캔들 플라워
김선우 지음 / 예담 / 2010년 1월
평점 :
품절


1. 캔들이 플라워가 되는 순서

 

김선우 시인이 촛불집회에 대한 장편을 연재한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 약간 의외여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고요한 불교적 세계관에 입각한 부드러운 모성을 노래하던 작가가 아직도 격동의 여운이 남아 있는 치열한 현장을 그려내려 하다니. 그럼 르포 작가처럼 취재 결과를 보고하겠단 말인가, 너무 참여적인 건 아닌가 하는 걱정이 앞섰기 때문이다. 그러나 넷 상에 올라온 앞부분 몇 편을 읽어보다가 그게 기우였다는 걸 단박에 알았다. <캔들 플라워>는 눈 부릅뜨고 분기탱천하여 현실을 고발하고 봉기를 선동하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내면을 오롯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자던 우리의 감성을 부드럽게 일깨워 세상 일그러진 것들의 실상을 또렷이 읽어내고, 여리고 약한 것들을 따스하게 감싸 안는 모성 본능을 유감없이 발휘할 수 있도록 이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일관되게 생명, 그리고 그것을 에워싸고 있는 생태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캔들(촛불집회)에서 플라워(생명)을 도출해내고 있었던 것이다.

 

캔들이 표상하는 분노와 저항의 뿌리에는 감성, 즉 몸의 소리 마음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 이런 것들에 민감하지 않고는 세상 어떤 일에도 무덤덤 넘어가기 십상일 터. 반면 내밀한 음성을 들을 줄 아는 자는 자연스런 감성의 흐름을 거스르는 폭압적인 처사에 도저히 눈 감을 수 없을 것이니까 말이다. 이렇게 눈 뜬 이들의 공감과 연대가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새로운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는 과정을 김선우는 보여주고 있었다. 촛불들은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라는 당면 시사 현안에 대한 의견 표출을 넘어 이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존중하는 일상의 정치를 지향하게 된다. 가녀린 것을 먼저 사랑하고 생명의 손길이 배어 있는 온갖 것들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생태와 생명에 대한 경외로까지 의식의 영역이 확장되고 심도가 도저해진 것이다. 이런 감수성이 레인보우 산의 분꽃을 그리워하고, 숙자씨 집에 핀 박꽃을 경탄어린 눈길로 바라보게 하였던 것이다. 하여 지오는 깨닫는다. 플라워,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아는 곳은 어디나 레인보우인 것을. 지오의 입을 빌어 김선우는 결곡하게 말하고 있었다.

 

 

2. 분노와 저항이 일상화된 한국 사회

 

2008년 봄 평범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기 시작한 것은 이례적인 일이 아니다. 그만큼 한국 사회가 구조적 모순이 만연하고 이에 대한 분노와 저항이 일상화되어있기 때문이다. 민기는 지오 못지않게 반짝거리는 아이지만 열악한 환경에 찌들어 결기 가득한 애늙은이가 되어 있었다. 0교시 수업, 우열반 편성, 강제 야자, 영어몰입교육, 학벌만능, 입시지옥에다가 권위주의적 정치 문화가 지배하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은 머리 둘 곳조차 없을 지경이니까 말이다. 조금만 다른 의견을 제시해도 빨갱이로 매도되는, 다름을 원천적으로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이기에 자연스레 대응방식도 격렬해질 수밖에. 하여 아이들은 지오가 깜짝 놀랄 정도로 이미 의식이 웃자라 있었다. 국가를 상대로 토론을 벌일 정도로.

 

한국 정부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결정한 과정은 우리 사회의 이러한 단면을 여실히 보여준 사건이었다. 여론 수렴도 없이 일방적으로 굴욕적인 조건의 협상 타결이 이루어졌을 때 많은 국민들은 합리적 근거를 들어 그 부당성에 대해 이의제기를 했지만 정부에서는 전혀 귀 기울이지 않다가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된 연후에야 내용에는 문제가 없지만 소통 과정에 일부 잘못이 있었다는 식으로 발뺌을 하는 행태를 보인 것 말이다. 그 이후에도 촛불 민심을 수용하겠다고 해 놓고선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밀어붙이고 있는 것을 보면 이곳이 과연 문명사회인가 하는 회의가 들 정도이다. 하니 이런 지경에서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행동방식은 극렬하게 저항하거나 아니면 아무 꿈도 없이 무기력하게 순응하며 살아가는 좀비의 삶, 두 가지 외에 다른 대안은 없다 하겠다.

 

 

3. 생태적 감성의 자연스런 발화, 촛불

 

그런데 시민들이 촛불을 들게 된 것은 이런 폭압적인 지배 방식과 터무니없는 협상 과정이 계기가 되기는 했지만 시민들의 감성적 분별력도 근원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하겠다. 세상 잇속을 떠나 인간 본연의 내밀한 소리, 가슴으로 전해지는 떨림에 자연스레 몸이 움직였던 것이다. 촛불들은 그렇게 민감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기에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것들을 고스란히 포착할 수 있었고 이에 대해 생리적으로 거부 반응을 보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캐나다 밴쿠버에서 막 한국에 도착한 지오도 여리고 부드럽지만 놀랄만한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기에 절로 시위에 동참하게 되었다. 단번에 그들의 마음을 읽고 자신도 교감했던 것이다. 레인보우산, 그 원초적 감성과 직감으로 모든 것이 가능한 환경, 모성적 생태에서 자랐기에 인위적으로 왜곡된 모습은 바로 알아차릴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면서 자신이 그동안 얼마나 온실 속에서 안온하게만 길러졌는지 깨닫게 된다. 그리고 이제 판이하게 다른 상황 앞에 맞서는 용기를 내게 된 것이고.

 

이렇게 감성이 부르는 소리를 외면할 수 없었던 이들이 하나 둘 촛불을 들기 시작하여 서서히 퍼져나가더니만 드디어 경계가 없이 흘러넘치며, 자신을 밝히고 자기 주변을 밝혀 마침내 아주 환하게 밝아지는 세상을 만들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생생하게 체험한 촛불의 온기가 세상사 모두 귀찮게 여기고 자신만의 세계에 침잠해있던 희영에게까지 전해지게 된다.

 

 

4. 촛불들이 플라워를 발견하다

 

촛불을 밝히고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이며 다른 이들과 연대하는 가운데 촛불들은 자신들의 행동이 단순히 광우병 쇠고기 수입 반대만을 위한 것이 아님을 서서히 알아차리게 되었다. 그것은 결국 살아 있는 모든 것을 귀하게 여기고 사랑을 베풀기 위한 것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마치 아름답게 만개한 플라워를 대하듯이.

 

그러면서 그 동안 지나쳤던 것들이 하나씩 눈에 들어오게 되었다. 숙자씨가 돌보던 개, 보리가 상처투성이에 심장사상충 감염으로 생사의 기로에 섰을 때 희영은 어떻게든 살려보려 동분서주하다 생면부지 초면인데도 선뜻 수술비용 절반을 빌려 주겠다는 연우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버려진 개들에게 빚이 있다는 연우 친구 수아도 알게 되고.

 

그리고 옆에 있는 이들에게도 눈길이 가 그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사람인지, 소중한 존재인지도 알아차리게 된다. 지오는 자신이 간절히 찾고 있던 또 하나의 분신이 민기인 것을 비로소 알게 된다. 지오가 일곱 살 때 그 애의 부재를 인정하고 견뎌보려다 결국 과부하가 걸려 일주일간의 정전 상태를 겪었듯이 민기도 세 살 때 화재로 일종의 암전을 경험하였던 것까지.

 

이 사랑이 날아가 버릴까 봐 두려워. 왠지 모르겠지만 금방이라도 바스라질 것 같은 유리잔을 깨문 것처럼 마음 어딘가가 아파.(268)

 

그런데 지오가 어떻게 민기를 자기의 분신, 꿈속에서 보았던 바유로 알아보았을까?

 

키스, 키스를 한 순간 알았어. 내가 왜 그 아이의 아픔을 고스란히 내 아픔으로 느끼고 있는 것인지. 고통스러워하는 그 아이를 보는 게 너무 고통스러워서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소리를 질러야 할 만큼 왜 내가 그렇게 아팠는지, 키스를 한 순간 또렷이 모든 것이 떠올라왔어. 내 꿈속에 찾아와 발가벗고 놀던 그 아이가, 그 아이 몸의 구석구석 내가 너무나 잘 알고 있는 그 모든 촉감과 냄새들이. 꿈에서 내가 그 아이와 나누었던 키스의 느낌이 고스란히! 아무런 말도 설명도 필요 없었어. 화상으로 지워진 반달 점 같은 거 확인해 보지 않아도 단번에 알 수 있었어. 그 아이 바유. 바람의 아이. 내 짝꿍.(355)

 

플라워를 발견한 이들은 아현동 숙자씨네 박꽃의 아름다움에 목이 멘다. 마치 촛불처럼 해 저물녘 망울을 터뜨리기 시작해 밤 동안 피어 있는 그 뽀얀 박꽃을 말이다.

 

 

5. 이제 레인보우를 바라보게 되다

 

지오는 캐나다를 떠나는 순간부터 레인보우 산기슭에 피어있는 분꽃이 간절하게 그리워 그 빼어난 아름다움이 늘 눈에 선했는데 숙자씨네 박꽃을 보고 나자 마음이 풀리게 되었다. 그 도저한 아름다움 앞에 모든 그리움과 시름을 놓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여기도 레인보우라는 걸 깨닫는다. 플라워가 만개한 곳, 사람이나 꽃이나 아름다운 이들이 함께 하는 곳이라면 어디나 레인보우라고 말이다.

 

내 귀에 사그락사그락 무언가 아주 엷게 비벼지는 소리가 들려왔어. 엄마 뱃속에서 나와 바유가 서로의 솜털을 만지고 있는 것 같은 아주 보드랍고 환한 소리. 콩닥콩닥 여린 심장이 뛰고 있는 것 같은...따뜻한...오, 대문 옆이 환해지고 있었어. 꽃이 하얗고 보슬보슬한 꽃들이 피고 있는 거야, 박꽃이!(358)

 

희디흰, 투명한 흰빛이 박꽃 속으로 비쳐들고 있었어. 흰 오각형 별모양을 닮은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무게감 없이 가볍고 얇실한 꽃들이 공중에 떠 있는 듯, 그렇게 박 넝쿨에 매달려 피고 있었어. 페인보우에서 내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달이 뜬 여름밤에 피는 꽃. 박 넝쿨을 찾아 줄기를 만져보니 생긴 건 호박넝쿨과 아주 비슷한데 촉감은 융단처럼 부드러웠어. 너무 부드러워서 깜짝 놀라 무언가 떨어뜨릴 것처럼.

아, 곧이어 거짓말처럼 눈앞이 어른거리기 시작했어. 어디선가 공기의 결이 팔랑, 팔랑, 팔랑거리기 시작하더니 나비들이 몰려오기 시작하는 거야. 밤에 웬 나비들이지? 자세히 보니 날개도 작고 빛깔도 좀 칙칙한 못생긴 나비들인데 환한 보름달빛 속에서 희게 팔랑거리며 박 넝쿨을 향해 오고 있는 거였어.

“박각시들임메.”(359)

 

하여 지오는 어디에 있건 어떤 상황이건 이런 감성을 공유하는, 생명과 생태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생각하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연대할 수 있으리란 걸. 그리고 함께 새로운 세계를 열어나가야 한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한국에서 내가 만난 레인보우를 품고 천천히 홀로 캐나다의 레인보우에 도착하고 싶어. 앞으로 내가 만들어야 할 레인보우를 생각하면서(350)

 

레인보우, 그 곳은 생태적 감성으로 충만한 이들이 연대한 자연의 이치에 순응하는 섭리의 영역이라 하겠다. 서로 연결되어 있는 둥글고 환한 생명의 공간인 것이다. 이제 지오를 비롯한 촛불들은 그곳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분꽃이 아기자기 피어나고 박꽃 환하게 만개한 가운데 생명과 생태를 이야기하며 이를 한껏 누리는 이들이 더불어 이룰 세상 말이다. 하여 김선우는 지오의 입을 빌어 이렇게 플라워가 만개하여 아름답고 환한, 레인보우에 대해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모든 것의 근원은 캔들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임도. 촛불 감성들이 공감하고 연대하는 가운데 이렇게 아름답고 맑은 본연의 레인보우가 성큼 우리 앞에 떠올랐기 때문이니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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