아져.’라는 생동감 있고 공감 가는 글로 탈바꿈. 여기에 운율과 장단을 넣고 라임(압운)을 덧붙이면 화룡점정, 랩으로 발전할 수도 있을 터.
하여 이 책은 랩이 파괴와 반항 일색의 저질 음악 장르가 아니라 삶의 결과 생각의 깊이를 담아 인문 정신을 일깨우는 수단이 되기도 함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덧붙여 학교나 도서관 등, 청소년 대상 기관에서 어떤 강좌를 열어야 재미와 의미를 동시에 충족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하였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