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군국주의

 

공동발의

 

군국주의의 본질과 의미에 대하여

 

군국주의는 우리 시대의 가장 빈번한 전쟁이며 번잡하고 혼란스럽고 다면적인 현상을 의미하며 동시에 그것의 기원과 성격의 방법과 여파를 아는 건 흥미롭고 중요하다. 군국주의는 계급조직 사회의 생활에도 뿌리박힌 현상이다. 아직은 개별국가와 지역의 특수한 자연적,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상황을 다각도의 형태로 드러나는 사회적 제도와 비슷하다고 추정할 수 있다. 군국주의는 대부분에 사회적 제도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필수적인 증후이다. 왜냐하면 군국주의는 가장 강하고 대부분 자기보호 본능을 가진 계급에게 민족적, 문화적, 독점적으로 집중되어 있기 때문이다.

 

군국주의의 역사는 인간의 진화와 강력한 권력의 역사를 중심으로 온전한 의미를 드러내며

쓰여진다. 자본주의적인 군국주의의 정밀한 분석은 자본주의에서 가장 은폐된 경찰의 근원을

해부하는 걸 의미한다. 군국주의의 역사는 동시대에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인 역사에 전반적인 국가와 민족 사이의 문화적인 갈등관계와 개별국가와 국가단위 내에서 계급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그런 역사를 시도하는 건 의문의 여지도 없지만 분명하다.

 

사회적 관계에 대한 힘의 기원과 기반

 

모든 힘의 사회적 관계에서 결정적인 지점은 마지막 수단이고 사회적 힘으로 보기에 물질적 힘은 우선적이며 한 사람만의 힘1)으로 드러나진 않는다. 게다가 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 동등하며 순전히 수칙적인 비율로 누가 다수인지로 결정한다. 수칙적인 비율은 단순하게 이익관계가 모순되는 사람들이 속한 모임들의 수칙과 일치하진 않는다. 모든 사람들이 특수한 한 사람의 근원적인 관계까지 정확하게 아는 건 아니기 때문에 계급의식에서 지적이고 도덕적인 발전과 광범위하고 집중적인 단계를 중심으로 결정한다. 그리고 지적이고 도덕적인 단계는 개별적인 이익집단인 계급으로 결정하지만 반면에 정치적, 사회적 지위는 강력한 반응을 보이더라도 다양한 결과와 권력관계의 표출을 대변한다.

 

경제적 우위는 직접적으로 복잡한 수칙적인 비율을 대신할 수 있도록 돕는다. 왜냐하면 경제적 압력은 지적이고 도덕적인 단계의 수준에 영향을 미칠 뿐만 아니라 계급적 이익관계의 인식에서도 암묵적으로 완전하게 계급적 원칙에 거의 순응하고 행동하도록 생산하는 경향이 있다. 지배계급의 정치적 조직이 지배적인 이익집단에게 유리한 수칙적 원칙을 “수정”하고자 증가하는 힘을 빌려준다는 건 알려진 모든 기관에 대해서도 우리에게 교훈을 준다. 경찰, 사법기관, 학교와 교회도 여기에 포함되며 기관들은 정치적 기구로 세워지고 행정적 능력으로 고용한다. 처음에 두 가지는 주로 협박과 폭력으로 위협해서 작동한다. 학교는 주로 핵심에 도달할 수 있는 계급의식에 대한 모든 과정을 저지하고자 한다. 교회는 악을 드러내는데 눈이 먼 사람들에게 가장 효과적이고 미래의 삶에 대한 그들의 즐거운 욕망과 지옥이 있는 고문실로 협박하면서 경각심을 준다. 그러나 습득한 수치적인 비율도 절대적으로 힘의 관계로 결정하진 않는다. 무장한 사람의 손에 있는 무기는 빈번하게 신체능력을 증가하게 한다. 무장기술은 결과적으로 외부적인 무장과 전략을 포함하여 공을 들여서 이 힘을 증가시킬 수 있는지에 따라 개발에 의존하고자 한다. 지적이고 경제적인 우위는 한 집단의 이익관계에선 순전히 무기를 소지한 신체적인 우월성이나 더 나은 무기를 가진 우월한 계급으로 둔갑한다. 그러므로 계급의식이 강한 다수파가 계급의식이 강한 소수파를 완전히 지배할 수도 있다. 계급적인 분열이 일어나서 경제적 지위를 결정하더라도 계급에 따른 권력의 정치적 관계는 한 사람이 차지하는 경제적 지위에 의해서만 결정된다. 둘째로는 무수한 지적이고, 도덕적이고, 물리적인 수단을 처리하는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에게 규제된다. 그렇다고 이 모든 행사하는 힘의 집중이 계급의 구조에 영향을 미치는 건 아니다. 이 구조는 의존하지 않는 위치에 의해 세워지기 때문에 위치는 다수를 구성할 수 있는 한 계급에게 강제한다. 자연의 명령이 조화를 이룬다면 경제적으로 의존하는 계급은 소수의 집단을 구성할 수도 있다. 계급투쟁이나 변화에 대한 정치적 힘의 수단도 없이 전자는 국가에 의존하며 남는다.2) 그래서 계급투쟁은 오직 한 계급의 관계에서 희생과 혁명적 실천을 준비하고 수용하며 계급의식을 발전하기 위한 투쟁일 수 있다. 이 투쟁의 중요성은 계급의식을 세우거나 억압하는데 있어 자연적이고 지적인 힘의 수단을 차지하는 물리적 힘의 증대를 포착한다는 걸 의미한다.

 

이 모든 것에서부터 사람들은 무기의 기술이 사회적 투쟁에서 중요한 기능으로 무엇을 하고있는지도 파악해볼 수 있다. 경제적 요구를 할 수 없는 소수파가 적어도 이 기간 동안에는 “가장 집중된 정치적 행위”인 군사작전으로부터 다수파와 전투하고 유지할 수 있다. 지배할 수 있는 위치를 유지할 수 있는지도 이 기술에 달려있다. 계급의 분열을 떠나서 힘의 관계에서 발전은 현실적으로 모든 무기기술의 발전과 연관되어 있다. 모든 사람들, 심지어 최하층에 있는 사람들도 다수의 원칙과 민주주의가 지켜지기 어려운 조건 아래에선 기본적으로 동등하게 좋은 무기를 생산하며 그 사회는 일정한 정치적 형태를 보일 것이다.

 

앞서말한 위의 주장이 옳다면 계급에서 경제적 분열이 일어난 경우에만 해당한다. 발전의 자연발생적인 과정은 경제와 기술개발의 결과로 나타난 계급으로 나누는게 방어술과 전략을 포함해서 무장기술의 개선과 평행하게 진행할 수 있다. 따라서 무기생산은 더욱 전문화된 직업이 된다. 게다가 한 계급이 다른 계급와 경제적 우위를 좌우하는 건 계급지배이기 때문에 무장기술의 개선은 지속적으로 무기상품3)을 생산하면서 더욱 구체적이고 비싸지게 된다. 무기생산은 점차 경제적으로 지배적인 계급이 독점하면서 민주주의의 물리적 기반은 제거된다. 그렇다면 핵심은 누가 소유하고 있는지가 중요해진다. 한때 정치적인 권력의 수단으로 소유해본 계급이 발생할 수 있으며 경제적 우위를 상실한 후에도 적어도 한동안은 정치적 지배를 유지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지적에 연연해할 필요는 없다. 권력의 정치적 관계에서 형태와 성격만이 무기기술을 결정하는 건 아니며 계급투쟁의 형태와 성격도 마찬가지다.

 

모든 민간인들이 동등하게 무장하고 그들의 무기를 책임지는 것으로는 민주주의의 지배를 영구적으로 보존하기에 충분하진 않다. 한 스위스의 사건이 보여주듯이 무기를 균등하게 분배한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 분배에는 다수파로부터 떨어져 소수파가 되려고 하거나 소수파가 타격을 위해 잘 조직될 위험성을 제거하지 않는다. 전체 인구는 무기생산이 민중들의 손에 있을 때만이 영구적이고 동등할 수 있다.

 

무장기술이 할 수 있는 민주화의 역할에서 불워리턴은 주목할 공상적 정치체제를 “다가온 경쟁”에서 분명하게 묘사했다. 그의 저작 중에선 알려진 작품은 아니다. 이 책에서 불워리턴은 모든 민간인들이 쉽게 전기와 유사하고 신비한 힘을 이용하거나 옮기면서 작은 막대기를 수단으로 어느 시점에서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처참한 결과를 가져올 기술의 높은 발전을 전제한다. 그리고 자연의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인간의 지배가 실제로 쉬운 일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예상해볼 수도 있지만 비록 먼 미래에는 학살의 기술을 응용하는 걸 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를 것이다. 왜냐하면 인류의 전멸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기술적 진보는 어느 정도에선 금권정치에 의해 착취되는 대신에 무기를 제작하는 방법을 가져오며 다시 어느 정도 민주주의의 광범위한 기반에서 소유가 될 것이다.

 

군국주의의 역사에서 드러난 몇 가지 항목.

 

계급으로 분열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하위 문화권에선 무기는 지배를 돕는 방어수단만이 아니라 작업도구이기도 하다. 돌과 막대기, 창과 화살촉, 활 이외에도 무기와 도구는 원시적 성격으론 언제든 쉽게 구할 수 있다. 남편과 아내 사이의 가장 원시적인 분업을 제외하고는 기록적으로 훌륭한 노동의 분업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공동체의 모든 구성원들이 적어도 남성과 여성 중에 한 성의 구성원들이 동등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경제적이거나 정치적인 힘의 관계가 아직은 없었기 때문에 그러한 힘의 관계를 지원하고자 무기를 사용할 순 없었다. 설령 힘의 관계가 존재했다고 하더라도 무기를 사용하기 위한 수단으러 사용하진 않았다. 힘의 관계는 원시적인 기술과 함께 오직 민주적인 힘의 관계에서만 할 수 있었다.

 

하위 문화권에서 무기가 공동체에도 사용한다면 기껏해야 개인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서지만

계급이 분열하거나 힘의 기술이 더 크게 개선될 때 그들이 의도하는대로 상황은 달라진다. 하층 농업의 원시적 공산주의와 함께 여성이 지배하는 구조에 있는 사람들은 사회적 지위가 없었으므로 평균적인 환경에서는 계급지배의 정치적 관계를 알 순 없었다. 일반적으로 군국주의는 의도를 감춘다. 군국주의의 외부적인 요인에는 전쟁을 준비하도록 강요하고 임시적인 군사적 전제주의를 생산했으며 유목민들 사이에서는 이전부터 지배하던 계급으로 분열했기 때문에 빈번하게 일어난다. 개인적이고 계급의 위치에 따라서만 분할된 순전히 무력적인 조직으로만 상응하는 그리스와 로마의 군대조직을 상기해본다면 계급적 지위에 따라 무장의 질이 좌우되었다. 게다가 기사들의 봉건적 군대도 상기해볼 때 대지주의 병사들은 질 나쁘게 무장하고 도보로 다녔으며 패트리스 라로크에 따르면 전투에 직접 충돌하는 전투원보다 대부분 전투부대의 지원을 담당했다. 당시에는 하층민들의 무장을 허용하진 않았고 일정한 도움을 주긴 했지만 실제론 국가가 최소한의 안전도 개인에게 보장해주지 못했기 때문에 외부의 적을 보호하거나 가능한 공격에 대비해서 사람들은 무장할 필요성을 있었고 국가와 민족의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사회의 개별적인 계급의 무장에서 차별화는 힘의 기술을 가능하게하며 힘의 관계를 유지하고 단련하는데 고용된다. 이 물음의 측면에서 로마의 노예전쟁은 기억해둘만하다.

 

이 물음에 독일의 농민 전쟁과 독일의 도시전쟁도 중요하고 불을 지핀다. 14세기에 독일의 도시전쟁의 결과로 인해 직접적으로 불리했던 근거가 첫째로는 교회의 봉건군들의 군사적 기술이 우월했기 때문이다. 14세기에 도시전쟁에서 전투했던 부대는 성공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1525년의 농민전쟁의 기간과 대조적으로 화기의 기술이 유난히 낙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도시의 거대한 경제적 결과로 인해 사회적 중심지가 지역적으로 제한되어서 좁은 범위 내에서만 밀집할 수 있었으며 상충적인 관계에선 상당한 혼란이 없었던 대표적인 사례였다. 게다가 처음부터 마을을 건설하는 기술로부터 소도시와 요새는 봉건귀족, 교회, 황제와 같은 중요한 전략적 위치를 점령했으며 부대의 군사적 요소(방어시설)였다. 마지막으로 무기의 생산은 마을들이 담당했으며 시민들은 기술적 준비에 있어 모두 우월했기 때문에 기사들의 군대를 물리칠 수 있었다.4)

중요한 시각을 잃어선 안 된다. 같은 지역에서 함께 살거나 다른 계급 사이에서 소수적으로 산한 사회의 다양한 계급이 수행하는 중요한 부분을 간과해선 안 된다. 농민전쟁과 도시전쟁의 조사는 자세한 사실을 보여준다. 계급분산이 분산과 일치할 때 지역적으로 계급투쟁은 더 쉽다. 이 상황은 계급의식이 발전하는데 도움을 줄 뿐만 아니라 기술적인 관점에서 계급의식을 군사조직으로 연관하는데 도움을 주며 무기의 생산과 공급을 돕는다. 이러한 지역적으로 유리한 계급조직은 부르주아 혁명5)의 좋은 본보기였다. 프롤레타리아의 혁명6)은 대부분 거의 부재했다.

 

또한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는 고용된 군대에서 군비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경제적 힘은 물리적 힘으로 둔갑하며 메피스토의 사악한 격언에 따르면 “만일 내가 여섯 마리의 종마를 지불할 능력이 있다면 과연 그들의 기운을 받을 자격이 없겠는가?” “24개의 다리를 가진 것처럼 멀리 갈 수 있으며 바른 구실을 하는 사람이리라.” 그리고 또 다른 격언에 따르면, “나누고 지배하라!” 이 두 가지의 격언은 소위 말하는 엘리트 부대에도 적용할 수 있다. 반면에, 이탈리아인이던 콘도티에리는 프레토리안이 그랬듯이 무기, 군사작전과 전략적 기술을 소유한 자에 의한 정치적 권력에 무엇이 달렸는지 두드러진 방식으로 설명한다. 고용된 군인은 왕의 왕관에 뻔뻔하게 매수된 후에 그들과 공놀이를 했고 국가에서 최고 권력자의 타고난 후계자7)가 되었다. 우리는 열광과 전쟁이 나폴레옹과 그의 장군들, 불랑제들에서 군사적 권력으로 개인의 손에서 침략에 대한 명분을 준비하면서 반복되는 이 현상을 현재에서도 본다.

 

해방운동에서 독일전쟁의 역사는 군사조직과 전반적인 군국주의의 형성에서 외부에 대한 정치적 상황의 영향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가르친다. 프랑스혁명에 대항했던 1806년의 연합전쟁에서 프리드리히 대왕의 봉건적인 상비군들은 프랑스의 시민군들에게 격파되었다. 전쟁이 너무나 비참하게 끝났기에 무력한 독일의 정부는 다음과 같은 차선에 직면했다. 코르시카 정부에게 끊임없이 시달리거나, 전반적인 지원제도에 시민군과 자신의 무기들로 정복자를 물리치거나 존속하려는 욕망과 대중의 충동적인 자극은 대중을 후자에 합류하도록 강제했다. 독일에선 민주화의 위대한 시기가 시작했고 프로이센의 특수한 압력에는 국내의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긴장을 완화시키고 돈과 자유를 갈망할 수 있는 투사를 원했다. 남성의 가치가 증가했다. 가치생산자로서 사회적 자질을 가진 장래의 세금납부자들과 물리적 힘과 지능을 타고난 신체적 자질이 있는 남성에겐 일반적인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결단력을 습득할 수 있었고 열광적인 능력을 겸비하면서 환율이 증가할 수 있었다. 반면에 계급 차별화의 영향력은 낮아졌다. 군사주간지의 전문용어로 “프로이센 국민”들은 타국의 오랜 통치기간 동안에 그들의 모든 불만을 잊어버리는 법을 학습할 수 있었다. 흔한 사례로 재정과 군사적 문제는 대변혁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난관은 제거되었다. 전성기에 재정적으로 중요한 산업과 무역은 프로이센-독일의 하찮은 관료주의적 정신이 수용하는 한에서 위탁될 수 있었다. 적어도 정치적 자유를 도입하거나 약속했다. 사람들은 일어섰고, 폭풍은 분노하기 시작했다. 보편적인 제도 아래에서 해방전쟁 기간에 라인강 너머에 샤른호르스트의 그나이제나우 군대가 “세습의 적”을 몰아냈다. 그들은 대혁명의 프랑스를 약화시키고 그의 긴장된 세계를 경멸하게 할만한 제도를 구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민주적 조직은 아니었지만 샤른호르스트의 그나이제나우는 그 뜻을 세웠다. 독일 국민이던 흑인들은 의무를 다한 후에 합스부르크 가문으로부터

적절한 호의를 얻을 수 있었다. 칼스루에 결의안에는 레이프직의 민족전투를 이끌었으며 신뢰할 수 없고 저주받은 메트르니히 정권의 부질없고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인 제거되지 않고 반동적인 모든 악마들이 풀려난 후에 억압으로부터 해방운동의 전쟁에서 민주적 군대는 폐지되었다. 높은 수준의 문화를 이룩한 독일의 영토에선 군대가 무르익었을진 모르지만 동쪽의 엘빈의 보루시아인들의 몹시 현저한 문화적 무게는 갑작스럽게 민주적 군대와 충돌했고 가까이에서 민중들의 위대한 봉기들의 영광에 가까울 수 있었다. 군사조직에 대한 추상적인 검토는 사회적 분단 뿐만 아니라 무기의 기술이 발전한 정도가 마침내 군대의 구성과 규모에도 좌우될 수 있는가를 보여준다. 이를테면 대혁명적 운동에서 사용된 소형화기의 발전은 전쟁의 역사에서 가장 두드러진 사실 중에 하나였다.

 

참조

 

1. 그리고 물론 체력과 불가분한 관계인 지적인 능력도 남성에게 최대한의 체력 사용과 신체적 발전에도 영향을 미친다. 사실, 어느 정도는 체력의 한계를 요구한다. 이러한 신체적 힘으로 정복한 크기가 사회적 현상으로 얼마나 존재했는가는 경제적인 지위에 속하는 집단들과 관계한다. 이를테면 광범위한 규모와 균형적인 거래관계 사이에서 개인적인 집단의 관계가 발생할 때 권력의 사회적 관계를 결정할 수 있다. 더 중요한 측면은 후반부에 논의해볼 것이다.

 

2. 사회적 생산에서 인간의 생활은 인간의 의지에 의존하지 않는 분명하고 필연적인 관계인

생산적인 물질적 힘의 진화와 생산관계에서 분명한 단계로 부합할 수 있다. - 마르크스

 

3. 모든 종류의 군수품과 무기들 외에도 전기장치, 요새, 무장하기 위한 장비들, 군사통신체계(말, 무기, 이동수단, 도로와 교량의 건설, 내해상의 선박, 철도, 자동차, 전보, 무선 전신술)등과 망원경, 비행선, 사진, 그리고 군견도 상기해보자.

 

4. 또한 15세기 이탈리아의 발전이 여기서 중요한 관계를 보여주며 더욱 구체적으로 조사해볼 수 있도록 유도하며 핵심적인 구상을 확인해볼 수 있다.

 

5. 러시아의 초기 단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특수한 성격으론 1905년 12월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무장봉기이다. 주목할만한 드러난 강인함에는 대부분의 마을주민들이 도화선으로 소수의 혁명가들과 협력해서 도시 게릴라전의 전술은 모스크바에서 아주 훌륭하게 발전했으며 획기적일 것이다.

 

6. 그래도 공장에서 함께 일하고, 노동자 계급의 숙소에서 함께 생활하는 건 고려해야한다.


7. 버크하르트(Burckhardt), p. 22. 외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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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문

 

몇 주 전에 그렌츠보테(Grenzbote)에선 1892년 10월에 비스마르크와 오토 케멜 박사와의 대화를 보도했다. 비스마르크 특유의 냉소와 함께 입헌주의라는 가면을 벗긴 “세기적인 영웅”에 대한 대화였다. 그 사이에 비스마르크는 말했다.

 

“중세시대 로마에선 법 밖에 있는 사람들은 범법자로 간주해서 추방했어.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정치적 권리를 무시하고 이를 비슷하게 취급했지. 내가 보기엔 이보다 심했어. 사회민주주의의 문제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지. 현재의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부사관들을 성공적으로 설득하기 위해 분투해. 함부르크에 있는 대다수의 군대는 이미 사회민주당원들로 구성되었어. 왜냐하면 주민들은 오직 지역부대에서만 가입할 권리가 있기 때문이야. 어느날 이러한 군인들이 발포를 거부한다고 가정해볼까. 그들의 아버지와 형제가 황제의 복무자라면 어떨까? 함부르크와 싸우려고 우리는 하노버와 메클레부르크에서 부대를 소집할까? 그렇다면 우리는 파리코뮌과 다를게 없어. 황제는 두려웠어. 그는 언젠가 “살육왕자”라는 별명으로 자신의 할아버지와 똑같이 “피가 발목 위로 넘치듯이” 지배하기를 바라진 않았어. 그때 내가 말했지. 폐하께선 힘겨운 길을 걸으셔야 합니다. 뒷걸음질 칠수록 심연은 더 깊어질 뿐입니다.”

 

전반적인 물음을 요약하자면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문제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다.” 귀족이던 폰 마소(Von Massow)가 흘린 고통의 외침, “우리의 유일한 희망은 오직 병사들의 총검과 대포에 달려있다.”1)보다 깊이 드러냈다.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물음에는 군사적인 문제가 있다.” 이는 현재에도 선동가들이 부를 수 있고 선율로 삼을 곡조다. 만일 알렉산드리아인2)들에게 전했던 비스마르크와 푸트카메르(Puttkamer)가 벌인 경솔한 행동이 아무 눈에도 띄지 않는다면 함부르크의 보도 소식과 순종적인 젊은 융커였던 폰 올덴부르크 야누샤우(Von Oldenburg Januschau)는 연말에 호헨로헤델브뤼크(HohenloheDelbrück)에서 상류층 법원 판사인 쿨레르만(Kulemann)에게 비스마르크의 비정한 말에 한술 더 뜬다.

 

사회민주주의 문제는 정치적인 문제일 정도로 군사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국내의 적은 해외의 적보다 위험하며 민족의 영혼을 독살하고 우리가 일어나기도 전에 사회민주주의자들은 우리의 행동을 저지하고자 한다. 1907년 교차로(Kreuz zeitung)에 따르면 ‘민족주의의 깃발이 휘날리며’ 진행한 선거싸움에선 계급적인 이익관계가 국익보다 우선하다고 보도했다. 그리고 이 선거싸움은 선거권과 노동조합 조직의 권리에 대한 위협을 고조하고 ‘보나파르트적인 검’으로 위협했으며 새해 전날 부친 편지에서 부엘로 왕자(Prince Buelow)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지도자들을 위협하고자 이들의 주위를 서성였다. 계급투쟁의 기치 아래로3) 전개해서 싸운 가장 치열한 선거였다. 눈을 감고 귀도 들을 수 없는 사람만이 폭풍을 모는 호통을 치며 서약에 거부할 수 있었다.

 

따라서 ‘자국의 적’과 투쟁하는 사안은 매우 중요해졌다.

 

1907년의 혼란스러운 선거는 민족주의 문제와 식민지 문제, 강경한 애국주의와 제국주의에 대항하며 치러졌다. 이 모든 걸 보여줬음에도 이 선거는 비열한 애국사업자들의 거짓되고 애국적인 위선에 맞서 독일 사람의 저항력이 작았는지도 보여준다. 지배계급의 정부들도 이용할 수 있는 허황적인 민중선전 조직이 무엇인지도 우리에게 가르쳤다. 1907년 선거는 노동자 계급에게 이들이 힘에 있어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관계에 대해 스스로 생각해보도록 눈을 뜨게 했다. 노동자 계급은 추악한 ‘승리의 비결’에서 해방할 수 있도록 가르쳤다. 1907년 선거는 노동자 계급의 운동을 올바른 요구로 나아갈 수 있도록 더욱 깊어졌으며 민족적 행동에 대한 대중의 심리도 알 수 있게 해주었다. 확실히 우리가 소위 말하는 패배의 원인은 다수들이었고 실제로 패배는 아니었으며 오히려 승자들이 패배한 사람들보다 더 당황했다.

 

군국주의는 사회민주주의의 진입을 방해하는 특수한 함정들을 설치했으며 노동자계급에게 오염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사실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이를테면 그들은 정부의 테러주의에 휘둘리는 국가노동자들과 하위직 공무원들이다. 이는 반군국주의에 대해 청년들에게 최전선에서 질문해볼 수 있도록 지도할 것이며 독일의 노동자 운동은 이후로도 확실하게 이들의 지적에도 주목할 것이다.

 

다음의 책자는 1906년 11월 28일, 독일에 청년사회주의자 조합의 저자로부터 읽은 신문사의 논설을 확대했다. 이 논설은 기본적으로 새로운 걸 주장하진 않는다. 단지 이미 알려진 자료들의 모음집일 뿐이다. 그렇다고 주제를 소모적으로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저자는 전 세계의 흩어지고 단절한 자료를 최대한 수집하고자 노력했다. 그리고 반군국주의와 젊은 사회주의 운동에서 중요한 국가들에 대해 적지만 언급해볼 수 있도록 한 벨기에의 드만 동지에 대해 감사를 표한다. 만일 실수를 발견해서 정보의 출처가 신뢰성이 낮다는 이유로 자료의 숙달에 난관을 겪는다면 감안해주기를 바란다. 군국주의의 범위에서 현재의 많은 것들도 빠르게 변화한다. 이를테면 프랑스와 영국의 군사개혁을 더욱 언급하는 건 구시대적인 발상이다. 이 책은 반군국주의자들과 젊은 사회주의 노동계급의 운동에 더욱 진실하다. 이 책은 해방을 위한 노동자계급에 대한 근래의 지침이다. 때때로 차질을 빚기도 하지만 어디에서나 빠르게 발전할 수 있는 그런 사람들을 보게 되어 기쁘다. 이 책자가 출판한 이후로 나는 핀란드 젊은 사회주의조합이 타마스포에서 1906년 12월 9일과 10일에 첫 회의를 열었다는 사실을 알게됐다. 이 조합의 특수한 목적은 젊은 노동자들이 계급의식을 훈련하는 곳 외에도 모든 방면에서 군국주의와도 싸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작업에 이론적인 원리를 충분하게 조사하지 않고 역사적 깊이가 부족하다고 불평할 수도 있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나는 이 책자의 정치적 목적이 반군국주의 사상을 전파하고자 한다는 걸 지적하고자 한다. 또 어떤 사람들은 쌓여만 가는 무수한 사항들에 청년 사회주의 운동과 반군국주의의 역사에 관해선 하찮게 보일 수도 있고 불만할 수도 있다. 이 불만이 정당할 순 있다. 저자는 상부적으로 구체적이고 분명하게 볼 수 있도록 가정했고 하위적인 운동의 조합에 발전을 전술적 원칙과 방법으로 응용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했다. 반군국주의적 시위와 반대운동에서 주된 곤경을 제시하는 건 세부적일 뿐이라는 걸 고려했으면 한다.

 

박사. 칼 리프크네히트

 

1907, 1월 11일, 베를린

 

1. 독일 아렌츠 주간지 1896년 11월 중순 사회민주당 연대서신 참조

2. 황제는 알렉산더 대대 신병들에게 그들의 아버지와 어머니들에게 총을 쏘라고 호소하는 연설을 했다.

 

3. 1907년 2월 5일 저녁에 두 번째 투표가 실시했을 때 베를린 수비대는 실탄과 함께 행군준비를 마쳤다. 1903년 6월 25일, 스판다우에서 개척자들이 슈왈더 거리에서 선거결과에 열광한 노동자들을 “정신차리게” 하고자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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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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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레닌을 알게 된 사연은 다름 아닌 헌책방이었다. 전공과 깊은 관련이 있었고, 오랜 기간 어려운 문자를 해독하는 일에 열중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회상록은 어느 헌책방에서 맨 위에 있던 한 권의 서책으로 우연히 마주치면서 시작되었다. 맨 처음 『일보 전진 이보 후퇴』라는 명저로 알게 된 이름은 평생의 동지이자 참된 인물이다. 레닌에게 헌신한 크룹스카야도 그렇다. 그녀가 회상한 레닌은 써클 모임에서 처음 만났던 순간부터 그에 대해 빠짐없이 기록할 정도로 세세하다.

 

이는 고리키처럼 문학이 주는 가까운 묘사의 표현에 그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레닌이라는 인물을 위인이나 영웅으로 그려내려하기 보다는, 한 사람의 동시대를 함께한 동지로 그리며 유일한 존재로 쓴다. 그녀의 기록이 없었다면 아마 레닌에 대한 생애는 온갖 사건으로만 도배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레닌을 회상하며』는 이 특이한 이력을 가진 이가 러시아 전반의 봉건적 질서를 무너뜨리는데 일조하였고, 가장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에게 평생을 헌신했음을 보여주었던 순간까지 당대의 혁명가들에 대한 과제를 일찍이 부여하고 있다.

 

코흘리개가 자라 성인이 될 때까지에도 수많은 우여곡절이 담겨 있다. 그러나 이 뛰어난 인물의 생애는 매우 비범하고 굴곡진 역사, 그리고 피로 얼룩진 제국의 지배자들의 본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다. 그 속에는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은 인간의 이기적 면모들이 명암처럼 감춰져 있을 수도 있다. 결국 자본과 정치적 오만이 또 다른 오해를 부르고, 또 다른 계급적 폭력이 더욱 가시화되어 자신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부추기며 대변하고 있을 때, 차마 전기라 부를 수 없는, 그녀의 기록은 자신의 국가에서 추방되어 모스크바로 귀국하기까지의 긴 여정, 그리고 긴박하고 열악한 처우에서 유럽의 대장정을 펼쳐야만 했던 혁명의 기록이다. 하지만 기록으로도 채우기가 모자랄 정도의 눈부신 헌신이다. 누군가 혁명가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 말했다. 그녀가 레닌에게 헌신할 수 있었던 배경이라면 단순히 여성으로서 자신의 권리에 머무른 것이 아니라, 레닌과 가장 가까이서 교류하며 혁명을 끝까지 완수하는 동지이다. 국적을 떠나 비록 지금은 절판된 그녀의 기록에서 숨겨진 그의 면모와 진가를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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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테제

 

- 현재의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 -

 

내가 4월 3일(16일) 밤에야 페트로그라드에 도착한 탓에 4월 4일 집회에서는,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 관한 보고를 오직 나 개인의 명의로만, 그것도 준비가 충분치 못하다는 단서를 단 상태로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나 자신에게——또 선의의 반대자들에게도——일을 편하게 만들기 위해 내가 할 수 있었던 유일한 작업은 이 테제를 문서로 준비하는 것뿐이었다. 나는 이 테제를 낭독하고 나서 그 문서를 체레틸리(Tsereteli) 동지에게 건네주었다. 나는 테제를 아주 천천히, 두 번 낭독했다. 먼저 볼셰비키의 집회에서, 다음에는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합동 집회에서.

 

이 개인적인 테제는 아주 짧은 주해만 붙여 발표하지만, 보고서에는 훨씬 더 상세한 주해를 달아두었다.

 

테제

 

1) 르보프(Lvov) 일파의 새 정부 치하에서도, 이 정부의 자본가적 성격 때문에 전쟁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지금도 의문의 여지 없이 약탈적 제국주의 전쟁이다. 따라서 이 전쟁에 대한 우리의 태도에 있어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에 조금이라도 양보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계급적으로 각성한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로지 다음의 조건이 충족되는 경우에만, 혁명적 조국방위주의의 정당성이 보장되는 혁명적 전쟁에 동의할 수 있다. (a) 권력이 프롤레타리아트와 그들과 손을 잡은 빈농에게로 넘어간다. (b) 말로만이 아니라 실제로 모든 영토 병합을 포기한다. (c) 모든 자본의 이익과 실제로 완전히 단절한다.

 

전쟁을 정복의 수단이 아니라 불가피한 것으로 여기기 때문에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믿는, 대중 가운데 폭넓은 층의 의심할 바 없는 선의를 고려할 때, 그들이 부르주아지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특별히 철저하고 끈질기고 참을성 있게 그들에게 그들의 오류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또 자본과 제국주의 전쟁의 불가분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자본을 타도하지 않고서는, 전쟁을 끝장내는 것은 — 폭력이 강제한 평화가 아니라 진정 민주적인 평화로 전쟁을 끝장내는 것 —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전선에 있는 군대 내부에서 이런 생각을 최대한 널리 보급하는 선전 활동을 조직해야 한다.

 

양측 병사들의 우애 (형제적) 관계의 형성.

 

2) 러시아 현 시기의 특수성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적 자각과 조직화가 충분치 못해 권력을 부르주아지에게 넘겨준 혁명의 최초 단계에서,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에게로 권력을 넘기지 않으면 안 되는 혁명의 두 번째 단계로 이행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이행의 첫 번째 특징은 합법성을 최대한 확보했다는 것이다(러시아는 지금 세계의 모든 교전국들 가운데 가장 자유로운 나라다). 두 번째 특징은 대중에 대한 폭력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지막 특징은 평화와 사회주의의 최대의 적인 자본가 정부에 대하여 대중이 불합리한 신뢰를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특수성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이제 막 정치 생활에 눈뜬 유례없이 광범한 프롤레타리아 대중 속에서의 당 활동이 맞이하는 특수한 조건에 우리가 적응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임시정부는 지지하지 않는다. 그 모든 공약, 특히 영토 병합을 포기한다는 공약은 완전히 거짓임을 설명해야 한다. 이 정부, 자본가들의 정부에 제국주의적이기를 그만두라고 하는 식의 환상을 심는, 용납될 수 없는 ‘요구’를 할 것이 아니라 이 정부를 폭로해야 한다.

 

4) 부르주아지의 영향에 굴복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부르주아지의 영향을 전달하고 있는 인민사회주의자들과 사회주의혁명가당부터 조직위원회(치헤이제(Chkheidze), 체레텔리 등)와 스테클로프(Steklov) 등에 이르는 모든 소부르주아적 기회주의 분자들의 블록에 비하여 우리 당은 대다수의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 내에서 소수파라는 사실을, 지금으로서는 작은 규모의 소수파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혁명정부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는 것, 따라서 이 정부가 부르주아지의 영향에 빠져 있는 한, 우리의 임무는 참을성 있고 체계적이며 끈질기게 그들 전술의 오류를 설명하는——특히 대중의 실천적 필요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것 외에는 없다는 것을 대중이 알게 해야 한다.

 

우리가 소수파인 한, 우리는 오류를 비판하고 폭로하는 활동을 수행하는 것과 동시에 대중이 경험에 의해 오류에서 헤어나올 수 있도록 모든 국가권력을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옮길 필요를 선전해야 한다.

 

5) 의회제 공화국이 아니라——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에서 의회제 공화국으로 되돌아가는 것은 후퇴다——전국에 걸친 위에서부터 아래까지의 노동자·농업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들의 공화국이다.

 

경찰, 군대, 관료의 폐지.

 

관리는 모두 선거로 뽑고 언제든지 소환 가능하게 하며, 봉급은 숙련 노동자의 평균 임금을 넘지 않게 한다.

 

6) 농업 강령에서는 무게 중심을 농업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 옮겨야 한다.

 

모든 지주 소유지의 몰수.

 

전국의 모든 토지를 국유화하고, 토지의 처분은 지역의 농업노동자·농민 대표 소비에트에 맡긴다. 빈농 대표 소비에트를 따로 만든다. 모든 대농장에 농업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통제하에 공공 비용으로 시범농장을 설립(지역 조건을 비롯한 그밖의 조건에 따라, 해당 지방 기관의 결정에 의거하여 약 100~300데샤티나의 규모로)한다.

 

7) 전국의 모든 은행을 즉각 단일한 국립 은행으로 통합하고,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가 이 국립 은행을 통제한다.

 

8) 우리의 당면 임무는 사회주의를 ‘도입’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과 생산물의 분배를 지금 즉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통제하에 두는 것일 뿐이다.

 

9) 당의 임무.

 

(a) 당 대회의 즉각 소집.

 

(b) 당 강령의 개정. 주되게는,

 

(1) 제국주의와 제국주의 전쟁 문제.

 

(2) 국가에 대한 태도와 ‘코뮌 국가’라는 우리의 요구.

 

(3) 시대에 뒤떨어진 최소강령의 수정.

 

(c) 당명 변경. (공산당)

 

10) 새로운 인터내셔널.

 

혁명적 인터내셔널, 즉 사회배외주의자와 ‘중앙파’⁹에 반대하는 인터내셔널의 창립을 주도해야 한다.

 

왜 내가 드문 예외로 선의의 반대자의 ‘경우’를 특히 강조해야 했는지 독자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나는 앞의 테제를 골덴베르크(Goldenberg) 씨의 다음과 같은 반론과 비교해보길 권한다. 골덴베르크 씨는 레닌이 “혁명적 민주주의파의 한가운데에 내란의 깃발을 꽂아놓았다”(플레하노프(Plekhanov) 씨의 《예딘스트보Yedinstvo》5호에서 인용)고 말했다.

 

주옥같은 말 아닌가?

 

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읽어주고, 잘 알아듣게 설명했다.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를 믿는, 대중 가운데 폭넓은 층의 의심할 바 없는 선의를 고려할 때, 그들이 부르주아지에게 기만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특별히 철저하고 끈질기고 참을성 있게 그들에게 그들의 오류를 설명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자라고 자칭하고는 있지만 폭넓은 층에 속하지도, 조국방위주의의 신봉자 대중에도 속하지 않는 부르주아 신사분들이 낮두껍게도 나의 견해를 이런 식으로 제시한다. “혁명적 민주주의파의 한가운데에(!!) 내란의 깃발(!) [테제에서도, 보고에서도 이런 말은 한 마디도 언급되지 않았다!!]을 꽂아놓았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인가? 이게 폭동이나 부추기는 《루스카야 볼랴Russkaya Volya》¹¹의 선동과 다를 게 뭐가 있는가? 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읽어주고, 잘 알아듣게 설명했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는 혁명정부의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는 것, 따라서 …… 우리의 임무는 참을성 있고 체계적이며 끈질기게 그들 전술의 오류를 설명하는 —— 특히 대중의 실천적 필요에 부응하는 방식으로 설명하는——것 외에는 없다.”

 

그런데도 모종의 반대자들은 나의 견해를 “혁명적 민주주의의 한가운데에서 내란”을 호소하는 것이라고 표현한다!

 

내가 임시정부를 공격한 것은 임시정부가 신속하게 제헌의회 소집 날짜를 정하지 않고, 아니 아예 날짜를 정하지 않고, 그저 입으로 공약만 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없다면 제헌의회 소집은 보장되지 않으며 그것의 성공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런데도 마치 내가 제헌의회를 신속히 소집하는 데 반대하는 의견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내가 수십 년에 걸친 정치투쟁의 교훈을 통해 반대자의 선의는 드문 예외라고 간주하는 습관을 갖게 되지 않았다면, 나는 이것을 “헛소리”라고 불렀을 것이다.

 

플레하노프 씨는 자신의 신문에서 나의 연설을 “헛소리”라고 불렀다. 참 훌륭하군요, 플레하노프 씨! 하지만 당신의 논박이 얼마나 서툴고 졸렬하고 우둔한지 보시오. 만약 내가 두 시간 동안이나 한 말이 헛소리였다면, 어떻게 수백 명의 청중이 그 “헛소리”를 참고 들었겠소? 게다가 왜 당신의 신문은 칼럼 하나를 다 바쳐 그 “헛소리”를 전한 거요? 앞뒤가 안 맞아도 이렇게 안 맞을 수가 있나!

 

물론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71년, 1872년, 1875년에 파리 코뮌의 경험에 관하여,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필요한 종류의 국가에 관하여 무슨 말을 했는지 그것을 전하고 설명하고 상기시키려고 하는 것보다는, 소리치고 욕하고 으르렁대는 게 훨씬 더 쉽겠지.

 

왕년의 마르크스주의자 플레하노프 씨는 아무래도 마르크스주의를 떠올리고 싶어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1914년 8월 4일에 독일 사회민주당을 “악취 풍기는 시체”라고 불렀던 로자 룩셈부르크(Rosa Luxemburg)의 말을 인용했다. 그러나 플레하노프, 골덴베르크 일당은 ‘불쾌해’했다. 누구를 대신해서? 독일 배외주의자를 대신해서. 그들을 배외주의자라 했다는 이유로!

 

말로는 사회주의자지만 실제로는 배외주의자인 이 가련한 러시아 사회배외주의자들은 혼란에 빠져버렸다.

 

| 《프라우다》26호, 1917년 4월 7일

 

4월 테제를 옹호하는 논문 또는 연설 노트

 

1) 경제적 붕괴가 임박했다. 그러므로 부르주아지를 배제하는 것은 오류다.

 

(이것은 부르주아적인 결론이다. 붕괴가 임박할수록 부르주아지를 배제하는 것은 더욱 절실해진다.)

 

2) 프롤레타리아트는 조직되어 있지 않고, 약하며, 계급적 자각이 결여되어 있다.

 

(그렇다. 따라서 모든 임무는 대중이 부르주아지를 신뢰하게 만들어 혁명의 힘을 잠재우려는 소부르주아적 지도자, 이른바 사회민주주의자——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와 싸우는 것이다.

 

이들 소부르주아——치헤이제, 스테클로프, 체레텔리——와의 통일 단결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을 파멸시키고 있는 이들 사회민주주의의 파를 분쇄하는 것.)

 

3) 혁명은 지금 단계에서는 부르주아 혁명이다. 따라서 ‘사회주의적 실험’은 필요 없다.

 

(이것은 철저하게 부르주아적인 주장이다. ‘사회주의적 실험’ 같은 말은 누구도 입에 올리지 않고 있다. 구체적이고 마르크스주의적인 명제는 계급뿐만 아니라 제도도 계산에 넣을 것을 요구하고 있다.)

 

혁명 압살자들——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은 달콤한 문구로 혁명을 뒤로, 즉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로부터 부르주아지의 ‘단독 권력’으로, 통상적인 부르주아 의회공화제로 끌고 가고 있다.

 

우리는 솜씨 있고도 신중하게 사람들의 의식을 명료하게 하여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민을 앞으로, 즉 ‘이중권력’으로부터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전일적(全一的) 권력으로 이끌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마르크스가 말한 의미로의, 1871년 경험의 의미로의 코뮌이다.

 

문제는 얼마나 빠르게 나아갈 것인가가 아니라, 어디로 나아갈 것인가다.

 

문제는 노동자에게 그럴 의향이 있는지 없는지가 아니라, 노동자에게 무엇을 어떻게 준비시킬 것인가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전쟁 등에 관한 선언과 호소는 그저 인민을 달래 잠재우려는 것에 불과한 지극히 공허하고 기만에 찬 소부르주아적 수다일 뿐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임무는 내가 말했듯이,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의식을 명료하게 하여 치헤이제, 스테클로프, 체레텔리 일당의 부르주아적 영향으로부터 대중을 해방시키는 것이다.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즉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의 ‘혁명적 조국방위주의’는 달콤한 문구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에서 백 배 더 유해한 배외주의 조류로서, 대중을 임시혁명정부와 화해시키려는 시도다.

 

치헤이제, 체레텔리, 스테클로프 일당에게 우롱당하고 있는 자각하지 못한 우매한 대중은 ‘전쟁이 정치의 연속’이며 전쟁을 수행하고 있는 것은 정부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인민’은 정부의 계급적 성격을 바꾸는 것에 의해서만 비로소 전쟁을 중지시키는가, 전쟁의 성격을 바꾸는가 할 수 있다. 이 점을 명확히 설명해야 한다.

 

| 1917년 4월 4일(17일)과 12일(25일) 사이에 집필

1933년 1월 21일《프라우다》21호에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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