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통각하
배명훈 지음, 이강훈 그림 / 북하우스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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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9일 밤 9시쯤, 개표 결과 모 후보의 당선이 확실시된다는 보도를 접하며 섬뜩해졌다. 배명훈 작가가 떠올랐던 것이다. 말이 씨가 된다더니, 결국 그의 상상력의 산물인 영생불멸 총통각하가 현실에서 이뤄지고 만 것이다. 환타지가 실제 구현되고 있었다. 5년 간 작가에게 갖은 영감을 제공했던 총통각하가 모습만 살짝 바꿔, 아니 성(性)만 달리하여 강림한 것이다. 환타지가 현실이 된다면 더 이상 환타지로서의 의미가 없는 법, 살짝 비틀며 비아냥거리면 현실에선 다른 결과가 빚어져야 하는데 우리 사회에선 그런 메커니즘이 작동하지 않는 게 입증된 셈이다. 문학의 힘이 이 정도밖에 안 된단 말인가? 결국은 환타지를 접고 직접 행동에 나서야 한다는 얘긴가? 아득해진다.

 

[총통 각하]에 나오는 동면기술 개발자는 과학자이기 이전에 고도의 정치 행위자이다. 그는 총통을 보지 않으려고, 사실상 제거해버리기 위한 의도로 자신의 생체 존재 시점을 바꾸고자 한다. 임기가 끝난 다음 깨어나려는 것이다. 그런데 그 시도는 보기 좋게 좌절되고 만다. 총통이 영구집권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가 그린 총통은 단일의 인격체가 아닐 수도 있다. 현실에서 그것은 동종교배로 증식된 유사한 개체나 조직이기 십상이다. 그러니 MB나 박근혜나 결국은 같은 부류의 총통인 셈이다. 그런데 작품 속에선 결국 총통 제거에 성공하고 만다. 교묘한 전략을 구사해서가 아니라 총통의 관심이 다른 데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우주 정복에 눈이 멀어 돌아오지 못할, 돌아와도 주인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을 시점으로 떠나버렸다. 하여 그는 우리와 무관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곰곰 따져보니 이는 정말 시니컬한 비유다. 우리가 총통의 일에 관심을 꺼버리면 같은 효과가 발생하게 되니 말이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조건이 충족되어야만 이런 시도가 유의미해진다. 바로 총통이 우리 삶과 무관한 것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점이다. 이런 조건이 충족되지 않는다면 우리의 삶 전반을 그가 아무런 견제도 받지 않고 무소불위로 지배하게 된다. 그런 기겁할 사태를 막으려면 아니꼽더라도 관심을 갖고 지켜보며 비판해야 할밖에.

 

그가 펼쳐 보이는 비유와 상징은 너무 기발하여 무릎을 치게 하지만 결국 짠하게, 먹먹하게 만들고 만다. 현실을 정확하게 짚고 역설적인 대안을 제시한 것인데 왜 이리 뼈아픈 얘기 일색인지. 하여 여간 심란해지지 않는다. 이를테면 정권을 장악한 총통이 자신의 충견들을 낙하산으로 투입하여 공직을 장악하는 [새벽의 습격]에서 그 하수인들이 의미도 모르는 말을 내뱉는 대목은 고도의 전문성이 요구되는 자리에 이런 자들을 앉혀도 되는가 하는 분노로 울렁거리게 만든다.

 

그의 신랄한 비유는 하늘을 찌른다. [고양이와 소와 용의 나라로부터]우리가 배워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는 부분은 낯 뜨겁게도 오늘 여기 우리 사회에서 버젓이 벌어지고 있는 모습에 대한 은유이다. 개나 소나 존중받으며 공존하는 세상을 든 다음, 데모대에게 일말의 관용도 베풀지 않는 현실을 짚어나갈 때는 뒤통수가 저릿저릿했다. 또 공공의 적을 만들어 위기의식을 고조시킨 다음 정보기관을 통해 세상을 통제하려는 정권의 의도를 고스란히 드러내 보인 [발자국], 제 보기에 좋게 만들고자 4대강사업을 벌인 이들을 조롱한 [위대한 수습]도 압권이었다. 4대강 사업을 거대한 원혼이 전차 고삐를 틀어쥐고 저승을 향해 돌진하는 꼴로 비유한 작가의 상상력이라니. 말과 이성, 논리와 낭만이 사라지고 침묵만이 흐르는 두르마도르미 얘기를 그린 [냉방노조 진압작전]도 오늘 여기 겨울 공화국에 대한 우화로 읽힌다. 살짝 뒤집어지기는 연필에 집착하는 MB(멘탈 붕괴)씨를 비튼 [초록 연필]을 읽고서다. 그런데 정말 뼈아픈 얘기는 [내년]이 결코 오지 않는 2012년 박물관에 관한 부분이다. 언제나 2012년 체제에 머물러 있는 얘기가 결국 오늘 여기, 한국 사회에서 현실이 되었기 때문이다. 2013년, 그 내년은 물리적 연도가 아니라 새로운 체제, 달라진 한국을 의미하는 것일 게다. 그게 2012년 12월 19일부로 좌절되었으니...

 

그의 상상력의 원천은 기괴한 현실이다. 그리하여 MB씨를 나의 뮤즈라고 고백하기까지 한다. 그런데 그의 상상력의 진정한 연원은 사회경제적 구조보다 개인이나 집단심리 혹은 구성원간의 상호작용 같은 미시적 측면에서 비롯되고 있다. 기괴한 현실을 낳은 지배세력에게 직접 저항하기 보단 심리적 비틀기, 내면적 일깨움 같은 방식으로 대응한다. 그들에게 보리떡을 먹이는 셈이다. 작가는 이렇게 숨긴 의도를 간파하여 까발리고, 빤히 읽히는 술수의 본질을 짚어나가면 상대가 결국 무안해져서 어이없는 짓을 그만두리라고 믿는 듯하다. 웬만큼 지력이 있는 자라면 이런 방식이 유효할 것이다. 모욕감으로 심리적 충격에 빠져 위축되기 십상이니 말이다. 그러나 이런 시도가 전혀 먹히지 않는 이들이 있다. 바로 오늘 여기 한국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막무가내 꼴통들 말이다. 무지, 무감각한 그들은 환타지와 비유에 울렁거리지 않는다. 정말 무서운 일이다. 아무리 정곡을 찔러도 별무반응이니. 그럴 때 우리는 상대가 두려워지고 또 낙담한다.

 

권위주의시대는 문학적 감수성이 옥죄어진 암흑기이기 십상이다. 그런데 너무 기괴한 방식의 통치는 오히려 창작 의욕을 북돋우기도 한다. 비틀기의 멋진 소재가 널려 있기 때문이니. 그래서 시대의 질곡이 풍자문학의 황금기를 여는 토대가 되기도 하는 것이다. 그 와중에 망가지는 우리네 삶은 논외로 치고 말이다. 그러나 삶과 유리된 문학이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현실에서는 비유와 상징, 풍자의 원천이 말라버려야 마땅한 법. 그런데 오늘 여기 우리는 다시 아연해진다. 작가의 상상력이 더 무궁무진 샘솟게 생겼으니 말이다. 자신이 무슨 얘길 하는지도 모르면서 경제민주화와 미래창조를 입에 달고 다니는 모 여자 분에게서 벌써 멘붕스쿨의 얼척 소녀가 겹쳐져 보인다. 정말 어처구니가 없다.

 

이제 배명훈 작가가 영감을 그만 얻을 때도 됐다. 영화 <친구>의 장동건 버전으로 말하자면, “그동안 많이 무따 아이가!” 그래서 요구한다. 정부는 배명훈 작가에 대한 창작 지원 사업을 당장 중단하라! 중단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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