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쓰레기는 누구인가

 

이번 탄핵에 대한 직무정지도 보여주는 의회에 대한 요구와 더불어 처벌에 대한 수위를 한층 높이기를 바라는 사람들도 늘었다는 점이다. 이전 정권들에 비하면 그러한 수위 높은 비난에 대한 차원도 올리기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중심에는 부르주아 정권 타도와 사형에 대한 필요를 요구하기도 한다. 그러나 사형제는 낙태죄와 마찬가지로 무고한 사람들에 대해서만 부과했다는 점도 상기해볼 필요는 있다고 본다. 그리고 모든 헌법 심의란 어떤 판단과 결과를 내릴지는 함부로 장담하거나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형에 대한 도입으로부터, 무궁무진한 숙청이라는 벌로부터, 온갖 죄를 부과했던 지난 국가 정부들에 대한 형태들과 상습적인 고문과 협박까지 가했던 사형제가 아니고, 부르주아에 대해 선고하고 부과하는 사형이 아니라, 지난 정부도 무고한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부과했던 형법 선고에 대한 처벌과 엄벌만 가하던 잔인무도한 자본주의 국가를 보더라도, 합법적인 범죄는 바로 부르주아 전쟁이라는 지배 계급 간 제국주의 경쟁이었음을 또 드러내고는 말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과거 프랑스에서는 로베스피에르도 교육받지 못한 무식한 시민과 국민 반동에 입 맞추어 결국 단두대라는 송장으로 끌려가지는 않았던가.

 

그러나 수정된 의회주의에만 기대지도 않는 소수 프롤레타리아트들에게도, 자주 드는 예시지만 시민 의식이란 가까운 집회 현장에서나, 노동 현장에서도 일해본 적도 있는 노동 국민들로부터는 무언가 도취되거나 취한 사람들도 전봇대에 소변을 눈다거나, 흡연을 하다 가래가 끼였기 때문에 지나다니는 길목에다 침을 뱉는다거나, 할 수 없이 길바닥에다 쓰레기를 내버리거나, 공중 시설에 대한 도덕이란 과연 선진국이라는 수준에도 알맞은지는 잘 모르겠다. 한 청소부도 지적했지만 버리는 사람, 치우는 사람이 분리된 이중적인 사회가 바로 부르주아 시민에 대한 도덕을 말하고자 한다면 그러한 잣대란 바로 앞으로는 위생 교육도 받지도 못하고는, 정작 생활에 대한 자격마저 심사받지도 못한 채로 성장한 증거는 아닐지 심히 의문 삼을 수는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우리는 남을 비난하는 데 더 익숙하기 때문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비판이란 교육 받은 소수 계급들만이 내세우는 부르주아 폭력에 대한 윤리와 도덕에 대한 관념이 아니라, 그릇된 체제에 대한 부정만 깃든 시각에서도 같은 사람으로 부끄러워할 줄도 모르는지. 권위가 아닌 태도로부터 물을 수 있다고 본다.

 

따라서 우리는 종합해서 보아도 자본주의에서 경제적인 성과란 꼭 장기적으로는 밝다고만 말할 수는 없다고 본다. 그리고 역대 부르주아 정부로부터 초래하거나, 처리하지도 못한 채로 정작 버려진 회의 안건들도 무참하다는 사실들도 모든 국제 사회로부터 드러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점에서 각국 정부들도 과연 선진국에서 쌓아 올린 업적에 대해서 환호하고 축하할 수 있을까. 그리고 전 세계에서도 자본주의 체제가 얼마나 무력한 패배를 오히려 보여주는가를 과연 몰라서 그랬을까. 그러한 경제적인 혼란이나, 결정된 공황과 예정된 불황에서도 자본주의가 가진 법적인 효력도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과연 성장했는지를 다시 묻는다면. 우리는 결국 한국에서도 파시스트 폭주를 보았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의회주의를 따라 미지수라고 치부하거나 섣부르게 환원해서 판단하거나, 상대적으로 유리한 정세 쪽으로만 기울이던 사실로 미뤄보아도 더 이로울 수는 있지만 옳지는 못 하다.

 

노동 국민마저 기만한 사형 계엄으로부터 통제하거나, 제어할 수 있는 기능적 존재로만 여겼던 지난 정부들에 대한 행태를 보아도, 형태마저 불확실한 상태로만 머물고 있고, 여전히 그러한 위생 관념마저 또는 정상화라는 범주로만 해석하고 청결 잃은 국가를 보더라도, 같은 관계란 바로 사람이야말로 쓰레기와 똑같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비겁한 죽음에 대한 미련과 집착이 보여 준 취한 사람들에게도, 우리는 조용하게 무산 혁명을 준비하는 사람을 지지하고 있고, 또한 관료 연대나 조직이 어떻게 부패할 수 있는지를 잘 보여준 사례라고 차분하게 다시금 말해본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함부로 나대지 마라.’ 참 좋은 우리 말이다. 쿠데타로부터 내란 모의 뒤로는, 대체로 국민들은 자본 시장과 경제 사정에 따른 국가 원수에 대한 우려는 주로 전쟁에 대한 시행에 있다. 국내에서도 그러한 내란 모의 뿐만 아니라 전쟁법으로부터도 처벌될 수 있음은 물론, 민주주의 요구에 따라서도 헌법에 대한 해석을 이중적으로 바라 본 여당 의원들에게도 모순을 잘 보였고, 권리는 줄어들고 기회를 노리는 일부 과거 야당 의원들도 동참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방으로 압박을 가하는 기존 야당 의원들에서도 그러한 양상들로 나타났다. 늘 혼란을 틈 타 쿠데타로부터 정권을 유지하려는 특성이 아닌 일반적인 속성을 보더라도, 헌법을 위시한 전시 행정 돌입에 찬성할 국민들도 주동자들은 아니던가. 그들에게 국민이란 과도한 애국자들 뿐이었고, 또한 사회·민주로부터 요구할 수 있는 토론 요구 또한 배제한 채로 그리고 빼버린 채로, 국격 뿐만 아니라 태도 역시나 변함 없음을 잘 보여주고는 말았다.

 

1. 퇴장하는 여당 의원들을 보더라도, 그리고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던 기존 야당 의원들을 보노라면, 개판이 된 정치 뿐만 아니라, 그러한 한국 정치가 가진 유치하고, 치사한 상대할 경제적 가치마저 없다고 본다. 해임된 국방부 장관은 원점 타격을 결정해서, 북측에다 선제 공격을 유발하려는 무모한 음모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들려오는 시끄러운 확성기를 비롯한 전시 행정 체제에 대한 모습도 잘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날아오는 풍선에 대해서도 맞도발이자, 대응으로 풍선을 날리는 헛수고를 보더라도, 도발 수위를 높이고, 원색적인 공격을 가하고 단지 쿠데타 내란 모의를 결단한 성격을 보더라도, 따라서 전쟁 뿐만 아니라, 쿠데타를 막고자 하는 여야당 의원들에 대한 협조는 필요하다고 본다.

 

2. 쿠데타는 정권 유지라는 부르주아 독재 뿐만 아니라, 때로는 전쟁에 대한 전시 행정 체제 돌입으로부터 국정 마비 뿐만 아니라 복귀할 수 없는 지경까지 이끌어 놓는 퇴역한 군인들에 대한 언론 협박과 강제된 정치적 결단으로부터 수행된 내전까지 이끌고는 말았다. 그리고 탄핵 국면에서 자진 사퇴와 퇴진이라는 요구 속에서도 그들은 끝까지 도피하고, 침묵하고 숨기는 쿠데타 내란 모의 뿐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혁명이라는 다음 과제마저 배반하려고 했기 때문에 무엇도 양보하거나 약속을 이행하지도, 또 보장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사사로운 정치 복수여서가 아니라 무슨 처벌이든 받아야만 하고, 또한 여태까지도 국민들을 속인 밝혀진 몫에 대한 마땅한 도리라고 본다. 매우 원시적이고, 속물적인 정치적 집단 난교를 벌이고 있다.

 

3. 계엄 지도부를 비롯한 여야당에 대해서도 다음 대선만 치르고자 준비하는 현 시점을 보노라면, 사퇴와 탄핵에 대한 문제는 역시나 안중에도 또한 거론도 없다. 섣부른 판단이 때로는 과오를 부른다. DMZ도 아니고 NLL 군사 분계선까지 넘고자 한 정황에 대해서도 오히려 남한 쪽에서 군사 도발과 긴장을 감행하고 있다는 분위기도 같이 들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문제는 다음 조기 대선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헌법이라는 도덕 질서와 정치법과 세금과 예산 절차까지 빼돌리고는 자의적으로 급하게 아니면 내용도 없이 형식적으로만 진단하거나 결단하고는 자기들끼리만 협의하고, 일제히 똑같이 모의하고야 마는 정당이라는 축도 아닌 이익 집단이자 부르주아 독재로 자명한 사실에 대한 거론으로 부르고자 한다. 그들에게 계급에 대한 의식과 계급 투쟁까지 무마하고는 대의 민주주의로부터 대체하고 바쁜 일터로만 만들어 먼저 모욕하고, 모든 언어까지 파괴하려고 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때로는 자축하는 낡아빠진 연대만 지속할 수도 없다. 우리는 불편한 상태에서도 더욱 침착하고 또 신중하게, 또 할 수 있는 한 직접 민주주의로부터 참가하는 국민이자 또한 인민이라는 이름으로는 바로 닿을 수 있다면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로부터 엄중한 처벌을 요구한다.

 

부디 현실을 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자본주의 사회 내 무산 계급 혁명

 

우리로는 우리식으로, 사회민주주의 대책들과 방안들에 기초해서, 그리고 수정주의 견해들에 대한 복잡한 논의를 차단하더라도, 매우 독립하고, 또 민주적인 토론으로부터 건설했다. 특히 경제 문제에서도 지배 구도와는 다른 이론 구축에 대해서도 동지들과 혁명에 대한 여러 논의를 펼쳐볼 수 있었다. 그러나 상대 진영에서 제기한 여러 논의를 들어봐도 이론 투쟁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그리고 정치 정당에서만 제시한 문제보다 더 많은 임무를 우리 쪽으로는 개시하기도, 더욱 수행하기도 했고, 또한 지면에다 80%를 쓰고 있는 평화 연대 호소로나, 전쟁 반대만을 앞세우는 언론이나 신문들을 보더라도, 정작 내전에 대한 문제와 혁명에 대한 물음을 대부분 제기하지도 못하거나, 또 놓치고는 만다. 그리고 대체로는 단기 정치 현안 및 의석 수 확보 문제로만 나머지 20%를 할애하고 있다! 가당찮지도 않은가!

 

토론과 대책 없는 사회주의 체제 전환. 참 우스운 말이다. 당 조직과 선전을 말하지도 않으면서, 그들로는 똑같이 말로만 떠들고 있는 형국이다. 그리고 타협주의와 기회주의로부터 또 손 잡고는 여러 동지이자 혁명가들을 또한 침묵하게 만들었다는 점은 매우 가소로울 뿐이다. 혁명이란 논리적인 머리로만 사고한다고 해서 이뤄질 수 있는 유치한 장난감 놀이 따위도 아니다. 과연 그들은 현재까지 혁명에 대한 진지한 고찰과 또한 여러 서적들에 대한 노동 교육들에도 헌신하고자 했는가. 노력은 했을 수 있지만 실제로는 아니다. 조직에 대한 원칙, 흐지부지한 당 강령을 제시하지도, 그리고 전개하지도 못했다. 그리고 노동 회의를 개최하지도, 심지어는 교육을 받지도 못했다! 그리고 현 시점에서는 혁명 전개에 대한 논의들은 주로 학자들로부터만 여러 가지로 방법이나 원칙을 전개하거나, 수립하고자 했다. 그러나 그들로는 일반적인 투쟁이나 집회 모의로만 머물렀기 때문에, 정작 중요한 혁명 조직 수립에 대한 문제나 물음을 놓쳤다. 그리고 일부로는 무산 혁명을 지지하더라도, 혁명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으로부터,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 안에서 갇혀 지낸 채로, 목표나 대의를 잃어버리고는 말았고, 운동이라는 양상으로만 머물고는 만다. 그리고 아무도 노동 계급과 심지어는 무산 계급과 연락하지도, 보다 가깝지도 않았다.

 

특히 노동 계급 여러 시위들에서도 볼 수 있지만, 그들은 협상을 위한 단기적인 기획, 활동, 타협을 위한 정책 추진이나 활동가들에 대한 법적 보호만 요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시도들은, 아니 역사적으로도 읽어 볼 때도, 혁명가들은 대학 논의나, 학술적인 태도와는 매우 거리를 두기도 했었고, 그러한 시각들에 대한 한계를 보다 명확하게 짚었고, 또 대결해왔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혁명 논의로는 바로 노동 계급과 무산 계급들과 어울릴 수 있는 혁명 조직과 논의로까지 진전할 수 있을 때만, 비로소 혁명을 모의하거나, 논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할 수 있다면 비합법적인 행동까지 개시할 수 있을 때, 비로소 전투로도 가담할 수 있다.

 

그나마 자본주의 체제가 매우 심각하고, 또 여러 문제들을 생기도록 한다는 점을 아는 사람들로는,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 문제점에서 비로소 배울 줄 아는 사람들로는, 최대한 노동 대중 조직에 대한 연대 조직으로만 호소한다면, 곧바로 기회주의와 운동 전멸로 나타날 수 있다. 그리고 혁명 조직 건설에 있어서도 분열을 지지하는 그러한 시도들에 대해서는 차단할 필요도 있어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생성만을 말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자생적인 노동 조합에만 기대를 거는 여러 지역 연대와 조직들에 대해서도 보다 구체적인 방안들을 검토하고, 정책 수립으로만 머물지 말기를 또 강조하고 요구하는 바이다.

 

현대 프롤레타리아트 전야에서도, 보이는 단결이라는 힘에서 원천이란 과연 무엇인가. 역사적 실패를 단지 두려워하고 있다면, 우리는 무산 계급들에 대한 적들과도 투쟁한다. 그리고 전쟁을 조장하고, 내부를 분열하도록 내세우는 모든 시도들에 대해서는 보다 엄격하게 대하고자 한다. 딱 1년을 되돌아본다. 그들로는 1년이란 파괴를 위해 허비해서 낭비된 시간일지 몰라도. 우리에게 1년이란 준비를 위해 오래 기다린 시간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의무 교육과 대학교

 

여러 일각에서는 입시 제도에 대한 비판은 많다. 그리고 의무 교육으로 해당하는 초중고를 꼭 나와야만 시험을 치를 수 있고, 대학을 나오려면 시험을 쳐야만 한다는 전제가 늘 붙는다. 검정 고시를 제외한 오래된 편견, 야간 자율 학습이라는 학생들에게 강요하던 남아 있는 시험들도, 매우 낡은 방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치려 들었다. 성적에서 멀리 벗어났거나, 진로를 찾지 못한 학생들을 두고는 방황한다고 판단하거나, 자신의 의견을 표할 줄 몰라서, 태도가 불순하다는 단 하나로, 교육은 훈육으로 제어해왔다. 그리고 사실을 감추고, 은폐하는 교육을 배웠으므로, 체제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지도 못한 채로 교육 운동은 까막눈을 고치는 운동으로만, 고작 계몽으로만 늘 끝나고는 만다.

 

사교육 시장에서도, 자본가들은 선생을 겸해서 학생들에게 자본만이 옳다는 생각을 가르치고, 학생들에 대한 차별과 편견을 조장하는 발언들도 자주 가시화됐다. 교육 제도란 늘 정권의 하수인이었고, 소수 선생들만 늘 발언을 했고, 또 요구했다. 대학교에 들어가도, 차기 교수로 임용되고자, 연구 경쟁, 연구 비리, 성폭행 등 학교는 더 이상 배우는 곳이 아니었고, 가르침을 배울 수 있는 곳도 아니다. 교수들은 교재를 가지고, 학생들에게 배움을 나누고자 하지만, 그러한 교재들도, 모두 자본주의라는 제도로부터 낡은 수업들과 취업에 대한 상담과 의사를 묻고자, 단지 '형식적인' 수업이었으므로, 아무리 토론이라는 '선진적인' 수업 방식이라고 하더라도, 학생들은 대학교를 4년제 도서관으로 나오고, 졸업을 위한 이수 과정으로도, 과도한 외국어, 쓸모 없는 논문들에 대한 자격을 부여하고는, 체제로부터 기여할 수 있는 '인재'들을 한데 모아, '융합'해서 뒤섞는다.

 

국가는 의무 교육을 행하지만, 이면에는 자본가들로부터 답습한 착취라는 차별을 배우고, 계급을 보지도 못하고, 오직 안전한 사회에 대한 경제적인 울타리만 존재한다고 보거나, 아무도 혁명에 대한 실천을 말하지도 않고, 마르크스를 무용하다고만 말한 까닭은 무엇이던가. 바로 자본주의 아래로부터 수행된 교육 때문이다. 그리고 즐거운 보람이나 하나 없는, 노동이라는 대가로부터 생존만이 남은 취직이라는 '의무 교육'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가난한 프롤레타리아트마저, '형식적인' 시험 대상으로만 다룬다.

 

군대

 

군부심이란, 군대를 다녀오지 못한 사람들에게는 또 다른 차별이다. 그리고 심화된 계급으로 차별하는 법을 배운다. 그곳에서는 모든 것이 은폐된다. 사실도, 진실도, 진리마저도, 전역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리고 오랫동안 군생활을 복무했다는 이유라는 건, 단지 애국심만을 위해 국가로부터 봉사한다는 낡은 '봉건적인' 계급이란 말도, 군대에서는 여러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 총과 칼로, 제국주의로부터 국가에 종사한다. 여러 경찰들도 학살과 시위를 진압하고자 입막음하고, 시위자를 향해서는 적이라고 부른다. 정치적인 자본가들은 말한다. 군대가 있어 튼튼하다고. 그러나 제국 간 전쟁에서도 죽으면 남의 새끼들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


2025. 04. 16. 


부르주아라는 대자본가 아버지, 프티부르주아라는 소시민 어머니

 

자본주의 논리이므로. 거꾸로도 같다. 자산을 가지고 있는 소시민들은, 부르주아지를 지지할 수 있다. 대체로는 자녀들에게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적절한 환경, 장기적인 경제 전망을 고려해서 판단한다. 훗날 법적으로는 상속세를 부과하기도 한다. 자본가들은 '로펌'을 가졌고, 전문 변호인단들로 구성한다. 큰 이혼이나 파혼이 아닌 이상으로는, 법적인 다툼들이라는 여러 소문이라는 '스캔들', 작은 소문이라는, '가쉽'거리를 짧게 다루는 건 바로 언론들이다. 여기서 주류나, 비주류 언론이라는 매체로는 구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전체 언론들은 바로 상당한 자본을 이미 소유하고 있고 또, 내부 경쟁이라는 심화된 양상으로도 수익을 창출하고자, 광고를 위해 자극적인 보도를 해왔기 때문이다.

 

존 리드를 읽어 본 독자라면, 러시아 혁명을 취재한 인물이 다름 아닌, 미국인이었다는 점에서, 받아들이기 힘들어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세계적으로도, 러시아 혁명은, 외부 기사를 쓰는 언론인들에게도, 큰 흥미를 보였기 때문이다. 대단한 일이었고, 러시아에서 전 인민들은 모두, 혁명을 위해 헌신했다고 봐도 무방하다. 바로 <세계를 뒤흔든 열흘>을 쓴 바로 현장 보도였기 때문이다. 레닌도 존 리드를 알았고, 미국인이었음에도, 그를 존중했다고 한다. 왜냐하면, 미국인이지만, 단지 사회주의를 지지했기 때문이 아니라, 미국이 아닌, 여러 국가들로부터 일어날 수 있는 혁명을 취재했고, 또한 러시아 혁명을 지지했기 때문이다. 비슷한 사례지만, 결 다른 언론인도 있다. 바로 에드거 스노우다. 그는 마오를 취재했고, <중국의 붉은 별>이라는 기사를 작성했다. 그러나 <중국의 붉은 별>은 홍위병에 대한 우호적인 시각을 보이거나, 스탈린주의라는 지도 아래에서 마오주의를 지지하는 흔적들도 자주 보인다. 그래서 해당 저서는 마오주의에 대한 비판 없이 교조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위험도 같이 보인다. 존 리드, 에드거 스노우는 모두 미국인들이다. 그러나 사회주의를 지지했다. 그리고 존 리드는 정확하게 말하자면, 사회민주주의도 지지했다. 트로츠키는 멕시코로 갔지만, 미국인들과 자주 서신이나 연락을 교환했고, 스탈린 첩자에게 암살 당하기 전까지도, 미국에서도 혁명은 일어날 수 있다고 봤다. 단지 내전이라는 양상이 아니라, 트로츠키는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뿌리를 여러 인종들로부터 봤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수 민족에 대한 탄압을 역사로도 다룰 줄 알았다. 트로츠키 이론들에 대한 비판들은 뒤로 하더라도, 혁명에 대한 전망으로는 앞서 갔다고 말할 수 있다. 영국 이전에도 미국은 바로 혁명 국가로 일어날 수 있는 큰 전망을 가진 곳이었다. 그러나 곧 자본가들이 몰려든 제국주의를 완성한 국가라는 걸 증명했다.

 

한국은 미국과 많은 관계를 맺어왔고, 또 서구식을 일부 받아들이더라도, 자국 뿌리를 잃고자 하지 않았다. 뼈 아픈 분단이라는 역사를 가진, 스탈린주의 대 자본주의라는 사상 대립으로부터도, 미국은 자본가들만의 국가를 만들고자 탄압도 했다. 그리고 소수 민족들을 제거하고, 식민지를 건설한 드넓은 대륙으로 걸친 유럽인들을 모방한 국가이기도 했다. 인종 우월주의가 만들어진 국가들도 다름 아닌 '건강한' 서구인들로부터 왕성한 활동지이자, 활력소였기 때문에, 링컨의 노예들은 아직도 계급 투쟁이라는 역사를 되풀이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시민들은 때로는 계층으로는 중간층, 계급으로는 중간 계급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러나 배부른 자본가들은 자신들의 자녀들에게 상속할 재산과 유산을 남기고자 하듯이, 소시민들은 배부른 자본가들로부터, 세월이 가기 전에도, 남길 재산과 유산을 먼저 걱정한다. 그들의 자녀들은 가난과 배고픔을 모른다. 그리고 교육받지 못한 채로 전쟁을 지지한다. 부모는 그들 모두에게 말한다. 너희들은 다음에도 커서, 똑같은 사람으로 말할 것이냐고. 그러나 이윽고 자녀들은 한때는 프롤레타리아트였던 부모에게 배운다. 도대체 똑같이 크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서, 몸만 자랐느냐고.

 

신성 가족


마르크스와 엥겔스도 다같이 말했던 신성 가족에서 말하고자 한 본모습이란 바로 그들을 그려낸다. 그래서 엥겔스와 구상을 두고는 다투기도 했다. 덕분에 신성 가족은 자본가에서 지배가로 부상하기까지 부르주아지에 대한 모습을 잘 보여주고 쓴 저작이다. <신성 가족>은 때로 현대로는 '재벌'에 대한 사실을 파악하고자, 산업화된 구조로부터 자본주의가 매우 종교적이라는 사실을 강조했다. 말 그래도 이윤과 축적으로부터 보여진 그들을 잘 다루기 때문이다. 언론에서도 다루는 큰 법과 소송들도 마찬가지로,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연류된 큰 인물들과 조연들을 무대로 이끌고, 또 이루기 때문이다.

 

매우 '화목한' 미국식 안방 극장인 셈이다. 그리고 노동 가족들의 잔인한 희생으로 곁들여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l 공유하기 l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