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큐에게 물어라
야마모토 겐이치 지음, 권영주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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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즐기다 보면 동료들과 가벼운 언쟁을 벌이는 경우가 더러 있다. 여러 갈레로 나뉜 길목에서 각자의 성향에 따라 살풋 신경을 돋우곤 하는 것이다. 데크가 설치되어 편하게 걸을 수 있는 반듯한 길을 택하자는 이도 있고 산야초가 엉겨 있고 돌부리 발에 채는 쪽으로 가자고 굳이 우기는 사람도 있기 때문이다. 이유를 물어보면 하나 같이 멋있잖아, 얼마나 아름다운데 하며 꿈꾸듯 달뜬 표정을 짓곤 한다. 겨우 추스르고 한 구비 돌아 너럭바위에라도 걸터앉으면 예의 그 취향 타령이 또 나오기 십상이다. 하여 다시 난기류에 휩싸인 듯 술렁거리게 되고. 뱀이 기어가듯 굽이치는 강물을 보고 대자연의 경이로움에 감탄을 연발하는 한편에선 저건 직강 공사를 하여 천변 공원을 만들고 유람선이라도 띄워야 제격인데 하며 안타까워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그럴 때마다 아름답고 멋진 것을 바라보는 눈은 정말 사람마다 제각각인가 하는 의문이 들곤 한다.

이렇게 모두가 나름의 미의식을 지니고 있으니 아름다움이란 바로 이런 것이다 하고 또렷하게 내세우는 건 불가능한 일인 듯싶다. 하여 예나 지금이나, 또 양(洋)의 동서를 막론하고 아름다움에 대한 기준은 상대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할밖에. 타인의 견해에 대한 관용과 존중이 미덕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여기 아름다움의 궁극적인 지경을 확연하게 보여주어 범접 못할 절대적인 선을 그어버린 이가 있다. 일본 전국시대의 패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다인, 센 리큐가 바로 그다. 일생을 오로지 지선극미한 아름다움의 절대적인 경지를 추구하다 결국 불타협의 정신으로 죽음마저 흔연하게 받아들였던 리큐. 그러나 그는 다른 이들의 심미안 따위는 도무지 고려할 가치조차 없는 하찮은 것이라 치부하며 극악무도한 만행을 서슴지 않던 냉혹한 사내이기도 했다. <리큐에게 물어라>는 이렇게 아름다움의 극과 극, 그 백척간두를 아슬아슬 내딛던 리큐의 행보와 심경, 그리고 미에 대해 광적이리만치 집착하던 연유를 생생하게 그리고 있다. 작가 야마모토 겐이치는 아름답고 유장한 글로 리큐의 그것을 지금 막 눈앞에서 벌어진 일인 양 고스란히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하여 때론 심미안이 확 열리도록 고양시키고 더러는 조마조마 가슴 태우며 이게 아닌데 하고 번민하게도 만들었다.

1. 아름다움, 그 지선극미한 세계

리큐에게 아름다움이란 절대선이었다. 그 지선극미한 지경에 이르고자 평생 분투하였고 자신이 도달한 그 세계를 불타협의 정신으로 지켜나갔다. 지극한 아름다움은 어떤 이의 눈, 심지어 비뚤어진 시각 일색의 변덕쟁이조차 바꾸어버린다. 모든 오탁 세계, 탐진치의 질곡을 순백의 지경으로 만들어버리는 힘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속 좁은 히데요시에게도 리큐의 미의식은 밉살스러울만치 도저했다. 아무리 애써도 가 닿을 수 없는 지경에 군림하는 구름위의 스승이 리큐였던 것이다. 도요토미는 리큐의 다도와 인격이 도달한 경지를 시험하고자 별별 난처한 상황을 제시했으나 그때마다 리큐는 보기 좋게 기를 꺾어버렸다.

나팔꽃 한 송이를 인상적으로 보이게 하려고 정원에 핀 꽃을 전부 꺾어버린다든지, 서원에 꽃을 꽂으라 명하니 정원의 투박한 돌에 쇠로 만든 화기를 올려놓고 꽂기도 하였고 청동 물그릇과 홍매 한 가지만 장식단에 두고 손을 보라 했더니 홍매 가지를 훑어 꽃과 봉오리를 뗀 다음 물에 띄워 뭐라 형언할 수 없는 풍정을 자아내기도 했던 것이다. 어떤 날은 좋은 화기가 들어왔다고 히데요시를 부른 다음 시치미 뚝 떼고 있다가 다석을 파한 후 정원 쓰레기 구멍에 동백꽃이 떨어져 있는 것을 가리키기도 했고 또 언젠가는 지저분한 문어 항아리를 고귀한 다석의 퇴수기로 쓰는 창의성을 발휘하여 좌중을 압도하기도 하였다. 이렇게 상대의 의도를 간파한 파격적이고 순발력 있는 대응의 밑바탕에는 아무도 감히 흉내조차 낼 수 없는 일관되게 우아한 미의식이 깔려 있었던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의 안목은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미의 절대적인 지경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러니 다도를 혐오하던 도요토미의 군사 구로다 간베에조차 “그 노인의 행다는 빈틈이 없고 막힘이 없다. 인체가 움직이는 이치를 잘 알기에 도구를 드는 법, 다루는 동작이 실로 자연스럽고 헤픈 데가 없다.”(227쪽)하고 감탄하며 사람과 사물의 이치에 통달한 리큐의 가르침을 받고자 청하기도 했고.

그러면서도 리큐는 허식도, 과시욕도, 이해타산도 내세우지 않고 그저 차 한 잔을 끓이는 데만 전념하며 오로지 다구 너머에 있는 아름다움의 세계만을 응시하였다. 이렇게 자유분방한 풍취가 한량없이 파격적이면서도 천의무봉 우아한 품격과 고매함, 그리고 그 고매함이 아니꼬워 보이지 않을 만한 겸양까지 지니고 있었으니 리큐는 가히 다도를 절대선의 경지로 끌어올렸다 하겠다.

2. 아름다움, 그 극악무도한 세계

그러나 지극하면 지나치기 쉬운 법, 리큐의 내면에 극악무도한 모습도 어른거렸다. 리큐는 아름다움을 얻고자 먼저 대상을 깨뜨리곤 했다. 그렇게 선망하던 구원의 여인, 고귀한 조선 여자의 목숨을 앗아버렸고, 스승이 애지중지하던 화기의 손잡이를 단번에 부수기까지 했던 것이다. 리큐의 속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하고 있던 아내 소온조차 모두가 탐내던 그의 애장품 녹색 향합을 석등에 내리쳐 산산조각 내버리기도 했던 것이고.

리큐는 또 탐진치로 얼룩진 집착의 화신이었다. 히데요시조차 너만큼 욕심과 색이 강한 사내는 달리 본 적이 없다고 감탄할 정도로 극악한 면모를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죽어가는 여자의 새끼손가락이 아름답다고 영원히 간직하고픈 마음에 물어뜯기까지 했다.

“여자의 새끼손가락은 분홍색 손톱이 너무나도 아름답기에 요시로가 물어뜯어 작은 녹유 단지에 넣어 품에 지니고 다녔다.”(476쪽)

리큐의 내면에는 펄펄 끓는 지옥의 가마솥 같이 탐욕스런 미에 대한 욕심, 집착이 있었는데 그 불길은 독성이 짙게 배어 있어서 노부나가나 히데요시도 그를 내심 경원할 정도였다. 아버지는 말할 것도 없었고.

“자식 놈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집착이 남보다 갑절은 강합니다. 그 정도로 품위 있는 여자를 남에게 넘기느니 차라리, 그렇게 생각할지 모릅니다.”(420쪽)

“다도에는 사람을 죽이는 한이 있어도 갖고 싶을 정도의 크나큰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도구만이 아니라 행다의 동작에서도 그런 아름다움이 드러날 때가 있지요.”(287쪽)

오죽하면 아내 소온조차 아름다운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 살인도 마다하지 않을 사람이라고 말했을까. 본처인 다에, 후처인 소온과 오초의 대화 중에도 사에키, 곧 리큐는 무엇을 사랑하든 가슴 설레며 불보다 더 뜨거워진다고 했다. 하여 리큐라는 이름을 지어 천황으로 하여금 하사하게 한 고케이 소친은 오래 써서 끝이 예리함이 없게 뭉툭해져 이제는 쓸모없게 된 송곳인 노고추처럼 살라고 권고하기까지 했다. 날카로운 것도 적당히 해두고 둥글둥글 원만하게 살라는 충고를 들을 정도로 지나쳤던 것이다.

3. 백척간두에서의 줄타기, 그 끝은?

결국 추락인가? 극과 극을 오간 리큐의 행보는 결국 비극적 결말로 마감되고 말았다. 독야청청 절대적 지경에 홀로 군림하게 되면 시샘도 따르는 법, 더구나 천하를 제패한 관백 도요토미 히데요시에게도 굴하지 않고 자신만의 미의식을 오롯이 지켜나갔으니 변덕쟁이의 칼날을 비껴갈 수 없을밖에.

"그렇건만 그 사내. 천하에 단 한 사람, 그 사내만이 나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다. 용서할쏘냐. 용서할 수 있을 리 없다.”(29쪽)

히데요시의 눈에 방자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센 리큐, 그는 도요토미의 마음을 읽었는지 모르는지 미동도 하지 않고 또 죽음도 구걸하지 않고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그런 모습이 더욱 밉살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황금 다실도 그렇고, 아카라쿠 다완도 그렇고, 내가 조금이라도 화려한 장식이나 도구를 즐길라치면 그 사내의 눈썹이 어렴풋이 움직였다. 그때의 그 거만한 표정으로 말하자면, 나는 태어난 것을 후회했을 정도였다. 참으로 소름끼치게 냉혹하고 냉철한 눈빛으로 이 나를 업신여기듯 내려다보았다. 천박한 취향, 입 밖에 내어 말하지는 않지만 눈이 그렇게 이야기했다.”(31쪽)

이렇게 겉으론 정중하면서도 내심으로는 히데요시의 심미안을 경멸하는 듯한 리큐의 교만을 천하의 도요토미가 용납할 리 없었던 것이다. 어떤 것의 극치는 더 이상 닿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되면 꺾어지게 되어 있는 법, 리큐의 도저한 다도는 결국 히데요시에게 잠재되어 있던 극악한 마음을 불러일으켰다. 더구나 상황이 이 지경까지 치달았음에도 불구하고 도요토미의 기세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자신의 소신을 끝까지 지키고자 했으니 결국 비극적 결말을 맞을 수밖에. 아름다움의 끝, 백척간두에서의 줄타기의 결과는 파멸이었던 것이다.

4. 아름다움의 극과 극을 오간 연유는?

그런데 왜 리큐는 이렇게 극과 극을 오가며 비극을 낳고야 말 위험천만한 줄타기를 계속했던 것일까? 극악무도한 면모를 보이면서까지 다도의 절대적 경지에 이르고자 한 연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건 오로지 리큐 가슴에 늘 자리하고 있어 거기 있는 게 실감나지조차 않던 그 여자를 향한 일념에서 비롯된 게 아닐까 싶다. 아름다움의 화신, 외모와 내면 모두 숨 막히는 경지를 보여주었던 그 여자 말이다. 조선의 고귀한 가문 출신답게 납치되어 팔려갈 처지인데도 태연자약하던 그 처녀의 눈부시도록 우아한 모습을 다도로 재현코자, 혹은 그녀에게 최상의 차를 바치기 위해 평생 지선극미한 아름다움을 추구하였고 그 과정에서 극악한 행태도 마다하지 않았던 것일게다. 또 그게 버거운 세상을 버텨나갈 힘의 원천이 되기도 했을 테고.

“그 여자는 특별했다. 처절한 아름다움과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가득했다.”(413쪽)

“여자의 눈이 너무나도 검고 맑아서 요시로는 얼어붙었다. 검은 눈동자가 강렬한 빛의 송곳이 되어 요시로의 망막을 꿰뚫었다. 선명하고 강렬한 눈빛”(427쪽)

얼마나 빼어난 면모였는가 하면 “안에 아름다운 생명이 깃들어 있기에 거친 흙벽이 빛나 보이는 것이다. 다도에도 이렇게 가슴 설레는 연심이 있다면”(441쪽) 하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리큐는 일평생 그녀에게 들려있었던 것이다. 그 여자에게서 느꼈던 절대선의 이미지를 다도를 통해 구현해보고자 또 그런 그녀에게 어울리는 다실과 다구를 만들고 차를 끓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던 것이리라.

“그 여자라면 황금과 진홍색에 하얀 피부가 돋보여 필시 아름다웠을 것이다. 늠름하게 치오른 눈이 싸늘하고 신비로웠으리라. 이 황금 다실에는 누구보다도 그 여자의 피부가 어울린다. 하얀 살을 모조리 드러내게 하고 이곳에 앉힌 다음 진홍색 장지 너머로 바라보면... 그 요염함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을 것이다.”(322)

“의연하고 기품 있는 다완, 그러면서 흠칫할 정도로 가볍고 부드러우며 손바닥에 착 감기고 마음속에 녹아드는”(342쪽)

그렇게 아름다운 그녀에 대한 미안함, 지켜주지 못한 자신에 대한 한심함과 증오와 절망이 한데 뒤섞여 리큐는 아름다움의 절정을 지향하면서도 늘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둘이 함께 죽자고 만든 독차를 그녀는 단숨에 들이켰는데도 리큐는 두려움에 떨며 끝내 마시지 못했고, 그 결과 천사를 자신이 떠나보내게 되었으니까 말이다. 이런 자괴감과 부채의식에서 벗어나려는 보상심리가 그토록 극악하리만치 아름다움의 절대적 경지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고 그 절정에 이른 순간 바람 앞의 한 점 꽃잎처럼 미련 없이 생을 놓아버렸던 것이고.

야마모토 겐이치는 이처럼 극한에 이르도록 아름다움을 탐하는 리큐의 모습을 통해 아름다움의 절대성과 이를 추구하기 위해서 지불해야 하는 인간의 극악한 면모를 고스란히 살려내었다. 하여 이제 리큐의 심경을 제대로 읽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리큐는 극과 극, 백척간두에서의 줄타기가 어떤 결말을 가져올지 모든 것을 이미 꿰뚫고 있었다. 그래도 그는 자신의 미학을 자랑스레 지키기 위해 굴하지 않고 나아갔던 것이고. 그게 그녀에게 속죄하기 위해 자신이 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운명 지어진 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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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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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캔들이 플라워가 되는 순서

 

김선우 시인이 촛불집회에 대한 장편을 연재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약간 의외여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요한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부드러운 모성을 노래하던 작가가 아직도 격동의 여운이 남아 있는 치열한 현장을 그려내려 하다니. 그럼 르포 작가처럼 취재 결과를 보고하겠단 말인가, 너무 참여적인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넷 상에 올라온 앞부분 몇 편을 읽어보다가 그게 기우였다는 걸 단박에 알았다. <캔들 플라워>는 눈 부릅뜨고 분기탱천하여 현실을 고발하고 봉기를 선동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면을 오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자던 우리의 감성을 부드럽게 일깨워 세상 일그러진 것들의 실상을 또렷이 읽어내고, 여리고 약한 것들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 모성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관되게 생명,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생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캔들(촛불집회)에서 플라워(생명)을 도출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캔들이 표상하는 분노와 저항의 뿌리에는 감성, 즉 몸의 소리 마음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이런 것들에 민감하지 않고는 세상 어떤 일에도 무덤덤 넘어가기 십상일 터. 반면 내밀한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는 자연스런 감성의 흐름을 거스르는 폭압적인 처사에 도저히 눈 감을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눈 뜬 이들의 공감과 연대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김선우는 보여주고 있었다. 촛불들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당면 시사 현안에 대한 의견 표출을 넘어 이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일상의 정치를 지향하게 된다. 가녀린 것을 먼저 사랑하고 생명의 손길이 배어 있는 온갖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생태와 생명에 대한 경외로까지 의식의 영역이 확장되고 심도가 도저해진 것이다. 이런 감수성이 레인보우 산의 분꽃을 그리워하고, 숙자씨 집에 핀 박꽃을 경탄어린 눈길로 바라보게 하였던 것이다. 하여 지오는 깨닫는다. 플라워,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아는 곳은 어디나 레인보우인 것을. 지오의 입을 빌어 김선우는 결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2. 분노와 저항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

 

2008년 봄 평범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기 시작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구조적 모순이 만연하고 이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일상화되어있기 때문이다. 민기는 지오 못지않게 반짝거리는 아이지만 열악한 환경에 찌들어 결기 가득한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0교시 수업, 우열반 편성, 강제 야자, 영어몰입교육, 학벌만능, 입시지옥에다가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은 머리 둘 곳조차 없을 지경이니까 말이다. 조금만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빨갱이로 매도되는, 다름을 원천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이기에 자연스레 대응방식도 격렬해질 수밖에. 하여 아이들은 지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이미 의식이 웃자라 있었다. 국가를 상대로 토론을 벌일 정도로.

 

한국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과정은 우리 사회의 이러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여론 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굴욕적인 조건의 협상 타결이 이루어졌을 때 많은 국민들은 합리적 근거를 들어 그 부당성에 대해 이의제기를 했지만 정부에서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다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연후에야 내용에는 문제가 없지만 소통 과정에 일부 잘못이 있었다는 식으로 발뺌을 하는 행태를 보인 것 말이다. 그 이후에도 촛불 민심을 수용하겠다고 해 놓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밀어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과연 문명사회인가 하는 회의가 들 정도이다. 하니 이런 지경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방식은 극렬하게 저항하거나 아니면 아무 꿈도 없이 무기력하게 순응하며 살아가는 좀비의 삶, 두 가지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하겠다.

 

 

3. 생태적 감성의 자연스런 발화, 촛불

 

그런데 시민들이 촛불을 들게 된 것은 이런 폭압적인 지배 방식과 터무니없는 협상 과정이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시민들의 감성적 분별력도 근원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하겠다. 세상 잇속을 떠나 인간 본연의 내밀한 소리, 가슴으로 전해지는 떨림에 자연스레 몸이 움직였던 것이다. 촛불들은 그렇게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들을 고스란히 포착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생리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막 한국에 도착한 지오도 여리고 부드럽지만 놀랄만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절로 시위에 동참하게 되었다. 단번에 그들의 마음을 읽고 자신도 교감했던 것이다. 레인보우산, 그 원초적 감성과 직감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환경, 모성적 생태에서 자랐기에 인위적으로 왜곡된 모습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온실 속에서 안온하게만 길러졌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 판이하게 다른 상황 앞에 맞서는 용기를 내게 된 것이고.

 

이렇게 감성이 부르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이들이 하나 둘 촛불을 들기 시작하여 서서히 퍼져나가더니만 드디어 경계가 없이 흘러넘치며, 자신을 밝히고 자기 주변을 밝혀 마침내 아주 환하게 밝아지는 세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생생하게 체험한 촛불의 온기가 세상사 모두 귀찮게 여기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있던 희영에게까지 전해지게 된다.

 

 

4. 촛불들이 플라워를 발견하다

 

촛불을 밝히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가운데 촛불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단순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서서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을 베풀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치 아름답게 만개한 플라워를 대하듯이.

 

그러면서 그 동안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숙자씨가 돌보던 개, 보리가 상처투성이에 심장사상충 감염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희영은 어떻게든 살려보려 동분서주하다 생면부지 초면인데도 선뜻 수술비용 절반을 빌려 주겠다는 연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버려진 개들에게 빚이 있다는 연우 친구 수아도 알게 되고.

 

그리고 옆에 있는 이들에게도 눈길이 가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아차리게 된다. 지오는 자신이 간절히 찾고 있던 또 하나의 분신이 민기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지오가 일곱 살 때 그 애의 부재를 인정하고 견뎌보려다 결국 과부하가 걸려 일주일간의 정전 상태를 겪었듯이 민기도 세 살 때 화재로 일종의 암전을 경험하였던 것까지.

 

이 사랑이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려워. 왠지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유리잔을 깨문 것처럼 마음 어딘가가 아파.(268)

 

그런데 지오가 어떻게 민기를 자기의 분신, 꿈속에서 보았던 바유로 알아보았을까?

 

키스, 키스를 한 순간 알았어. 내가 왜 그 아이의 아픔을 고스란히 내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 것인지. 고통스러워하는 그 아이를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소리를 질러야 할 만큼 왜 내가 그렇게 아팠는지, 키스를 한 순간 또렷이 모든 것이 떠올라왔어. 내 꿈속에 찾아와 발가벗고 놀던 그 아이가, 그 아이 몸의 구석구석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모든 촉감과 냄새들이. 꿈에서 내가 그 아이와 나누었던 키스의 느낌이 고스란히!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필요 없었어. 화상으로 지워진 반달 점 같은 거 확인해 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어. 그 아이 바유. 바람의 아이. 내 짝꿍.(355)

 

플라워를 발견한 이들은 아현동 숙자씨네 박꽃의 아름다움에 목이 멘다. 마치 촛불처럼 해 저물녘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밤 동안 피어 있는 그 뽀얀 박꽃을 말이다.

 

 

5. 이제 레인보우를 바라보게 되다

 

지오는 캐나다를 떠나는 순간부터 레인보우 산기슭에 피어있는 분꽃이 간절하게 그리워 그 빼어난 아름다움이 늘 눈에 선했는데 숙자씨네 박꽃을 보고 나자 마음이 풀리게 되었다. 그 도저한 아름다움 앞에 모든 그리움과 시름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기도 레인보우라는 걸 깨닫는다. 플라워가 만개한 곳, 사람이나 꽃이나 아름다운 이들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레인보우라고 말이다.

 

내 귀에 사그락사그락 무언가 아주 엷게 비벼지는 소리가 들려왔어. 엄마 뱃속에서 나와 바유가 서로의 솜털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아주 보드랍고 환한 소리. 콩닥콩닥 여린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은...따뜻한...오, 대문 옆이 환해지고 있었어. 꽃이 하얗고 보슬보슬한 꽃들이 피고 있는 거야, 박꽃이!(358)

 

희디흰, 투명한 흰빛이 박꽃 속으로 비쳐들고 있었어. 흰 오각형 별모양을 닮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게감 없이 가볍고 얇실한 꽃들이 공중에 떠 있는 듯, 그렇게 박 넝쿨에 매달려 피고 있었어. 페인보우에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달이 뜬 여름밤에 피는 꽃. 박 넝쿨을 찾아 줄기를 만져보니 생긴 건 호박넝쿨과 아주 비슷한데 촉감은 융단처럼 부드러웠어. 너무 부드러워서 깜짝 놀라 무언가 떨어뜨릴 것처럼.

아, 곧이어 거짓말처럼 눈앞이 어른거리기 시작했어. 어디선가 공기의 결이 팔랑, 팔랑, 팔랑거리기 시작하더니 나비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거야. 밤에 웬 나비들이지? 자세히 보니 날개도 작고 빛깔도 좀 칙칙한 못생긴 나비들인데 환한 보름달빛 속에서 희게 팔랑거리며 박 넝쿨을 향해 오고 있는 거였어.

“박각시들임메.”(359)

 

하여 지오는 어디에 있건 어떤 상황이건 이런 감성을 공유하는, 생명과 생태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연대할 수 있으리란 걸. 그리고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한국에서 내가 만난 레인보우를 품고 천천히 홀로 캐나다의 레인보우에 도착하고 싶어. 앞으로 내가 만들어야 할 레인보우를 생각하면서(350)

 

레인보우, 그 곳은 생태적 감성으로 충만한 이들이 연대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섭리의 영역이라 하겠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둥글고 환한 생명의 공간인 것이다. 이제 지오를 비롯한 촛불들은 그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분꽃이 아기자기 피어나고 박꽃 환하게 만개한 가운데 생명과 생태를 이야기하며 이를 한껏 누리는 이들이 더불어 이룰 세상 말이다. 하여 김선우는 지오의 입을 빌어 이렇게 플라워가 만개하여 아름답고 환한, 레인보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의 근원은 캔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도. 촛불 감성들이 공감하고 연대하는 가운데 이렇게 아름답고 맑은 본연의 레인보우가 성큼 우리 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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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산티아고, 혼자이면서 함께 걷는 길
김희경 지음 / 푸른숲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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볕이 좋은 날이면 절로 울리게 입력되어 있는 것처럼 내 머릿속을 두드리는 노래가 있다. 주문을 읊조리듯 흥얼거리다 그 여운에 그윽해지면 하천 옆 둑길에라도 나가야 한다. 울렁거리는 마음결 추스르려면 말이다.


“바람이 불어오는 곳, 그 곳으로 가네. 그대의 머릿결 같은 나무 아래로

덜컹이는 기차에 기대어 너에게 편지를 쓴다. 꿈에 보았던 길 그 길에 서 있네.”


봉고 소리가 경쾌하게 깔리는 김광석의 <바람이 불어오는 곳>은 중독성이 강한 노래이다. 워낙 흡인력 있는 보이스에 노랫말까지 꿈결 같이 설레게 하는 것이다 보니 자연스레 어깨까지 들썩이며 따라 부르곤 하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걷기를 강권하는 힘이 노래에서 우러나오는 것을 느낀다. 해서 볕 좋고 바람 서늘한 날이면 <바람이 불어오는 곳>이 뇌리에 살아나며 습관처럼 길을 나서는 것이다. 그런데 무작정 걷다보면 왜 이렇게 걷는 데 집착할까 하는 물음이 돋곤 한다.


왜 걷는가? 그것도 혼자서 무슨 청승이람. 그런데 조금 걷다 보면 이내 이런 의문마저 잊히고 만다. 그냥 걷는데 의미는 찾아서 또 뭣하겠다는 건가, 괜스레 폼까지 잡을 필요는 없지 않겠나 하고 퍼뜩 정신 드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가의 말에 쉬 공감이 갔다.


여행의 목표와 의미를 처음부터 설정하려 안달하기보다 낯선 길을 홀로 걸을 때, 그리고 낯선 사람들과 어울려 지내다 숱한 이들이 공유하는 어떤 감정과 지향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날 때, 비로소 여기서 무엇을 원하는지가 스스로에게도 이해되기 시작한다는 것이 더 사실에 가까웠다. 여행 도중에, 어쩌면 여행이 끝나고 난 뒤 한참이 지나서야 깨닫게 될지도 모를 여행의 이유를 처음부터 분명히 하려고 애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21)


걷는다는 것 자체가 즐거운 일인데 유별난 의미를 찾겠다고 나서는 게 우스운 일이라는 듯이 말이다. 하여 작가는 여행의 의미나 여행의 종착지에 대해 생각하지 않고 그냥 묵묵히 길에 올랐을 뿐이다. 길이 그런 것이라면 카미노는 스페인에만 있는 게 아닐 것이다. 즐겁고 나를 느끼게 해 주는 길은 도처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가려는 곳은 산티아고가 아니라 길 그 자체, 카미노일지도 모르겠다. 목표가 무엇이냐고 초조하게 스스로를 다그칠 필요가 있을까. 어느 한곳에 도착하는 게 목표가 아니라 카미노로 상징되는 과정 그 자체를 즐기는 일, 서울에선 그토록 어렵게만 느껴졌던 과정을 사는 삶을 여기선 한번 시도해볼 수 있지 않을까. 딱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여기 오길 잘한 것 같다는 생각이 슬며시 들기 시작했다.(40)


그런데 많은 사람을 만나고 여러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서 자연스레 터득하는 게 있다. 그것이 진정한 지혜의 발견이자 예기치 않았던 여행의 부산물 아니겠는가.


마음의 짐을 감당 못해 비틀거리던 날, 우연히 만난 낯선 사람의 미소는 절망적인 시간을 예상치 못했던 위로의 순간으로 바꾸어주었다. 마치 여러 개의 거울을 통해 나를 들여다보는 것 같기도 했다.(45-46)


하여 오늘의 나를 이룬 건 수많은 관계의 교차점이자 흔적들의 중첩이라는 깨움침을 얻게 되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작가는 자신이 왜 카미노에 오르고자 했는지 실마리를 기어이 찾고 만다. 그것은 바로 과거의 상처, 상실의 아픔에 묶여 한 치도 나아가지 못하고 있던 마음, 그 내면의 파도를 다스리려는 것이었음을 또렷이 알게 되었던 것이다. 하여 그 계기가 되었던 죽은 동생의 사진을 묻고는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과거의 아픔에 대해 상실의 의미에 대해 한걸음 물러나 고요히 바라보게 된다.


두려워서 회피하려 애쓰는 대상은 언젠가는 다시 마주치고 만다는 것. 더 높은, 긴급한 목표를 뒀을 땐 그 두려움의 대상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더라는 것. 더불어 두려움의 대상에 내가 부여한 표상을 걷어버리고 사물 그 자체로 볼 줄 알면 그것이 주는 위압, 공포는 사라져버리더라는 것.(250)


그러고 나니 이제 웬갖 잡스런 상념들은 잊히고 오로지 걷는 일 자체의 즐거움에만 몰두하게 된다. 그러니 워커스 하이의 경지까지 맛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치 마라톤 매니아가 사력을 다해 뛰다가 문득 고통이 사라지고 오히려 지극한 쾌감을 느끼게 되는 순간에 이르는 것처럼 말이다.


반복적인 보행의 리듬에 맞춰 오래 걷다 보면 다리의 뻐근함, 발의 통증, 배낭의 무게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지워질 때가 있다. 몸이 가벼워지고 정신과 온 신경이 순수한 진공 상태로 빠져드는 듯한 기분, 내 안의 텅 빈 공간, 어떠한 생각도 없이 잠시나마 자아의 하찮은 주장을 몰아낼 수 있는 마음속의 공간과 마주하는 순간, 오래 지속되진 않았지만 그걸 알아차릴 때마다 여행의 목적을 완수한 듯 뿌듯해졌다.(143)


하여 작가는 오로지 자신에게 현재 닥친 일만 생각하고 또 그것을 즐기다보니 어느새 종착지에 이를 수 있게 되었다. 바람처럼 홀가분하게 그렇게 거리낄 것 없이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를 인정하며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다니. 그러니 여행이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다음에도 전과 별반 다를 것 없이 무덤덤해질밖에.


집에 돌아온 뒤의 나는 떠나기 전과 별로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서툴고 성마르며 곧잘 불안해한다. 실컷 나아졌다고 생각한 바로 다음 순간, 아주 사소한 좌절에도 마음은 고질적인 절망의 늪으로 곤두박질치듯 되돌아가곤 했다. 오래된 마음의 습관에서 빠져 나오는 변화란 순식간에 일어나지 않는 모양이다. 중요한 것은 물러서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울 때마다 나는 카미노를 걷던 일을 마음속에 선명한 이미지로 떠올려보려고 노력한다. 거기선 내가 얼마나 나 자신을 마음에 들어했는지를 스스로에게 상기시키려고 애를 쓴다.(에필로그)


하여 뭐 대단한 것을 발견하여 여행에 오르기 전과는 확연히 달라진 모습을 가져다 줄 카미노는 실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걸 모르고 악착같이 매달리다 보면 오히려 실망이 크고 후유증만 남을 것이다. 김희경은 진즉에 그걸 알아보았기 때문에 별 탈 없이, 아니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즐거움까지 맛보며 여행에 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작가의 길을 따라가자니 내게도 바람이 불어오는 듯하다. 카미노에 한번 올라 보라고 넌지시 이끄는 손길을 느낀 것이다. 만약 오른다면 나 역시 무언가 꼭 얻어 보리라, 이 기회에 이루고 말리라 모질게 마음먹고 결기 가득한 가운데 나설 게 아니라 그냥 별 뜻 없이 나아갈 것이다. 그러다 뭔가 나름의 의미라도 얻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특별한 순간을 경험하고 값진 지혜를 깨우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그게 무슨 대수겠는가? 매순간 살아 있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만해질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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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카니발 율리아 뒤랑 시리즈
안드레아스 프란츠 & 다니엘 홀베 지음, 이지혜 옮김 / 예문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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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데렐라 카니발]은 추리소설의 전형에 충실한 작품이다. 우선 끔찍한 사건 현장에 출동한 민완 형사들과 법의학 감식팀, 그리고 내근 분석조의 공조를 통해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내고 이를 치밀한 두뇌 게임을 통해 풀어나가 결국은 악의 세력을 단호하게 심판한다는 어쩜 약간의 상투성이 느껴지는 스토리 라인이 그러하다. 또 용의자들을 범죄의 길로 내 몬 심리적 트라우마에 대해 지나치지 않는다는 점도 미스터리물 특유의 설정이다. 그런데 곰곰 따져보면 여느 추리소설과는 뚜렷한 차별성이 느껴진다. 다른 추리물에서는 보기 드문 여러 가지 색다른 시도로 신선하게 눈길을 흡인하고 있는데 특히 예술성 있는 감성적 톤과 경찰관들의 트라우마에 초점을 맞춰 접근하는 모습이 독특한 매력을 뿜어내고 있다. 그리고 두 명의 작가에 의해 작품이 완성되었다는 점도 흥미롭다. 그런 사례가 없진 않지만 작가의 사망에 따른 미완성분을 작가의 팬이었던 독자가 이어받아 마무리 지었다는 점은 특이한 경우이다. 그래서 [신데렐라 카니발]은 작가와 독자의 상호 감응이 낳은 합작품이라 하겠다.

 

살인 현장마다 오디오 시스템에선 Led Zeppelin의 'Stairway to heaven'이 흘러나온다. 알렉산더(스포일러가 되지 않으려 성을 생략한다.)가, 그리고 소설 후반부에는 제3의 인물이 사건 현장에 자신의 서명을 남기듯 이 곡을 반복 재생시켜놓고 떠난다. 그런데 이런 설정이 겉도는 게 아니고 스토리 라인에 자연스럽게 접목되어 있어 묘한 톤을 연출한다. 율리아 뒤랑의 컴백 계기가 되었던 살인사건의 피해자 제니퍼 메이슨은 의식이 가물거리며 마치 천국으로 올라가는 계단 앞에 서 있는 듯 간절히 육신의 허울을 벗고자 열망하는데 아마 이때 Led Zeppelin의 곡이 은은히 울리고 있지 않았을까?

 

마지막으로 그가 그녀 위로 몸을 기울였다. 차가운 금속이 목에 와 닿는 순간까지도 그녀는 두려움을 느끼지 못했다. 그리고 몇 초 뒤, 기분 좋은 온기가 이 모든 고통을 잊게 만들었다. 제니퍼 메이슨이 마지막으로 지각한 것은 쇠의 맛, 그리고 편안한 무게감이었다. 그녀는 이 성가신 몸뚱이가 영혼을 놓아 주는 것을 감사한 기분으로 느끼고 있었다. (8쪽)

 

마지막 순간에 처한 이들은 눈앞에 천국으로 가는 계단을 그리며 어서 이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소망하는데 용의자는 자신이 이를 들어준 것이니 가여운 영혼을 구원한 셈이라고 확신한다. 그래서 사건 현장에 출동한 경찰관들과 살인 과정을 녹화한 스너프 동영상 시청자들에게 이를 과시하듯 배경 음악으로 깐 셈이다. 자비네 형사가 스너프 동영상 제작자들의 이런 예술성에 대한 얘기를 꺼내자 도리스가 발끈하며 무슨 예술성 운운이냐며 항변했지만 자신의 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그와 관련된 상징적 표식을 남기는 것은 비록 사이코 패스의 짓이긴 해도 예술적 감각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점을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보자면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가 환각 상태에서 타인이 공감하기 어려운 퍼포먼스를 벌인 것쯤으로 정리할 수 있겠다. 하여 [신데렐라 카니발]은 비록 왜곡된 형태이긴 하지만 예술성 있는 감성적 톤을 깔고 있는 보기 드문 작품이라 하겠다.

 

흔히 추리소설에선 용의자들의 트라우마를 꼼꼼히 그려낸다. 이 작품에서도 알렉산더가 어릴 때 배변훈련 과정에서 겪은 처참한 굴욕이 생생하게 드러나 연민을 불러일으킨다. 납치되어 의식이 몽롱한 상태에서 떠올린 기억만으로도 알렉산더는 치를 떤다. 그런 스트레스가 알렉산더를 반사회적 인격 장애로 일그러뜨렸을 것이다. 그런데 [신데렐라 카니발]에선 용의자들의 트라우마보다 오히려 경찰관들의 심리적 상처에 더 주목하고 있다. 율리아 뒤랑 형사는 명료하지 않은 자신의 성 정체성 때문에 혼란스러웠으며, 최근엔 토마스 홀처라는 사이코에게 납치되어 지하 감옥에서 며칠을 지옥처럼 보내며 극도의 공황상태에 빠지기도 했다. 그래서 다시 형사로 재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심신이 피폐해져 있다. 이런 아픔 때문인지 성 범죄자, 납치 강간자 등에 대한 적대감이 매우 강하다. 연쇄 살인 사건 해결 과정에서 뒤랑은 자주 개탄하며 분노를 폭발시키는 모습을 보이곤 했으니. 젊고 매력적인 자비네 형사에게도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자신의 속내나 가족 관계 같은 것은 절대 드러내지 않는다. 슬럼가에 거주하는 치매에 걸린 어머니가 늘 마음에 걸리기 때문. 그밖에도 뒤랑에게 밀렸다는 열등감을 갖고 있는 프랑크, 사내 커플로 공사구별을 혼동할 거라는 주변의 따가운 시선에 반발하고 있는 페터와 도리스 커플 등 다들 약간씩의 핸디캡을 지니고 있는데 이는 추리물에 등장하는 심신이 균형을 이룬 안정감 있는 경찰, 전지전능한 해결사로서의 모습과는 한참이나 거리가 있어 보여 상투적인 캐릭터에 식상해진 독자들을 신선하게 자극한다.

 

이렇게 일관성 있고 완벽한 짜임새를 갖춘 작품이 두 명의 작가에 의해, 그것도 전혀 의도되지 않은 돌발적 요인에 의해, 씌어졌다는 사실이 놀랍다. 원작자인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돌연한 죽음으로 그의 열렬한 독자였다가 나중에 추리 작가로 등단한 다니엘 홀베가 엉겁결에 나머지 부분을 집필하게 된 것이니. 그럼에도 완성도 높은 매끈한 작품을 만들어내었다는 게 다시 생각해봐도 정말 대단한 일이다. 그런데 더 인상적이었던 것은 후반부를 집필한 다니엘 홀베가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앞부분에 대한 독자들의 격려성, 혹은 비난성 댓글을 참고하여 작품을 완성했다고 밝히고 있는 점이다. 그러므로 [신데렐라 카니발]은 작가와 독자의 상호 감응이 낳은 공동창작물인 셈이다. 독자들의 견해를 수용한 것은 물론 다니엘 홀베 자신도 작가이자 독자였으니 말이다. 요즘 얘기되고 있는 집단지성이 발휘되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이 작품은 추리소설사에 하나의 기념비적 위치를 차지하게 될 듯하다. 추리소설의 전형적인 미덕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예술성이 가미된 독특한 톤에다가 용의자뿐 아니라 경찰관들의 아픔과 인간미를 그리고 있는 등 새로운 감각과 상상력을 듬뿍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만으로도 추리소설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고 상찬받을 만한데 더 결정적으로 주목해야 할 부분은 작품 완성 과정이다. 원작자의 사후에 독자가 나머지 부분을 완성하여 하나의 완결된 작품으로 만들어냈다는 특이한 작품이력은 명예의 전당 헌정 감으로 충분하다 하겠다. 그런 측면에서 [신데렐라 카니발]은 안드레아스 프란츠 작가 개인에게나 추리소설사에 있어서 뚜렷한 획을 그은 작품으로 길이 남을 것이다. 추리소설을 읽는 이라면 누구든지 이 일을 두고두고 입에 올리며 이 작품을 기억할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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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문 2013-09-24 17: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예문입니다.^^ [신데렐라 카니발], [영 블론드 데드]에 이은 안드레아스 프란츠의 신작 [12송이 백합과 13일간의 살인]이 출간 전 이벤트로 '인터파크 북앤'에서 독점 연재되고 있습니다! 댓글 추첨 도서 증정 이벤트 진행중이오니 연재에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전작보다 훨씬 더 흥미진진하니 기대하셔도 좋아요^^
 
오페라의 유령
가스통 르루 지음, 최인자 옮김 / 문학동네 /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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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지나치게 통속적인 규정 같지만 [오페라의 유령]은 아름다운 프리마돈나 크리스틴 다에를 두고 라울과 에릭이 펼치는 삼각관계를 다룬 러브스토리이다. 그런데 사랑을 그린 여느 작품과 달리 기괴하고 음울한 분위기가 전반에 깔려 있다. 스토리라인을 주도하는 에릭의 그로테스크한 외모부터 공포와 엽기를 불러일으켜 섬뜩하게 만든다. 게다가 수시로 터지는 예측불허의 사건들은 하나 같이 상상의 한계를 일탈한 것이어서 읽는 내내 불편하기만 하다. 최악은 다에를 향한 에릭의 과도한 집착이었다. 교묘하고 집요하면서 때론 인간적 연민에 호소하는 모습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다. 처음엔 음악 천사로 알고 일순 끌리기도 했던 다에도 진저리를 치며 거절하지만 에릭에겐 소용이 없었다. 오로지 자신의 간절한 마음을 바치면 언젠가 받아 주리라는 믿음으로 에릭은 끝까지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다. 하여 다에에겐 에릭의 사랑, 아니 집착이 너무 아프게 다가왔을 밖에. 자칫하면 자신은 물론 사랑하는 이까지 잃을지 모른다는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했으니.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면 사랑에 아픔이 없을 수 없는 법. 모든 게 술술 풀리기만 한다면 이를 두고 사랑이란 아릿한 이름을 붙이기 어렵지 않을까? 그건 그냥 일상적인 즐거움이나 행복일 테니. 열등감으로 점철되어 사회와 불화하며 자신만의 꼬치 속에 웅크리고 있던 에릭도 다에를 만나면서 아이 같이 순진무구한 마음이 되어 지극한 순정을 바치게 된다. 다만 상대를 아프게 한다는 것을 깨닫지 못했을 뿐. 사랑에 빠지면 누구나 타인의 입장을 헤아리는 것보다 자신의 감정에 충실해 일순 눈이 멀어버리니 말이다. 하지만 에릭도 끝내는 마음을 정리한다. 라울과 다에의 사랑을 인정하고 물러나며 다에의 호의를 바라는 것으로 만족한다. 하여 에릭의 집착, 다에의 아픔도 결국은 사랑이 아니었을까? 그들만의 방식으로 불태운 사랑으로 내겐 다가온다. 그래서 에릭을 동정한다. 아니 그의 심경에 동감한다. 그 동감의 정서 속엔 그가 지닌 천상의 재능에 매료된 측면도 있다. 그는 치명적인 매력을 지니고 있었다. 에릭은 예정되어 있는 파국을 슬기롭게 세팅한다. 분노와 울분을 외적으로 표출하지 않고 스스로 안고 간다. 다만 다에의 사랑을 확인하는 것으로 만족한다. 그런 에릭에게서 인간미가, 사랑의 감정이 읽힌다. 그 또한 매력적이다.

 

 

에릭을 동정한다. 아니 그의 심경에 동감한다.

 

사랑의 감정이 아무런 장벽이나 갈등 없이 처음부터 순탄하게 이루어지기만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나 세상사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환경이 허락하지 않는다든가 일방이 마음을 열지 않는 등 갖은 난관이 가로막기 십상이다. 에릭은 다에에게 뜨거운 사랑의 마음을 전하지만 얼음같이 차가운 다에의 태도에 마음이 무너진다. 그러면서 자탄에 빠진다. 흉측한 외모, 세상과 어울릴 수 없는 자아를 부여잡고 울부짖는다. 내게도 그런 시절이 있었다. 나를 바라보지 않는 그녀, 아니 보고도 없는 사람 취급하던 그녀, 물론 그녀는 타인과 같은 정도의 친절은 베풀었다. 그리고 내 친구를 향해 끊임없이 다가가던 그녀, 그런 그녀에게 차마 심경을 털어놓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그녀도 내 마음을 분명 읽고 있을 텐데 일말의 여지도 없이 냉담하기만 했다. 서글픈 심경을 안고 군에 입대를 하였다. 그리고 논산훈련소에서 맞은 휴식시간에 노래일발 장전을 주문한 조교의 강권에 못 이겨 내 심경을 담은 한 곡을 뽑았다. [사랑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네~] 다들 울렁거리며 속으로 따라 부르는 듯했다. 그렇다 에릭만 그런 게 아니고 많은 이들이 이런 아픈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그를 동정한다. 아니 동정이란 말보다 그의 심경에 나도 동감한다고 전하고 싶다.

 

에릭에게서 프레드 머큐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밤이면 불빛을 찾아 그게 어떤지도 모르고 막무가내로 달려드는 나방, 곧 최후를 맞을 텐데도 열에 들떠 무작정 나아간다. 그런데 달리 보면 불빛이 아름답고 매력적이기에 이들을 흡인할 수 있지 않았을까? 에릭에게도 그런 치명적인 매력이 있었다. 그랬기에 다에는 천상에서 내려온 음악 천사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에릭의 지도를 받고 다에는 오페라 하우스의 프리마돈나로 우뚝 서게 된다. 처음 음악 천사 에릭을 접했을 때 언뜻 겹치는 얼굴이 있었다. 그룹 퀸(Queen)의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의 그림자가 어른거렸던 것이다. 네 옥타브를 넘나드는 폭발적인 가창력에 서정적인 우수에 젖은 필, 거기다 불꽃같은 삶을 살다 요절한 이미지까지 에릭과 묘하게 오버랩되었다. 둘 다 극한까지 넘본 탐미주의자였다. 프레드 머큐리의 [Bohemian Rhapsody] 나 [Love of my life]를 음미해보면 천상의 목소리가 이런 게 아닐까 무릎을 치게 된다. 에릭은 음악적 재능 못지않게 건축가로서의 안목, 발명가로서의 재기발랄함도 갖고 있는 천재였다. 그런 에릭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경원시하면서도 단호하게 내칠 수 없었던 것이다. 물론 다에도 그의 자장에서 헤어나지 못했고.

 

지나친 집착은 파멸을 부르고...

 

그러나 지나친 집착은 결국 파멸을 부르는 법이다. 평범한 이들과 뇌구조가 다른 이들은 우리들 상상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는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다에를 어떻게든 취하려는 에릭은 결국 여러 건의 살인을 저지르며 오페라 하우스를 공포로 몰고 간다. 간절하게 다에를 지키려는 라울은 지하세계에 진입하였다가 에릭이 설계한 고문실에 갇혀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며 스스로를 교수하는 극단적인 상황에까지 처한다. 이때 사랑하는 이를 살리기 위해 다에는 에릭과 처절한 두뇌게임과 몸싸움을 불사한다. 더 이상 나갈 데 없는 파국에 이른 것을 알아차린 에릭은 마지막 선택을 하게 된다. 파멸은 이미 예정된 것이기에 피할 수 없을 터, 에릭은 결국 다에가 납득할 수 있는 타협안을 내고 다에의 동의를 받아낸다. 그리고선 심경을 정리한다.

 

너무 아픈 사랑이었지만 그래도 사랑이었다.

 

오페라의 유령으로 불린 음악 천사 에릭은 드디어 최후를 맞는다. 그리고 다에도 약속을 지킨다. 그가 건네주었던 반지를 에릭의 손가락에 끼워주며 화해한다.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그들 나름의 사랑의 방식으로 소통한 셈이다.

 

여기서 에릭, 그의 인간미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그는 괴물이 아니었다. 사랑을 갈구하다 현실에선 이루지 못하자 그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전하며 생을 마감했다. 다에, 그녀도 사랑을 아는 자였다. 에릭의 곡진한 마음을 결국은 받아준 것이니.

 

하여 [오페라의 유령]은 너무 아릿한 러브스토리이다. 너무 아파 감히 사랑이라 부르기 어려운 얘기다. 그러나 파탄으로 치닫기는 했지만 끝내 사랑하는 이를 해치지 않고 지켜주고 또 상대를 마음으로 인정하며 받아들인 것이기에 사랑이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에릭과 다에, 그들 사이의 고뇌와 아픔, 그것도 결국은 사랑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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