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어보는 플라토노프의 작품.
첫장을 펼치면서부터, 나를 반겨주는 우수어린 아름다운 문장 때문에 놀라면서
읽어간다. 한 줄 한 줄이 흡입력으로 내 마음을 빨아들인다.
이제 읽기 시작했지만, 자꾸만 <백년동안의 고독>이 함께 그려진다.
그는 쉼없이 지상을 떠돌고, 모든 마을에서 슬픔을 만나고 낯선 무덤 앞에서 울기를 원했다. 25
그가 아무리 많이 읽고, 생각을 할지라도 항상 그의 내부에는 어떤 텅빈 공간이 남아 있었으며, 바로 그 빈 공간을 통해 묘사되지도 않고, 이야기될 수도 없는 세계가 불안한 바람에 의해 지나가고 있었다. 92
그는 나무나 대기, 길을 가져다가 자기 안에 넣고 싶었는데, 이들의 비호를 받으면 죽지 않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130
밤의 긴 침묵 속에서 코푠킨은 흡사 고독으로 식어 가는 것처럼, 알아차리지 못하는 사이에 자신의 감정의 긴장을 잃어버렸다. 261
식탁위에서 자명종이 울리자, 슈밀린은 잠시 자명종을 질투했다. 왜냐하면 시계들은 항상 노동하고 있지만, 그는 잠잘 때 자기 삶을 멈추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드바노프는 시간을 질투하지 않았다. 그는 축적된 자신의 삶을 느끼고, 자신이 시계의 속도를 앞지르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274
멀리서 바라보면 푸파에프는 흉포한 얼굴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평온하고 상상력이 풍부한 눈동자를 지니고 있었다. 그의 커다란 머리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우울해 하고 있는 어떤 침묵하는 지혜의 태생적 힘을 분명하게 보여 주었다. 276
체푸르니는 그 무엇에 대해서도 슬퍼하지 않았ㄷ다. 왜냐하면 그의 도시 체벤구르에는 삶의 행복과 진리의 정확함, 그리고 존재의 슬픔이 필요 정도에 따라 저절로 발생하기 때문이다. 293
그곳에서는 이미 땀도 흘리지 않고 흥분된 육체적 흔적의 물질도 나오지 않는 건조한 늙음에서 나오는 청결한 냄새가 났다. 298
그 여자에게서는 느리고도 서늘한, 정신적 평온함이 풍겼다. 335
체벤구르에서는 모든 사람을 위하여, 그리고 개인을 위하여, 전 세계적 프롤레타리아로 선언된 태양만이 일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꼭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341
체벤구르는 느즈막이 잠에서 깨어났다. 체벤구르의 거주자들은 수 세기 동안의 억압으로부터 휴식을 취하고 있어, 아무리 잠을 자도 충분하지 않았다. 혁명은 체벤구르 읍에 잠을 쟁취해 주었으며, 영혼을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작업으로 만들어 주었다. 343
텅 빈 장소들에게는 시들어 가는 나무들이 슬프게 서 있었다.
코푠킨은 시들어 가는 나무들을 가리켰다. "악마들, 자기들에겐 공산주의를 건설해 놓고, 나무들에겐 공산주의를 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단 말이지!" 356
무덤을 다져서 평평하게 만들고, 오래된 정원의 나무들을 이리로 옮겨 와서 심었더라면, 나무들은 자본주의의 잔재를 땅으로부터 빨아들여, 그것을 사회주의의 푸름으로 바꾸어 주었을지도 모른다. 357
루이의 몸에는 실제로 구성과 조직의 통일성이 없었으며, 여기저기 뻗은 가지나 목재의 끈적끈적한 재질을 지닌 채 그의 내부에서 자라난 몸의 각 부분과 수족들은 어딘지 모르게 일치하지 않았던 것이다. 374
저 지치지 않은 둥근 열기여. 태양의 붉은 힘은 영원한 공산주의를 가능케 할 것이며, 먹기 위한 치명적인 필연성을 뜻하는, 사람들 사이의 내분을 일으키는 그 헛소동을 완전히 멈추게 할 것이다. 그러면 사람들을 제외하고 천체가 식량을 키우기 위해 일하게 될 것이다. 388 체푸르니
혁명은 이 장소들을 피해 가면서, 평온한 우수에 젖은 들판을 해방시켰지만, 혁명 자신은 지나온 길에서 지쳐 버려, 인간 내부의 어둠 속에 숨어 버리기라도 한 것 처럼 어디로 갔는지 사라져 버렸다. 503
드바노프가 말했다. "공산주의는 부르주아들 이후 공산주의자들로부터 발생하며, 공산주의자들 사이에 존재하지요. 대체 어디서 공산주의를 찾고 계신가요, 코푠킨 동지? 바로 당신 안에 간직하고 있으면서 말이죠. 체벤구르에선 그 무엇도 공산주의를 방해하지 않고, 그래서 공산주의가 스스로 태어난 겁니다." 539
생각이라는 말을 할 때, 드바노프는 사유가 아니라, 좋아하는 대상들을 계속 상상하는 것에서 나오는 쾌락을 염두에두고 있었다. 549
여자는 살찌고 통통한 몸매를 지니지 않았으며, 심지어 우아했지만 일반적인 성적 매력을 전혀 가지지 않았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세르비노프를 감동시킨 것은 여자가 어딘지 모르게 행복해 보였으며, 호의적이고 공감하는 눈으로 그와 자기 주변을 바라보았다는 점이다. 559
이 여자의 걸아가는 습관이나 모든 행동에는 그 어떤 비굴한 신경증도, 다른 사람 앞에서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것도 없었으며, 드물게 발현되는 열린 평온함의 자긍심이 있었다...그녀는 동반자의 공감에 자신을 적응시킬 줄 몰랐던 것이다. 561
"그럴 수도 있겠죠. 그런데 꽃이 있으면 나는 어디로도 떠나지 않고, 아무도 기다리지 않아요. 꽃들과 함께 있으면, 내가 꽃을 낳은 엄마였으면 하는 감정을 느껴요. 이런 것 없이는 어떻게도 사랑이 나오지 않죠..." 573
그 다른, 꼭 필요한 인간이 이 세상에 온전히 존재하고 있다는 것만으로, 기타 인간에게 그는 진정한 평온과 인내의 원천이 되었으며, 가난의 고귀한 물질과 풍요가 되는 것이었다. 이 세상에 두 번째의, 자기만의 인간이 존재하기에 체벤구르와 밤의 습기는 개개의 고독한 기타 인간들에 오히려 사람이 살 수 있는 편리한 조건이 되었다. 587
"우리는 쓸모를 위해서가 아니라, 서로를 위해서 노동하고 있네." 600
그녀에게는 당신이 바로 이상입니다. 당신으로부터 그녀에게로 어떤 정신적 평온함이 흐르고 있죠. 당신은 그녀에게 효력을 발휘하는 온기예요..."620
*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마음에 퍼지는 아스라한 애잔함...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부터 아스라한 우수를 느끼긴 했었지만,
이렇게 찰나의 반짝이는 햇살처럼, 짧은 온기만을 남긴채, 순식간에 '서로의 공간'이 사라져 버릴줄은... 그 덧없음에 '생각지도 못했던 상실'이 슬프다는 감정으로 다가온다.
혁명과 유토피아, 그 속의 소소한 사람들의 이야기.
공산주의적 유토피아의 모습에 대해 생각해 본적이 거의 없었기에
체푸르니, 사샤, 코푠킨 등 체벤구르를 이루는 사람들의 대화를 들으면서
'공산적주의적 유토피아' 공간에 대해 나도 함께 그려보기 시작했다.
체푸르니의 완성된 공산주의 공간으로서의 체벤구르에 대한 무한한 자긍심을 대하면서
그 곳을 채우는 사람들간의 끝없이 이어지는 '공산주의'에 대한 정의를 조율해 나가는 과정이
체제 개념에 몰입해 보지 않았던 나로서는 좀 낯설고 혼란스러웠다.
결국 서로간의 동지애로 찾아낸 체벤구르의 '공산주의적 유토피아'는
이익을 위한 노동이 아니라, 서로를 위한 노동에 기꺼이 투신할 때
자연스럽게 이루어졌다.
꽃피우면 지는 것이 자연의 순리인 것 처럼
체벤구르의 '서로의 공간'도 꽃피우는 듯 싶더니, 갑작스런 외부침략으로 서리를 맞은 듯 순식간에 져 버린다. 소멸의 공간에서 다시 또 생명의 씨앗이 움트듯, 체벤구르에도 또 다른 봄이 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갑작스런 상실감' 자리에 살며시 떠오른다.
- 뜨겁게 내리쬐는 8월의 태양을 보면서
체푸르니의 '태양의 노동'에 대한 열변이 생각나서
재빨리 빨래를 해 널었다.
태양이 와 닿는 그 자리를 그냥 비워두면 안될 것 같아서...


체벤구르를 천천히 읽고 있는 탓에, 영화를 보면서 <체벤구르>가 떠올랐다. 8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