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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평점 :
품절
쇼타 님에게
처음엔 저도 나미야 잡화점 님께 고민상담 편지를 쓰려했습니다. 그러다 곧 마음을 바꿨답니다. 쇼타 님이 먼저 떠올랐거든요. 말이나 행동이 딱 제 수준이었기 때문이랄까, 아님 처지가 동병상련으로 공감이 된 탓이었달까, 하여간 불쑥 편지를 내밀어도 왠지 어색하지 않을 것 같은 친근감이 들더라고요. 알아갈수록 쇼타 님은 참 지혜롭고 인간미 넘치는 분이었습니다. 선한 에너지를 가득 지니고 있었거든요. 쇼타 님에게서 영감을 듬뿍 받아 충만해진 저는 어떻게든 감사의 인사를 전해야 할 것 같아 이렇게 용기를 내본 것이랍니다. 그러니 이 편지엔 굳이 답장을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쇼타 님, 당신도 이번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참 값진 경험을 했죠. 쇼타 님의 답장에 뭐 이런 게 다 있담! 하며 발끈하다 결국 따르고 마는 상담자들을 보며 뿌듯하기도 했을 것이고 마지막엔 실수로 넣은 백지 편지 때문에 나미야 님의 답장, 아마 사상 최고의 편지가 아닐까 싶은, 서신까지 받았으니 당신은 정말 축복받은 행운아입니다. 고마운 마음 많이 느끼셨죠? 그러니 당신과 저는 감사의 마음까지 공유하는 셈이겠네요.
쇼타 님, 꼭 드리고픈 말이 있습니다. 힘이 되고 위로가 될지 모르겠지만 이 말만은 해주고 싶네요. 그동안 참 힘드셨죠? 예기치 않게 잡화점에 들어가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상담 편지의 답장을 쓰게 되었으니 아마 골머리깨나 아팠을걸요. 삶 또한 얼마나 팍팍했습니까? 그러니 좀도둑질이라도 하려고 생각했겠죠. 정말 힘들었던 건 하루미씨의 편지를 보고 마음을 돌려 경찰에 자수 하겠다고 결단한 일일 겁니다. 그 고뇌에 찬 선택에 경의를 표합니다.
먼저 쇼타 님의 제안으로 들어가게 된 잡화점에서 많이 놀라셨죠? 무척 당황스러웠을 겁니다. 예기치 않게 우편함으로 들어온 편지를 받아들고 어이없어 하던 당신들, 왜 그리 촌티 팍팍 나게 어설퍼 보이든지. 궁지에 몰려 쫓기는 신세, 거기다 상담 편지 내용도 뚜렷한 답을 제시하기 어려운 것이어서 머리에 쥐가 내릴 지경이었죠. 그런 어려운 상황에 처하면 대개 막가파처럼 행동하기 쉬운데 쇼타 님은 다르더군요. 쇼타 님의 말 몇 마디만 듣고도 어떤 사람인지 단박에 느낌이 왔다 할까요? 겉으로 위악적인 모습을 보이긴 하지만 바탕은 선하다는 게 빤히 읽혀졌답니다. 쇼타 님과 친구들은 점점 나미야 잡화점의 신비로운 일에 적응해 갔지요. 변변찮은 이라도 몇몇이 머리를 맞대면 꽤 쓸 만한 아이디어가 나온다는 걸 절감했습니다. 요즘 많이 얘기하고 있는 집단지성인 셈이지요. 원래 남의 고민을 상담해주려면 분별력 있고 지성이나 경륜이 출중해야 가능할건데 당신들은 그걸 척척 해내더군요. 그러니 당신들은 막 돼 먹은 쓰레기가 아니랍니다. 특히 쇼타 님이 달 토끼 님의 편지를 읽고 과거의 사람이 보낸 것이라 짐작하는 대목에선 아차 싶더라고요. 당신의 놀라운 혜안이 느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마음은 어찌 그리 여리던지. 편지를 뜯어본 게 걸려 결국 답장까지 쓰고 말았으니. 그런데 당신들은 앞뒤 재지 않고 서슴없이 돌직구를 날리더라고요. 그것도 명품 돌직구 말입니다. 아마 다들 뜨끔했을걸요. 달 토끼 님께 쓴 답장에서‘당신은 바보입니다.’라며 대 놓고 나무라던 모습은 압권이었습니다. 어려움을 이겨내고 상담가로 변신한 좀도둑 삼형제의 활약, 정말 눈부셨답니다.
당신들의 삶은 또 어떻고요. 쇼타 님만 해도 가전제품 판매원으로 일하다 인원감축 과정에서 밀려나 편의점 알바로 근근이 살아가고 있지요. 심지어 일행인 고헤이와 아쓰야는 아예 백수고요. 셋 다 어릴 때 사회복지시설인 환광원에서 함께 자랐죠. 그러니 사랑에 굶주려 늘 세상에 원망만 했을 밖에요. 그 정도 힘겨운 삶의 무게에 짓눌리면 보통 좌절하여 일탈의 길로 접어들기 쉬울 건데 용케도 잘 버텨왔더군요. 그러다 이번에 크게 한 탕 하겠다고 벼르고 나선 것이죠. 쇼타 님, 그런데 절박한 궁지에 내몰려 울분을 토하면서도 화풀이 대상을 선별하더군요. 이를테면 의적(義賊) 같았다 할까요? 악덕업주, 환광원을 해코지하려는 사악한 자인 하루미의 별장을 털기로 계획을 세웠으니 말입니다. 그후 어찌어찌 하다 보니 나미야 잡화점까지 흘러들어가게 된 것이지요. 그러니 당신들은 그렇게 많이 벗어난 게 아니랍니다. 자신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세상에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힌 건 아니었으니까요.
당신들이 하루미 씨의 결박을 풀어주고 경찰에 자수하며 앞으로 도둑질은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은 것도 무척 힘든 결정이었을 겁니다. 그동안 한 번도 잡힌 적이 없었는데 이제 교도소에 가게 되었으니까요. 전과자의 굴레를 쓰고 세상의 낙인을 견뎌야 하는 끔찍한 일이 눈에 선할 텐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당신들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돌이키게 한 건 하루미 씨의 편지 때문이었죠. 내키는 대로 써준 답장이 그녀에게 큰 힘이 되었다니, 그리고 이를 고마워하는 감사의 편지를 전하려 하다니, 그녀가 바로 길 잃은 고양이 님일 줄이야. 그리고 나미야 님이 남긴 백지 편지에 대한 답장은 당신들의 선택을 결정지어 버렸다 하겠습니다.
늙어 망령이 난 머리를 채찍질해가며 궁리에 궁리를 거듭한 결과, 이것은 지도가 없다는 뜻이라고 내 나름대로 해석해봤습니다. 나에게 상담을 하시는 분들을 길 잃은 아이로 비유한다면 대부분의 경우, 지도를 갖고 있는데 그걸 보려고 하지 않거나 혹은 자신이 서 있는 위치를 알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마 당신은 그 둘 중 어느 쪽도 아닌 것 같군요. 당신의 지도는 아직 백지인 것입니다. 그래서 목적지를 정하려고 해도 길이 어디 있는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일 것입니다. 지도가 백리라면 난감해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누구라도 어쩔 줄 모르고 당황하겠지요. 하지만 보는 방식을 달리해봅시다. 백지이기 때문에 어떤 지도라도 그릴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당신 하기 나름인 것이지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가능성은 무한히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멋진 일입니다. 부디 스스로를 믿고 인생을 여한 없이 활활 피워보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447쪽)
편지를 다 읽고 환하게 밝아지는 눈이라니. 이내 눈물 그렁거리며 묘한 기분에 휩싸였을걸요. 쇼타 님, 그 순간 뭔가 신비로운 힘이 느껴지지 않던가요? 지금부터 천기누설 좀 할게요. 당신들은 잘 모르겠지만 아마 하늘에 있는 나미야 유지 님과 미나즈키 아키코 님이 이런 상황을 세팅했지 않나 싶습니다. 그분들이 예정하고 인도하여 당신들을 구원하려 했던 것이죠. 나미야 잡화점과 환광원을 연결하는 눈에 보이지 않는 인연의 끈, 그 인연을 실현하기 위해 당신들이 쓰인 것이랍니다. 그러니 당신들은 선택받은 자들이지요.
결단을 내린 당신들의 맘속에 감사의 메아리가 울리더군요. 하잘것없는 존재이던 당신들이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되었으니까요. 기껏해야 좀도둑질이나 하던 쭉정이 백수들이 대가도 없이 남에게 도움 되는 일을 한다는 보람을 맛보게 되다니 말입니다. 감사의 마음 뭉클뭉클 일어날 밖에요.
“돈이 문제가 아니야. 돈 버는 일이 아니니까 오히려 더 좋은 거야. 이익이니 손해니 그런 건 다 빼고 다른 누군가를 위해 진지하게 뭔가를 고민해본 적이 지금까지 한 번도 없었어.”(330쪽)
이제 당신들에게 고마워해야 할 사람들을 불러 볼 차례입니다. 기꺼이 감사하고픈 이들이 너무 많을 것입니다. 달 토끼, 생선가게 뮤지션이나 길 잃은 강아지 등등. 그들에게 조언을 해 준 게 바로 당신들이었죠. 그 결과 달 토끼님은 여한 없이 운동과 사랑에 몰입할 수 있었고요, 생선가게 뮤지션은 마지막에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의 노래가 남을 구원하고 오래오래 남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으며, 길 잃은 강아지는 호스티스 생활을 청산하고 건전하게 부를 축적하게 되었죠. 그들은 고상한 말보다 당신들의 솔직하고 당돌한 답장에 눈이 번쩍 뜨였답니다. 백수의 리얼한 언어로 거두절미, 단도직입 사태의 본질을 치고 들어간 것이었으니까요. 효과는 그야말로 직방이었죠.
그리고 여기 한 사람 더 있답니다. 바로 저입니다. 당신들의 에너지에, 지혜로운 충고에 감동해버렸답니다. 제 사정을 자세하게 들려줬다간 또 오지랖 넓게 간섭하려 들 것 같아 간략하게 얼버무립니다. 혹 답장을 보내와 속속들이 따져든다면 여간 곤혹스런 일이 아닐 듯해서요. 지금 약간 버퍼링이 걸렸다 할까요. 어릴 때 쇼타 님 못지않게 궁벽한 환경에서 억눌리며 자라나 겨우 자리를 잡고 결혼을 하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제게 너무 과한 상대였습니다. 근근이 맞춰나간다고는 했지만 역시 근본이 드러나게 되더라고요. 잦은 갈등은 결국 서로의 마음 문을 닫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점점 남에게 위로와 평안, 사랑을 주는 존재가 못 되고 짐만 되고 태클이나 거는 사람이라는 자책에 빠지게 되었지요. 이렇게 상황이 악화된 것에 대해 그 동안 솔직히 상대방 탓만 했습니다. 그리고 어려움을 타개하려 하기 보단 신세 한탄조의 넋두리만 늘어놓으며 지내왔던 것 같습니다. 주위에서 잘 해보라고 조언할 때마다 와쿠 고스케가 악감정을 담아 썼던 첫 번째 편지 같은 반응을 보였다 할까요. 그러다 최근에 의외의 얘기를 듣고 허를 찔린 듯해졌습니다. 그동안 위악적으로 사태를 악화시키려고만 하는 것 같았던 아내가 실은 선의를 품고 잘 해보려고 그러는데 제가 몰라주었단 것이지요. 의사소통에 문제가 있었다는 얘깁니다. 그것을 공치사하듯 시시콜콜 밝히지 않았을 뿐인데 무디디 무딘 제가 늘 곡해했던 것이지요. 그런 말을 듣는 순간 마음이 울컥해졌답니다. 그러다 이번에 당신들이 하루미 씨께 보낸 답장을 보고 더욱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상황마다 여과식으로 조목조목 따져 들어가는 답장 내용을 제게도 적용해 보았습니다. 답이 보이더군요. 얼개가 잡히는 듯했습니다. 묵은 감정에 북받쳐 헤맬 게 아니란 사실도요. 어느새 저도 환해졌다 할까요.
그러니 고맙습니다. 쇼타 님. 당신의 답장에 그리고 과감하게 내린 결단에 위로받고 고무됩니다. 당신들이 기꺼이 교소도행을 택했듯이 저도 어떤 쪽으로 턴해야 할지 이제 알겠습니다. 당신이 나미야 님께 감사하듯이, 하늘에서 지켜주고 있다는 것을 어렴풋 느꼈듯이, 이제 저도 감사하는 마음으로 울렁거립니다. 쇼타 님이 선택한 길, 저도 그쪽으로 나아가겠습니다.
- 좌표 없는 길에서 방금 벗어난 어른아이 올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