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연인들 - 김선우 장편소설
김선우 지음 / 민음사 / 201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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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우리 삶에는 본디 따스한 사랑이나 푸근한 행복보다 아픔이 더 많은 것일까? 유경은 자신에게 다가 온 너무 많은 죽음 앞에 아연해진다. 그리곤 실색, 정신 줄을 놓아버린다. 그렇게 사랑하던 연인의 이름조차 까맣게 생각나지 않았던 것이다.

 

[물의 연인들]은 슬픔과 공포와 분노, 그리고 죽음의 기록이다. 폭력으로 이글거리는 불에 관한 얘기다. 살아 있는 자들도 절망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짓눌려 있다. 가녀린 여고생이던 어머니를 강간하고 평생 폭력으로 착취하던 짐승 같은 아버지를 증오하다 그예 죽여 버린 유경, 유경에게 짐이 될 것 같아 교도소에서 스스로 삶을 정리해버린 어머니, 사랑의 말을 잃어버리고 살다 그 동결된 말을 되살리려는 듯 북극 탐사에 나섰다가 크레바스에 빠져버린 요나스 노드스트롬 연우, 강이 파괴되는 것을 제 몸이 찢기는 듯 괴로워하다 결국 꺼져버리고 만 가녀린 촛불 수린의 얘기까지 온통 슬픔 일색이다.

 

어떤 슬픔은 이렇게 빨리 이렇게 깊이 전염되어 세계를 슬픔의 편으로 만들어 버린다. 아득하게 그저 감감히 이 아름다운 소년의 슬픔과 실의를 그저 용납하는 마음이 생기려는 찰나였다.(163쪽)

 

게다가 막무가내로 와이강을 파괴하려는 이들의 소유와 정복의 욕망에서 비롯된 온갖 패악과 폭력, 이를 막으려는 해울의 대응 폭력으로 분위기는 사뭇 암울하고 파괴적이다.

 

그리고 이별은 왜 또 이리 많은지. 어머니와 연인을 잃어버린 유경, 어머니에게 버림받아 스웨덴으로 입양되었던 연우, 와이강가에 자신을 버린 엄마를 이해하게 된 해울까지. 하여 유경, 해울 아니 사랑을 잃어버린 모두는 사랑 없는 자신과 시대를 알리려 끊임없이 편지를 쓴다. 답장을 받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그래도 한 줄기 생명의 빛, 사랑이 어른거린다.

 

그런데 실은 [물의 연인들]이 공들여 말하고 있는 것은 불보다 물에 대해서다. 물방울들의 연쇄, 자연스런 흐름, 곧 사랑에 대한 살가운 얘기다. 이별과 슬픔, 폭력과 죽음의 배경에 생명의 빛이 얼핏 읽힌다. 유경의 아파트 베란다에서 사 년이나 죽은 듯 버티고 있던 담쟁이덩굴처럼 그런 암울한 것들 뒤에 사랑과 인연의 아름다운 연쇄가 숨어 있다는 것을 간곡히 들려준다. 수린을 잃게 된 해울이, 수린은 자기의 심장이니 자기가 살아 있는 한 영원히 죽지 않는다고 말하는 대목은 그 연쇄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도저한지 잘 보여주고 있다. 또 짐승 같은 아버지를 증오하는 유경에게 그 짐승을 낳은 무위암 할머니는 일생 참회의 보살핌으로 다가오고 물에 빠져 죽음의 경계를 오간 해울에게 수린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물 속이 어땠냐고 물으며 손을 내민다. 어머니의 죽음에 상심한 유경의 삶에 연우는 물의 도시 스톡홀름에서 슬몃 끼어들고 또 연우에게 음악 선생이, 유경에게 독일인 화가가 아름다운 인연으로 얽혀들고 있었으니. [물의 연인들]은 이렇게 생명의 빛, 사랑의 연쇄로 충만하다.

 

 

사랑에 우둔한 자들

 

그런데 사람과 시대가 처한 운명의 전조를 전혀 읽지 못하는 청맹과니들이 있다. 도무지 알아채지 못하고 소유와 정복을 위해 파괴와 전복을 서슴지 않는다. 그들에겐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러니 아무렇지도 않은 듯 태연하게 패악을 저지를밖에. 와이강의 그 아름다운 풍광을 해치고 신령한 기운을 앗아가려는 이들처럼 말이다. 유경에게 생명의 강 살리기 사업은 어머니에게 가하던 아버지의 폭력에 다름 아니었다.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인 힘으로 다가오는 폭력 앞에 온갖 여린 것들은 파르르 떨고 있을밖에.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는데 그 공포의 정체를 알 수 없는 연약한 생명들이 일단 울기 시작하는 것처럼. 공포를 직감한 존재들의 울음.(167쪽)

 

강을 파헤치는 공사를 한다는 얘기가 떠돌 때부터 수린은 시름시름 앓다가 급기야 피부에 진물이 흐르고 온 몸이 딱딱하게 굳어가며 발작을 일으킨다. 강바닥이 폭파되고 물기둥이 솟고 물고기들이 까무러칠 때 수린도 입에 거품을 물고 쓸어져 뒹군다.

 

 

사랑을 잃은 게 아니었음을

 

유경은 깊은 슬픔 앞에 선택적 기억상실증에 빠지고 만다. 자신에게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해준 스톡홀름 물의 연인, 그가 죽었다는 얘기를 듣고 먹먹해져 이름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다. 치유의 과정을 거친 연후에야 간신히 이름을 떠올린다. 그러면서 깨닫는다. 사랑을 결코 잃어버린 게 아니었음을, 지극한 사랑은 잊히지 않는다는 것을. 잊힌 게 하나도 없음을 느낀다. 그리고 새삼 눈뜨게 된다. 도처에 인연으로 얽힌 사랑의 연쇄가 이어지고 있음을 절감한다. 하여 죽음마저도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된다. 수린과 해울의 모습에서 우리 모두는 물방울로 돌아갔다가 결국 여기 다시 물로 돌아오는 존재임을 느끼며 슬픔에서 헤어난다. 한 물방울이 또 다른 한 물방울로 순환하듯 우리들 삶도, 사랑도 한 바퀴 돌아 다시 시작하는 것임을 알았기에 그 모든 슬픔에서, 불의 나라에서 벗어나게 비로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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