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천하무적 아르뱅주의
신광은 지음 / 포이에마 / 2014년 2월
평점 :
한국교회는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한국교회를 새롭게 조명하여 미래를 향해 달려가고자 하는 몸부림을 볼 수 있다. 무엇이 한국교회를 이끌어갈 것인지에 대한 많은 논란이 있지만 앞으로가 기대된다.
저자는 장로교에서 오랫동안 교회생활을 했다. 맹목적인 교회생활에서 새로운 신앙의 길로 접어들었다. 그는 침례교와 선교단체에서 그동안 배우지도 못한 경험들을 하게 된다. 저자는 한국교회에서 일상적인 활동에서 벗어나 새로운 활동을 추구하고자 했다. 장로교는 칼뱅주의이다. 성결교, 감리교 등은 아르미니우스주의이라고 알고 있다. 이는 구원관에 대한 작은 차이가 있다. 칼뱅주의에서 말하는 구원은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다. 즉 예정론에 따른 구원관이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에서는 한번 구원이 영원하지 않다고 한다. 구원을 잃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행동에 따른 책임론을 보는 것이다. 칼뱅주의에 대한 오해는 구원이후에 삶에 대해서 구체적인 고민을 함께 나누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칼뱅의 의도를 잘못 이해하는 점에서 오는 오류이다는 평가를 낳는다. 또한, 아르미니웃
한국교회의 변질에 대한 고민에서 나오는 저자의 고민을 이 책에서 다루고 있다. 한번 구원이 영원한 구원이라는 교리적 가르침이 오늘날 한국교회를 변질시켰다는 것이다. 구원 그 이후의 삶에 대해서 다루지 못했기에 한국교회는 병들게 되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값싼 은혜"라고 한다. 하나님이 은혜가 값싼 은혜일까?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교회를 가득채운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은혜를 복이라는 것으로 변질시켰다.
저자는 그릇된 구원관 즉, 구원의 확신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참된 회개를 바탕으로 자신을 버리는 구체적 삶의 변화가 구원의 확신을 갖는 이들의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신앙의 찬된 모습임을 말하고 있다.
현실적 안주에 밀려온 한국교회의 병폐가 무엇인지를 함께 공유하고 나누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는 우리가 충분히 읽을 수 있다. 저자는 새로운 학문적 영역을 펼치고자 함이 아니다. 칼뱅과 아르미니우스를 접목하는 새로운 영역을 만들고자 함이 아니라 구체적인 구원관과 속죄론에 따른 견인을 이루자 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혼란한 시기에 살아간다. 기독교의 참된 모습을 찾을 수 없다.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가 진정한 기독교인줄 알고 살아왔다. 그러나 우리가 속해 있는 기독교의 모습은 변질된 것임을 우리는 스스로 인정한다. 무엇이 이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한 고민들을 저자는 했던 것이다.
저자는 새로운 구원론에 대한 정립을 네 가지로 요약했다. 기독교의 방향성을 다시금 제시한 것이다.
저자는 한국교회를 사랑한다. 그러나 때로는 새로운 3지역의 신학적 결합이 지금까지 논란이 되었던 칼뱅과 아르미니우스의 격돌을 좁힐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긴다. 학문적 충돌을 야기하는 발상이 때로는 새롭다. 우리들은 저자의 고민에 함께 빠져 기독교인의 삶에 대해서 진정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