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냄새  / 박형준

 

동물들은 자기 냄새에 끌려

한생을 살다 가는지,

태풍이 지나간 뒤

담벼락 밑에 앉아

오들오들 떨고 있는 고양이 한 마리

사라진 냄새를 찾아

눈동자를 굴리는 모습 가엾다

도망가지 않을 정도로만 떨어져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자니

그 속에서는 잃어버린 내 냄새도 있는 것 같다

생솔 타는 연기에

눈을 비비며 어머니가 부엌에서 나오면

무쇠솥을 들썩들썩 들어 올리는

펄펄 끓는 밥물 냄새,

나는 고양이의 뻣뻣한 뒷덜리의 털을 따라 내려가다가

녀석의 턱 끝까지 만져 주고 싶다

고양이의 먼 냄새를 맡으며

저녘밥 짓는 연기가 공중에 가만히 머물러 있는

들판을 걸어 집에 돌아가고 싶다

비 그친 후

거짓말처럼 환한 대낮

부들부들 떨고 있는 냄새가

자기 한생을 찾고 있다

 

<불탄 집 / 박형주 시집, 천년의 시작> 중

 

 

 

새 / 이병률

 

새 한 마리 그려져 있다

 

마음 저 안이라서 지울 수 없다

 

며칠 되었으나 처음부터 오래였다

 

그런데 그다지

 

좁은 줄도 모르고 날개를 키우는 새

 

날려 보낼 방도를 모르니

 

새 한 마리 지울 길 없다

 

<눈사람 여관 / 이병률 시집, 문학과지성사>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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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 미하일 레르몬토프

 

인생이 견디기 어려울 때

가슴속에 슬픔이 밀려오면

나 멋진 기도 하나

되풀이하여 암송한다

 

생생한 말의 조화 속에

은혜로운 힘이 있어

그 안에 알 수 없는

신성한 매력이 숨 쉬니

 

영혼에서 짐이 떨어져 나가듯

회의가 멀리로 떨어져 나가고

믿음이 돌아오고 울음이 터져 나오니

이토록 마음이 가벼워라, 가벼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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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 윤동주

 

 

잃어버렸습니다

무얼 어디다 잃었는지 몰라

두손이 주머니를 더듬어

길에 나아갑니다

 

돌과 돌과 돌이 끝없이 연달아

길은 돌담을 끼고 갑니다

 

담은 쇠문을 굳게 닫아

길 위엔 그림자를 드리우고

 

길은 아침에서 저녁으로

저녁에서 아침으로 통했습니다

 

돌담을 더듬어 눈물짓다

쳐다보면 하늘은 부끄럽게 푸릅니다

 

풀 한포기 없는 이길을 걷는 것은

담 저쪽에 내가 남아있는 까닭이고

 

내가 사는 것은 다만

잃은 것을 찾는 까닭입니다

(1941. 9.31)

 

 

 

 

 

 

수목원에서 김응교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의 <윤동주의 마음, 숲의 마음> 인문학 강좌를 듣다

...2013. 10. 5

 

 

윤동주 시인의 별은 지금도 내 마음안에 살아 숨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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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 아침처럼 흉흉한 꿈을 꾸고 일어나

반투명 유리창을 열어 놓는다

기다렸다는 듯이 햇살이 쏟아져 들어온다

 

꿈은 늘 언덕 위로 올라가다 끊긴다

어제는 종일 꽃구경을 한 탓인지

언덕 너머에서 꽃 내음이 실려 오기까지 했지만

 

여느 아침처럼 햇살을 등지고 거실로 향하는 사이

왜 언덕이 서 있어야 했는지는 다 잊어진다

 

오전 일곱 시 베란다 커튼을 젖히고 하늘을 내다본다

엊저녁 먼 산에 걸려 있던 구름 덩어리가 무슨 계시인

듯 코앞에  떠 있다

 

묵묵히 서재로 돌아선다

잠을 설쳐 허리가 결렸지만 돌이킬 순 없다

발길을 멈추고 체중계에 올라간다 눈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는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꽃무늬 벽지에 그림자가 서 있다

가늘고 구부정한 줄기에 커다란 꽃송이가 무겁게 얹혀

있다

 

하루 종일 꽃은 집 안을 배회한다

꽃은 두어 덩이 밥을 먹고 쓸쓸히 설거지를 한다

소파에 앉아 잠깐 졸다

눈가에 맺힌 이슬을 슬쩍 훔친다

 

여느 밤처럼 누워 꽃은 잠을 청한다

언덕이 나타난다

 

 

 

 

 오랜 시간 동면중에도 제 향기를 잃지 않고, 화사하게 살아나는 꽃들의 마음이 참 곱구나...

먼 시간속을 뚫고 나에게 달려오는 내 마음냄새

이 꽃송이 하나하나에 피어나는 얼굴들. 꽃은 기억이구나

(오래 전 찍은 사진들을 둘러보다, 퇴색되지 않은 선명함에 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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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뱀의 독서 / 반칠환

 

꽃뱀이 풀밭에서 신간을 읽고 있다 며칠째 기다려

온 참개구리 자서전이다 평생 물잉크로 써 왔다는 얼

룩무늬 가죽 양장본이다 꽃뱀은 소문난 정독가다 어떤

서적도 한 번 손에 쥐면 머리말부터 꼬리말까지 한 글

자도 빠뜨리지 않는다 모르는 이들은 고작 꽃뱀이 걸

친 무지개빛 목도리를 탐내지만 아는 이들은 지성으로

갈무리된 뱀눈에 한껏 오금저리는 것으로 경의를 표한

다 꽃뱀의 꿈도 멋진 자서전을 하나 쓰는 것이다 비늘

한 칸 한 칸 또박또박 적어보다가 꽤나 구불구불한 제

팔자에 몸서리치기도 한다 더러 쓰다가 막혀 구깃구깃

벗어던진 원고가 돌 틈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꽃뱀은

한 권 다 읽을 때까지는 절대 다른 책을 사지 앟는다 올

봄 새로 펴 낸 신간들이 퐁당퐁당~ 숲 속 연못 도서관

에 안심하고 납본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사마귀 / 반칠환

 

직업은 망나니지만

모태 신앙이다

방금 여치의 목을 딴

두 팔로 경건히

기도 올린다

 

 

 

외로움이 구원할 거야 / 반칠환

 

눈 속에 숨어 있던 매화처럼

불타는 가뭄을 삼킨 씨앗처럼

어둠 속에 오래 박혔던 별들처럼

멸종의 족보에서 달려나온 짐승처럼

외로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오래 사람을 잃은 자가 시를 얻듯

오래 쫓긴 산양이 절벽을 넘듯

가는 오솔길이 마침내 숲의 심장에 이르듯

누천 년 별들이 저 홀로 궤도를 걷듯

외로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여명의 새벽이 아름다운 것은

저마다 외로움에서 깨어나기 때문

황혼의 저녁이 아름다운 것은

저마다 돌아갈 사무침이 있기 때문

외로움이 우리를 구원할 거야

 

오래도록 무리 속에 있다가

문득 자신이 보이지 않거든

가라, 너만의 오두막으로

가서, 외로워라

봄마저 잊고, 꽃마저 잊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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