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속 작은 집 창가에 북극곰 무지개 그림책 3
유타 바우어 글.그림, 유혜자 옮김 / 북극곰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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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막힌 반전이다.

 

숲 속 작은 집 창가에서 문 두드리다 구원받는 것은 작은 원래 토끼뿐인데,

토끼를 쫓던 사냥꾼이 사냥개와 함께 무릎을 꿇고 살려주세요, 살려주세요 하며 문을 두드리고 있으니.

이런 반전이 또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런데 곰곰 따져보면 충분히 그럴 수도 있다.

사냥에 실패하고 눈밭을 헤매다 허기에 지쳐 쓰러질 지경에 처한다면 사냥꾼은 더 이상 기세등등하게 여린 동물들을 쫓는 강자가 아닌 것이다. 이런 일은 능히 벌어질 개연성이 있다. 

사냥꾼은 문을 두드리며 배가 고파요, 배가 고파요 하며 애원하고 있다. 거기에 어떤 살육의 위험이나 공포 같은 게 느껴지겠는가. 그도 나약한 존재, 보호가 필요한 약자인 것이다.

 

그렇다 우리는 모두 약자다.

 

여린 구석을 지니고 있는 불완전한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도 위악적인 모습으로 자신의 존재를 과시하려는 이들이 있긴 하지만 그도 극한 상황에 처하면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진면목을 드러내게 된다. 그런데 이를 평소에는 잘 깨닫지 못한다. 자신의 권세가 영원할 줄 착각한다. 그리고 약자들도 그런 권력관계가 이어질 것이라 지레짐작하여 숙명으로 받아들이곤 한다.

이런 우리의 고정관념을 이 책은 무참하리만치 깨뜨린다.

그리고 약자임을 깨닫는 순간 이웃과 연결되며 화합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토끼와 여우와 사냥꾼이 한 상에 둘러 앉아 맛나게 음식을 먹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아이들의 무의식에 선한 영향을 미치리라 생각한다. 친구들에게 행악을 부리는 아이도 어쩌면 도움을 받아야 하는 처지에 놓일 수도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느끼게 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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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흔, 사랑하는 법이 다르다
주병율 엮음 / 더좋은책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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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다리 휘어지게 한 상 떡하니 잘 차린 남도 한정식을 받은 듯하다. 너무도 맛깔스런 시들이 즐비하여 무엇부터 읽어야 할지 난감할 정도이다. 우선 대가들의 작품에 눈길이 먼저 갔다. 서정주, 김수영, 김종삼, 황동규 등 한국 시를 얘기할 때 빠뜨릴 수 없는 이들, 그 이름만으로도 귀가 호강하는 듯한 작가들의 대표작을 읽으니 역시나 대가가 다르긴 다르구나 새삼 절감한다.

 

대가들의 시에 젖어 여운을 즐기다 퍼뜩 깨어나게 만든 시가 있다. 어쩜 김수영 시인이나 황동규 님의 작품보다 내 가슴에 더 강하게 꽂힌 듯하다. 바로 최승호의 [물든 놈]과 윤의섭의 [사랑니]이다. 최승호의 [물든 놈]은 짧은 분량이지만 울림의 크기가 녹록치 않았다.

 

어느 해 여름 불이문이라는 아름다운 문을 보고, 비구니들의 저녁공양도 받고, 절간 한 귀퉁이 방에 나그네로 잠든 밤에, 얕은 꿈속으로 동창생들이 몰려와 나를 끌어내며 나무라듯 말하더군요.

 

-너같은 물든 놈이 왜 여기서 잠을 자냐고(60쪽)

 

나도 종종 친구들에게 그런 타박을 듣는데, 선생님 그렇게 괴롭히던 놈이 선생질하고 자빠졌으니 뭔가 잘못돼도 한참 잘못됐다고 말이다. 대응할 말이 없어 그냥 쥐죽은 듯 뒷전에 있을 밖에. 이런 시를 알아본 주병율 시인의 혜안도 놀랍지만 이 시에 덧붙인 짧은 코멘트가 더욱 압권이다. 자신의 바탕 역시 물든 놈이라 고백하며 세상에 물든 자신이 안쓰럽고 언짢아 가끔씩 가슴에 손을 올려본다는 얘기이다. 안도현 시인의 [너에게 묻는다]를 읽을 때처럼 스스로 돌아보고 삼가야 겠다는 마음 뭉클하게 솟는다.

 

내가 꼽는 이 시선집 최고의 걸작은 윤의섭의 [사랑니]이다. 사랑니 뿌리 때문에 받은 진통제를 보며 나무에도 진통제가 있음을 얘기하는 대목에서 감성도 놀랍지만 상상력이 너무 대단해 보였다.

 

나무의 진통제는 아마도 바람이거나 달덩어리라고 짐작하지만 그래서 서늘해지거나 삼킨 달을 반쯤 토해내기도 하지만 겨울로 가는 부작용은 심한 모양입니다(28쪽)

 

나뭇잎 떨구고 겨울 채비하는 모습을 나무가 아파하는, 진통제를 맞고도 버거워하는 모습으로 읽은 것이다. 이를 읽고 주병율은 우리에게 생생한 나무의 진통제 받아보라고 권하고 있다. 한참을 생각에 잠기게 하였다.

 

그 외에도 맛깔나는 반찬들로 가득 하니 즐거이, 깊게 읽어보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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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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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우리 삶에는 본디 따스한 사랑이나 푸근한 행복보다 아픔이 더 많은 것일까? 유경은 자신에게 다가 온 너무 많은 죽음 앞에 아연해진다. 그리곤 실색, 정신 줄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사랑하던 연인의 이름조차 까맣게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의 연인들]은 슬픔과 공포와 분노, 그리고 죽음의 기록이다. 폭력으로 이글거리는 불에 관한 얘기다. 살아 있는 자들도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짓눌려 있다. 가녀린 여고생이던 어머니를 강간하고 평생 폭력으로 착취하던 짐승 같은 아버지를 증오하다 그예 죽여 버린 유경, 유경에게 짐이 될 것 같아 교도소에서 스스로 삶을 정리해버린 어머니, 사랑의 말을 잃어버리고 살다 그 동결된 말을 되살리려는 듯 북극 탐사에 나섰다가 크레바스에 빠져버린 요나스 노드스트롬 연우, 강이 파괴되는 것을 제 몸이 찢기는 듯 괴로워하다 결국 꺼져버리고 만 가녀린 촛불 수린의 얘기까지 온통 슬픔 일색이다.

 

어떤 슬픔은 이렇게 빨리 이렇게 깊이 전염되어 세계를 슬픔의 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득하게 그저 감감히 이 아름다운 소년의 슬픔과 실의를 그저 용납하는 마음이 생기려는 찰나였다.(163쪽)

 

게다가 막무가내로 와이강을 파괴하려는 이들의 소유와 정복의 욕망에서 비롯된 온갖 패악과 폭력, 이를 막으려는 해울의 대응 폭력으로 분위기는 사뭇 암울하고 파괴적이다.

 

그리고 이별은 왜 또 이리 많은지. 어머니와 연인을 잃어버린 유경,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스웨덴으로 입양되었던 연우, 와이강가에 자신을 버린 엄마를 이해하게 된 해울까지. 하여 유경, 해울 아니 사랑을 잃어버린 모두는 사랑 없는 자신과 시대를 알리려 끊임없이 편지를 쓴다. 답장을 받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래도 한 줄기 생명의 빛, 사랑이 어른거린다.

 

그런데 실은 [물의 연인들]이 공들여 말하고 있는 것은 불보다 물에 대해서다. 물방울들의 연쇄, 자연스런 흐름, 곧 사랑에 대한 살가운 얘기다. 이별과 슬픔, 폭력과 죽음의 배경에 생명의 빛이 얼핏 읽힌다. 유경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 년이나 죽은 듯 버티고 있던 담쟁이덩굴처럼 그런 암울한 것들 뒤에 사랑과 인연의 아름다운 연쇄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간곡히 들려준다. 수린을 잃게 된 해울이, 수린은 자기의 심장이니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은 그 연쇄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도저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짐승 같은 아버지를 증오하는 유경에게 그 짐승을 낳은 무위암 할머니는 일생 참회의 보살핌으로 다가오고 물에 빠져 죽음의 경계를 오간 해울에게 수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 속이 어땠냐고 물으며 손을 내민다. 어머니의 죽음에 상심한 유경의 삶에 연우는 물의 도시 스톡홀름에서 슬몃 끼어들고 또 연우에게 음악 선생이, 유경에게 독일인 화가가 아름다운 인연으로 얽혀들고 있었으니. [물의 연인들]은 이렇게 생명의 빛, 사랑의 연쇄로 충만하다.

 

 

사랑에 우둔한 자들

 

그런데 사람과 시대가 처한 운명의 전조를 전혀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이 있다. 도무지 알아채지 못하고 소유와 정복을 위해 파괴와 전복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에겐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패악을 저지를밖에. 와이강의 그 아름다운 풍광을 해치고 신령한 기운을 앗아가려는 이들처럼 말이다. 유경에게 생명의 강 살리기 사업은 어머니에게 가하던 아버지의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으로 다가오는 폭력 앞에 온갖 여린 것들은 파르르 떨고 있을밖에.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는데 그 공포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약한 생명들이 일단 울기 시작하는 것처럼. 공포를 직감한 존재들의 울음.(167쪽)

 

강을 파헤치는 공사를 한다는 얘기가 떠돌 때부터 수린은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피부에 진물이 흐르고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며 발작을 일으킨다. 강바닥이 폭파되고 물기둥이 솟고 물고기들이 까무러칠 때 수린도 입에 거품을 물고 쓸어져 뒹군다.

 

 

사랑을 잃은 게 아니었음을

 

유경은 깊은 슬픔 앞에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빠지고 만다. 자신에게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스톡홀름 물의 연인, 그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먹먹해져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치유의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간신히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사랑을 결코 잃어버린 게 아니었음을, 지극한 사랑은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잊힌 게 하나도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새삼 눈뜨게 된다. 도처에 인연으로 얽힌 사랑의 연쇄가 이어지고 있음을 절감한다. 하여 죽음마저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수린과 해울의 모습에서 우리 모두는 물방울로 돌아갔다가 결국 여기 다시 물로 돌아오는 존재임을 느끼며 슬픔에서 헤어난다. 한 물방울이 또 다른 한 물방울로 순환하듯 우리들 삶도, 사랑도 한 바퀴 돌아 다시 시작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 모든 슬픔에서, 불의 나라에서 벗어나게 비로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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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섬에 내가 있었네 (반양장)
김영갑 지음 / 휴먼앤북스(Human&Books)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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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당신을 구원한 제주의 자연

 

당신은 당신만의 길을 뚜벅뚜벅 망설임 없이 가시더군요. 주위의 만류에도, 세속적인 셈법에도 아랑곳 않고 고독하게 자유인의 길을 고수하시더군요. 그리고선 당신만의 유토피아를 발견합니다. 바로 제주의 자연과 삽시간의 황홀로 다가오곤 하던 사진이었지요. 그런데 그건 당신만의 유토피아가 아니랍니다.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면 제 마음도 사악한 기운이 정화되듯 일순 고요해지곤 하니까요. 힐링이 이루어지는 셈이죠. 특히나 들판의 야생화를 파노라마로 잡은 컷에서는 한동안 눈을 떼지 못했답니다. 어느 순간 무념무상 상태가 되면서 잡스런 마음, 들끓던 분노가 모두 햇살 아래 안개처럼 걷혀버린 것 같았으니까요.

 

당신은 열악한 환경, 가난하고 외로운 제주 생활에서도 힐링을 느끼곤 했지요. 샤워 시설도 없는 코딱지 만한 집에서 습기 뚝뚝 묻어나는 힘겨운 삶을 영위하면서도 신선한 공기, 황홀한 여명, 새들의 지저귐, 풀 냄새, 실바람, 꽃향기에 겨워 늘 달뜬 상태였죠. 오르가슴을 느끼곤 했다던 오름은 또 어떻고요. 선이 부드럽고 볼륨이 풍만한 오름의 유혹에 빠져 달 밝은 밤에도, 폭설이 내려도 끊임없이 오름으로 내달렸지요. 그런 제주의 아름다운 자연이 당신을 감싸주고 위로해주고 또 북돋워 주었기에 실은 외롭지 않으셨죠. 이런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을 통해 영감은 또 얼마나 많이 받았고요. 그런 신령스런 기운이 당신의 사진에 오롯이 담겨있답니다. 짧은 제 눈에조차 당신의 작품에선 생명으로 가득합니다. 부드럽게 일깨우는 힘이 읽힙니다.

 

당신의 심경이 배어 있는 그림 같은 사진

 

영감으로 빛나는 당신의 사진은, 사진이라기 보단 오히려 그림이라 하는 게 맞을 듯합니다. 때론 수채화인 듯, 더러는 추상화 같기도 한 것이 눈길을 붙박습니다. 아니 마음결 울렁거리게 만들지요. 오름의 흰 설원을 배경으로 소나무 군락을 찍은 사진은 수묵화의 한 장면 같았습니다. 해거름에 언덕 위에서 부감의 시선으로 찍은 오름 사진은 빛을 화폭에 도입한 인상파의 그림이었고요 자운영인 듯 보이는 야생화가 유채꽃과 어우러진 들판 사진은 르누아르풍의 유화나 질감이 풍부하면서도 차분한 수채화를 연상시켰습니다. 이내가 설핏 낀 들판의 사진은 파스텔톤으로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었지요. 당신이 찾던 유토피아가 바로 그런 모습이었겠죠.

 

당신의 사진엔 같은 장소에서 찍은 작품이 유독 많았습니다. 그것도 같은 구도, 프레임으로 말입니다. 물론 계절이 바뀌며 날씨가 달라지고 빛과 구름의 양도 다 바뀌었으니 전혀 새로운 작품으로 다가오지요. 시시각각 변하는 우리네 심경처럼 말입니다. 당신의 사진은 단순히 자연을 묘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당신의 마음을 오롯이 담았다는 게 그제야 읽혀졌습니다.

 

사진을 위해 지불한 당신의 전 생애

 

그런데 당신의 삶은 누추하고 피폐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아름다운 작품을 얻기 위해 당신의 삶 전부를 대가로 지불했으니까요. 유미적 작가주의의 전범이라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입니다. 그렇게 당신의 온 생애를 바쳐 건져 올린 사진을 보고 오늘 여기 우리가 치유 받고 있으니 당신에게 너무 많은 빚을 진 듯합니다.

 

운명은 또 왜 그리 당신을 벼랑으로 내몰던지요. 당신은 그예 불치병까지 얻고 말았죠. 루게릭병으로 손끝 하나 까딱 하기 어려운 지경에 처해 셔터를 누를 힘조차 없어지자 당신은 새로운 일을 착수하게 됩니다. 바로 갤러리 두모악을 세우는 작업이었죠. 두 팔이 마비될 정도로 망가진 몸에 자금도 부족한 상태라 모두들 미친 짓이라며 만류했지만 당신은 기어이 해내고야 말더군요. 그런데 그것은 당신을 위한 일이기도 했지요. 그 모진 어려움 속에 갤러리를 짓는 일은 오히려 당신에게 지상의 평화를 가져다주었지요.

 

절망의 끝에 한 발로 서 있는 나를 유혹하는 것은 오직 마음의 평화이다. 평화만이 나를 설레게 한다.(199쪽)

 

아픔 없는 곳에서 편히 쉬시길

 

당신은 끝내 루게릭병도 선물이라 여기게 됩니다. 그동안 몸을 돌보지 않고 혹사하며 들판으로 산으로 헤매 다녔는데 이제 갤러리에서 한가로운 일상 가운데 적막을 즐기게 된 것도 바로 루게릭병 때문이라 여겼으니까요.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것을 누리게 되니 행복할 밖에요. 그리곤 당신은 심경을, 생을 정리하는 데 까지 이릅니다. 삶과 죽음이 별개가 아니니, 구원이 멀리 있지 않으니, 두려움 없이 기꺼이 떠날 수 있으리라 마음을 다잡게 됩니다.

 

그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불안도 없었다. 내겐 친숙한 단어였으며, 웃으면서 맞을 수 있는 순간일 거라고 생각했다. 목숨이 붙어 있는 모두가 피할 수 없는 것이 죽음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웃으면서 맞이하자. 웃으면서 떠나가자. 그때를 위해 아낌없이, 신명나게 살아 있음을 즐기자.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아름다운 것만 보고 생각하고 느끼면 세상의 삶을 아름답게 채색하며,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자.(239쪽)

 

이 대목에서 소로우(H. D. Thoreau)와 노무현 전대통령의 모습이 언뜻 겹쳐지는 듯 했답니다. 그렇게 한 마리 새가 되어 우리 곁을 떠난 당신은 분명 이어도로 갔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런 황홀한 눈 보시, 마음 보시를 했으니 말입니다. 당신의 몸과 영혼을 오롯이 소진시켜 여기 남긴 사진을 통해 위로받고 치유되는 우리는 당신에게 빚진 자입니다. 이제는 우리 삶을 불살라 다른 이들에게 보시해야할 차례겠지요. 아픔 없고 슬픔도 사라진 곳에서 이젠 편히 쉬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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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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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밤 9시쯤, 개표 결과 모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보도를 접하며 섬뜩해졌다. 배명훈 작가가 떠올랐던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결국 그의 상상력의 산물인 영생불멸 총통각하가 현실에서 이뤄지고 만 것이다. 환타지가 실제 구현되고 있었다. 5년 간 작가에게 갖은 영감을 제공했던 총통각하가 모습만 살짝 바꿔, 아니 성(性)만 달리하여 강림한 것이다. 환타지가 현실이 된다면 더 이상 환타지로서의 의미가 없는 법, 살짝 비틀며 비아냥거리면 현실에선 다른 결과가 빚어져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선 그런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게 입증된 셈이다. 문학의 힘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결국은 환타지를 접고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얘긴가? 아득해진다.

 

[총통 각하]에 나오는 동면기술 개발자는 과학자이기 이전에 고도의 정치 행위자이다. 그는 총통을 보지 않으려고, 사실상 제거해버리기 위한 의도로 자신의 생체 존재 시점을 바꾸고자 한다. 임기가 끝난 다음 깨어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좌절되고 만다. 총통이 영구집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그린 총통은 단일의 인격체가 아닐 수도 있다. 현실에서 그것은 동종교배로 증식된 유사한 개체나 조직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MB나 박근혜나 결국은 같은 부류의 총통인 셈이다. 그런데 작품 속에선 결국 총통 제거에 성공하고 만다. 교묘한 전략을 구사해서가 아니라 총통의 관심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 정복에 눈이 멀어 돌아오지 못할, 돌아와도 주인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으로 떠나버렸다. 하여 그는 우리와 무관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곰곰 따져보니 이는 정말 시니컬한 비유다. 우리가 총통의 일에 관심을 꺼버리면 같은 효과가 발생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런 시도가 유의미해진다. 바로 총통이 우리 삶과 무관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전반을 그가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무소불위로 지배하게 된다. 그런 기겁할 사태를 막으려면 아니꼽더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비판해야 할밖에.

 

그가 펼쳐 보이는 비유와 상징은 너무 기발하여 무릎을 치게 하지만 결국 짠하게, 먹먹하게 만들고 만다. 현실을 정확하게 짚고 역설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인데 왜 이리 뼈아픈 얘기 일색인지. 하여 여간 심란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정권을 장악한 총통이 자신의 충견들을 낙하산으로 투입하여 공직을 장악하는 [새벽의 습격]에서 그 하수인들이 의미도 모르는 말을 내뱉는 대목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자리에 이런 자들을 앉혀도 되는가 하는 분노로 울렁거리게 만든다.

 

그의 신랄한 비유는 하늘을 찌른다.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낯 뜨겁게도 오늘 여기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에 대한 은유이다. 개나 소나 존중받으며 공존하는 세상을 든 다음, 데모대에게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 현실을 짚어나갈 때는 뒤통수가 저릿저릿했다. 또 공공의 적을 만들어 위기의식을 고조시킨 다음 정보기관을 통해 세상을 통제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발자국], 제 보기에 좋게 만들고자 4대강사업을 벌인 이들을 조롱한 [위대한 수습]도 압권이었다. 4대강 사업을 거대한 원혼이 전차 고삐를 틀어쥐고 저승을 향해 돌진하는 꼴로 비유한 작가의 상상력이라니. 말과 이성, 논리와 낭만이 사라지고 침묵만이 흐르는 두르마도르미 얘기를 그린 [냉방노조 진압작전]도 오늘 여기 겨울 공화국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살짝 뒤집어지기는 연필에 집착하는 MB(멘탈 붕괴)씨를 비튼 [초록 연필]을 읽고서다. 그런데 정말 뼈아픈 얘기는 [내년]이 결코 오지 않는 2012년 박물관에 관한 부분이다. 언제나 2012년 체제에 머물러 있는 얘기가 결국 오늘 여기, 한국 사회에서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그 내년은 물리적 연도가 아니라 새로운 체제, 달라진 한국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게 2012년 12월 19일부로 좌절되었으니...

 

그의 상상력의 원천은 기괴한 현실이다. 그리하여 MB씨를 나의 뮤즈라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의 상상력의 진정한 연원은 사회경제적 구조보다 개인이나 집단심리 혹은 구성원간의 상호작용 같은 미시적 측면에서 비롯되고 있다. 기괴한 현실을 낳은 지배세력에게 직접 저항하기 보단 심리적 비틀기, 내면적 일깨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들에게 보리떡을 먹이는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숨긴 의도를 간파하여 까발리고, 빤히 읽히는 술수의 본질을 짚어나가면 상대가 결국 무안해져서 어이없는 짓을 그만두리라고 믿는 듯하다. 웬만큼 지력이 있는 자라면 이런 방식이 유효할 것이다. 모욕감으로 심리적 충격에 빠져 위축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전혀 먹히지 않는 이들이 있다. 바로 오늘 여기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막무가내 꼴통들 말이다. 무지, 무감각한 그들은 환타지와 비유에 울렁거리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정곡을 찔러도 별무반응이니. 그럴 때 우리는 상대가 두려워지고 또 낙담한다.

 

권위주의시대는 문학적 감수성이 옥죄어진 암흑기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너무 기괴한 방식의 통치는 오히려 창작 의욕을 북돋우기도 한다. 비틀기의 멋진 소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니. 그래서 시대의 질곡이 풍자문학의 황금기를 여는 토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망가지는 우리네 삶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그러나 삶과 유리된 문학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현실에서는 비유와 상징, 풍자의 원천이 말라버려야 마땅한 법. 그런데 오늘 여기 우리는 다시 아연해진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무궁무진 샘솟게 생겼으니 말이다. 자신이 무슨 얘길 하는지도 모르면서 경제민주화와 미래창조를 입에 달고 다니는 모 여자 분에게서 벌써 멘붕스쿨의 얼척 소녀가 겹쳐져 보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이제 배명훈 작가가 영감을 그만 얻을 때도 됐다. 영화 <친구>의 장동건 버전으로 말하자면, “그동안 많이 무따 아이가!” 그래서 요구한다. 정부는 배명훈 작가에 대한 창작 지원 사업을 당장 중단하라!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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