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 04. 16.


무정부주의 오류!

 

일부 혁명가들에게는 동감을 얻기도 했었던, 무정부주의에 대해서도 국내 역사를 고찰해보고,

매번 체제로는 어떻게 손 쉽게 타협주의라는 편에 섰는지를 분석해보자.

전시 행정 체제 아래에서 군국주의, 전범주의라는 큰 오점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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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파병을 반대하며

 


러시아

 

자국을 지키기 위한 수호 전쟁이 아니라, 두 양상국들은 침략 전쟁이라는 명분이 있다. 러시아는 토지 확장 정책이 아닌 우크라이나, 무력 도발에 대한 강력한 응징일 뿐이다. 공산당에 대한 원조란 고작 '군사적'이었다면, '건설적'인 원조란 무엇이었는지를 다시 보도록 만든다. 공산당에서는 꾸준하게, 러시아 파병에도 반대하고, 우크라이나를 단지 수호하는 활동이 아니라, 우크라이나 지배자들이 벌인 도발에 항복한 러시아라는 큰 오점을 알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심각한 수준까지 파병을 지지하지 않고는 버틸 수 없는 모양새다.

 

오랫동안 공산당에 대한 포부를 벌이고, 자신들의 민족주의를 밝히고자, 적 도발을 감행한다. 과연 공산당이란 남북한에서도 공동의 적으로 비출 수밖에는 없다. 모든 전쟁 양상들은, 미국에 대한 지지를 반영한다면 더욱이나 반대한다. 어디서든, 그들에게 건설이란, 강제된 군사 도발일 뿐이라면, 남한에서는 심심한 사과를 보탠다. 그러나 양보할 수는 없다.

 

무인기 열풍으로, 안보에도 금이 간 상태다. 그러나, 지배층 지도자들은 정작 안보에는 관심도 없다. 매일 이남 전단 풍선도 날아온다고 한다. 그러나, 국민들 가운데는 북한을 도발해야만 한다고 내세운다. 정작 하지말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소수인 가운데, 연락처마저 파괴해버렸다.

 

공산당에게 인민들은 어디로 갔던가. 서로가 도발에 대한 불안감만 가득 안고 있다.

 

이스라엘

 

전쟁에 미친 사람들은 있어왔다. 그러나 국내 언론에서는, 하마스 테러에 대해서는 비열하다고 말하면서, 정작 이스라엘이 벌인 학살에 대해서는 눈 감아준다. 전쟁에 대해서는 미래로 다가올 핵 전쟁을 두려워한다. 그러나 당에서 두려운 건, 바로 국가란 소멸한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국가를 오랫동안 유지해왔음에도, 다른 나라들에 대한 독립은 거부해왔다.

 

젊은이들은 전쟁터로 끌려갔고, 강간당하고, 죽어서는 조국을 잃고 돌아온다. 들을 수 있는 건 짧은 소식들 뿐이고, 어떤 언론인들도, 세계를 잘 안다고 말할 수나 있을까. 그리고 세계가 모두 방관했다고, 그저 거리낌도 없이 소비했다고 말할 날도 올까. 세계는 전쟁 중이다. 그러나 대부분은 잘 모른다.

 

왼손도 모르게 하고자, 한 국가가 빼돌린 전쟁 비용들이 이스라엘이라는 국가를 지지하는 데, 쓰이고 있다고 안다면 과연 같은 태도를 유지할 수나 있었을까.

 

'미국도 공범이다. 이스라엘은 전쟁을 즉각 중단하라.'

 

미국

 

자본가들이여, 그들이 밟은 땅은 과연 누구 땅이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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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0. 16


연설문 

 

문학을 끊은지는 참 오래됐다. 그래도 틈나면 읽고자 했던 아쉬움이 묻어,

쓰지도 못한다면, 읽지도 못했다. 단지 수상을 했다는 축하가 아니라,

어쩌면 전하지도 못하는 먼 미래로 보낸 글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라면, 아무도 전하지 못한 그런 글이라면 더욱 말이다.

비좁고도, 도무지도 답답한, 조그만 땅에서.

이름 모를 사람들이나 쓴 글을 읽으면서, 어쩌면, 옥중에서도 쓰여진 글일 수도 있는

작은 집에서 연설을 쓴다. 그러나 집이란 감옥이 아니다.

 

축하라는 미명 아래로도, 싸우기를 포기하지 않는다면,

작가에 대한 정신은 신비로운 미신만은 아니기를.

그렇다고 마술도 아닌, 현실에 대한 이야기이기를 바래온 건 보탬이던가.

상관없다.

 

매우 젊고도, 일면식도 없이, 등단하겠다는 한 어린 애를 죽였다.

바로 글로 말이다. 문학이란 참 쉽다.

쓰기만 하면 바라는 대로 풀 수 있다.

빈 터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도 않는 청중들을 생각하노라면,

 

참 우스운 꼴이다.

그리고 전쟁이란 너무나 쉬운 일이다.

말하는 사람들은 적고, 말하고자 하는 사람들은 벌써 죽었다.

매일마다 지는 삶이란 바로 그런, 지겹도록 꾸준한 극복도 아니고,

너무나 사랑스럽고 사소하기 때문도 아니다.

버티지도 아니하고, 짖기만 하던 개 같은 삶도 아니다.

패 버릴 구원 노래도 아니라, 그렇다고 빈틈 없이 꼭 파고들지도 않는다.

 

그런 말들이라면, 차라리 불 끄고 암실 속에서 적어나가는 글이란, 쓰기란 더 쉽다.

 

그리고 시끄러운 책을 덮는다.

 

공산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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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5. 04. 16.


충족한 임금과 충분한 휴식을!

 

어느 체제 안에서든, 개인에 대한 노력이나 희생을 강요하는 건 어느 때나 같다. 그러나 '마법'같은 노동시간의 법칙에서도, 초과가치를 쥐어짜서 생산하고는, 남은 임금이나 먹고 살아야만 하는 임금 생산을 위해 남겨진 노동계급들에게는 더욱 그렇다. '무식한' 진보 진영에서는 아직까지도 혈세 낭비, 국민연금, 금투세 폐지 요구 등에만 미치며, 정년기 동안 축적할 수 있는 임금들을 모아 훗날 자산으로 불리고자 하는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는 정부가 서민 경제를 말하고는, 정작 그들은 지불할 물가와 비용들은 너무나 지나치다 못해서 먹고 살 만한가. 심지어는 가만봐도 남쪽은 북녘보다 더하다고 보일 때도 있다.

 

통계에 따르면, 8-9시간 노동시간에 대한 임금 보장, 일하지 않으면 도저히 견디지 못하는 정신적 부담감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었다. 근현대 시기 동안에도, 사업체에서는 점심시간에 대한 1-2시간 정도에만 해당하는 '공식적인' 식사시간도 있음에도, 꾸준한 업무량과 야근을 밥 먹듯 강요하는, 대사업체들에서도, 휴식이란 눈칫밥이다. 노력하라고 하지만 쉴 틈, 낮잠 시간도 없다. 더군다나, 가족을 이룬 사람들에게는, 서민 경제로부터 취업 의사를 밝혀도 자본주의 체제 안에서 속박되어 할 수 있는 일이란 빈도와 소모 면으로는 매우 적기 때문이다.

 

그리고 도시에서도 노동계급들은 취약한 질병에도 쉽게 걸린다. 정신적 질병으로는 특히 우울증을 호소하는 사람들도 늘어났으며 노동시간과 휴식을 보장하려는 요구들은 정작 매우 드물거나, 심지어는 많이 일하고, 벌 수 있다고, 노동시간과 임금은 비례적으로 동일하다고 계산하거나, 우선시한 나머지 체력을 간과해서 죽음에 이른 경우도 있다. 심지어 문제를 알아도 체제 문제이므로 해결할 수 없다고 보는 노동자들도 많아졌다.

 

자본주의 체제에서는 그래도 영양실조까지는 아니지만, 과도한 영양 섭취로부터 비만을 호소하거나, 건강에 적신호는 잘 보여준다. 그러나 돌아온 병원 진단은 결국, 충분한 휴식과 운동, 건강한 음식 섭취일 뿐이다. 그러나 임금을 받아야만 생계를 유지하는 노동계급들에게, 병원마저 그러한 진단은 지키지도 못하는 처방이다. 사회에 대한 요구들을 보자. 부르주아 권리에 대한 요구만 늘지는 않았는가. 정작 죽어가는 노동계급들에 대한 휴식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거나, 건강 아닌 안정된 취업을 보장하고 생계권마저 사람들을 경제적 위기로 몰아놨기 때문이다. 물질 속 생명이란, 그리고 사람도 일할 체력과 충분한 휴식이 없다면, 아무리 열심히 노력하더라도, 무용지물이기 일쑤다.

 

휴식을 취하지도 못하고, 시간마저 부족해서, 잠 자지도 못하거나, 생각을 가다듬을 시간마저 없다는 건, 아무리 연봉이나 액수가 높더라도, 무의미하다. 공산권에서도 개인의 노력을 강조하거나, 심지어는 강요한다. 그러나 시간을 들인만큼 생산력이라는 사람은 생산수단들을 사용하거나, 작업장, 일터에서도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지는 아니하기 때문에, 노동계급들로는,

 

오래 전, 프랑스에서는 라파르그와 로라 마르크스도 지적했던,

 

'충족한 임금, 충분한 휴식'마저 절실해졌다.

 

안정적이라고, 가만히만 앉아도 경제는 살아났다고 탁상이나 공론하는 지배계급들을 보라. 인플레이션이 장기화됐음에도, 물가는 솟아올랐고, 실패한 혁명을 탓하고만 있는 자유 진영과 투자(투기)에만 몰두하고 주가나 조작해서, 노동계급들을 기만하고자, 꾀만 부리는 부르주아 경제인들과 학자들에게도 한심하게 뼈만 갈던 임금 노동에 대한 최후를 보노라면, 과연 해방은 어디로 갔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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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 11. 18.


정부 형태 재판부 선고 보고

 

판사에 따른 여러 판결들을 따로 추심해봤다. 이번에도 검찰계 사법부에서도, 오판을 내렸다는 결론을 내린다. 쉬운 말로, 그들은 선을 넘었다고 정의내릴 수 있다. 국가법으로도 고발 조치는 상식이지만, 내부는 썩었으므로. 그래도 정보를 신고해본다. 법조계도 눈치만 봤지. 정작 한 마디도 말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국내에서도 부르주아 역대 정부는 또 실패했다.

 

여러 문헌들이나, 사전들에서도 서술이나 정의에 대해서는 정리해서 서술한다. 그러나 같은 의문을 품어볼 수는 있다. 더욱 개인적으로 명쾌하거나, 확정 서술에 대해서는 충분히 객관적이지도 못한 채로, 또는 깊게 알아보지 않은 채로 적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도 대체로 모든 주어진 사실들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어볼 필요는 있다고 말했다. 그저 그대로 있는 정보만 받아들인다면, 글쓴이로는 계급으로 치중된 오류를 가진 채로 막연하게 또 다시 적을 수 있다. 작은 예시로는 필자는 <레닌은 회상하며>를 읽고, 더 알아보고자, 레닌 생애에 대한 백과사전을 참조해본 적도 있었다. 그러나 해당 백화사전은 체계적이지도 못했고, 생략된 부분들도 너무나 많았다. 그리고 여러 저작들이나, 자료를 세부적으로 더 조사할 필요를 있다고 봤다. 설령 인공 지능이 발달해서 자료에 대한 정보를 효율적으로 처리한다고 한다고 해서 꼭 정확한 정보를 전달한 건 아니라고 본다. 여러 논쟁들도 있지만 인공 지능은 단지 지식을 넓혀나갈 뿐이다. 그리고 사람이라면 스스로도 찾고자, 아는 정보를 잘 적용해서 내세울 줄 알 때 비로소 정보를 잘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마저도 간과하고는 국내 언론 기자들은 주어진 정보로만 추론하는 법만 배웠다. 그러나 맨 먼저 훈련을 받는 의문을 품는 법을 잘 모른다. 왜냐하면 한 의문에서도 생겨난 질문이란 보다 참된 사실을 잘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 보도 전체로 보아도, 좋은 기사를 찾기란 더욱 힘들어진다. 왜냐하면 해답을 고르는 추리만 해왔지. 정작 의문을 다룰 수 있는 올바른 추론마저 생략해왔기 때문이다. 바로 같은 의문을 생략해버렸기 때문에. 정부와 사법부의 사례에서도 보이듯, 오판을 내리고는 말았다. 순서 상으로도 정의 내리지도 못했으므로. 많은 논쟁마저 불러왔다. 여러 정부에 대해서는 정작 풀지도 못하는 문제를 엉키도록 해놨기 때문에 따로 할 말마저 없어진다. 부르주아 권력으로는 법이라는 기득권에 대한 울타리를 더욱 선명하게 보여준 사례라고 또 지겹도록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식한 정치인들은 어수선하게만 법망을 꾸리는 동안에도, 남 뒤처리를 하느라. 똥을 치우는 노동 사무관들에게도, 국내로는 같은 본보기는 하나 더 있다. 바로 그토록 피하고, 부정하고 싶어하던 군부 독재 시절 때다. 한국 정치인들에게 바치는 납세라는 품위 유지비마저 아까울 정도이다.

 

자본 주가와 노동 생산에 대한 관계

 

여러 성비에 대한 노동 임금에 대한 문제를 거론하기도 했고, 또 그러한 지적들도 취약한 문제를 안고 있으므로, 우리는 주로 재벌 기업들에 대한 자본가 구도에 대해서 비판하고자 한다. 여기서 층위를 다루지는 않고자 한다. 왜냐하면 층위는 계급 구도를 무력화하게 만들거나, 혹은 당면한 민주 문제나, 단편적인 운동 요구로만 그치기 때문이다. 여러 매체에서도 보이는 정보들에 대해서는 우선 모두 틀렸다는 전제로부터 새롭게 자본주의에 대한 물음에서부터 작업을 더욱 개시하고자 한다. 수정주의는 특히 노동 임금에 대한 결정이 주가 조작으로부터 결부됐다는 식으로 접근하기도 했지만, 실제로는 더욱 심화됐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그들은 국방부 지출을 늘리고자, 여러 위원회 설립을 추가로 건설하고자 하거나, 아니면 세금 지출에 대해서 다른 곳에서 끌어다모으는 방식으로 낭비하고 있다고 지적할 수 있다.

 

역대 정부들에 대해서도 부르주아적인 시각을 가진 채로, 교육을 받거나, 교정되어 왔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모든 정부들의 결정들은, 노동 계급들과는 동일할 수도 없고, 또 그래서도 안된다고 본다. 그러나 우리는 혁명 정부를 추구한다. 또한 지배 권력에 대한 일시적인 도전이 아니라 매우 장기적인, 그러니까 길고 꾸준한 프롤레타리아트 혁명 정부를 바라고 있기 때문이다. 기나긴 선거 제도로부터, 너무나 많은 시간들을 기다려오기도 했다. 여러 경제적인 분위기에 따라 일시적으로는 성장세를 보이다가도, 정작 노동계급들에 대한 생활과는 무관하지 않다는 점을 증명하는 건, 바로 혁명에 대한 연구가들에게 꼭 필요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르크스, <자본론>을 적용해야하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꼭 필수한 일이다.

 

그러나 우리는 자본 주가가 떨어지고 있다고 보고, 경제 사정들도 매우 힘들어졌다고 판단한하고 있다. 노동 생산에 비해서, 노동력을 제공할 수 있는 인원들도 턱 없이 줄어들었고, 그에 반해서, 그렇다고 혁명에 참가할 수 있는 구성원들도 매우 소수라는 점에서, 우리는 최대한으로, 정부에 대해 폭로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믿는다. 따라서 우리에게 여러 경제적인 동향이나, 시사적인 방향이란, 바로 프롤레타리아트와 연계해서, 또 노동계급들에 대한 의식을 무산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혁명으로까지 확장할 수 있다는 한에서 제기한다. 자본주의는 붕괴하도록 만들 수 있다면, 그리고 힘쓸 수 있다면, 닿는 한 부수는 쪽이 더욱 옳다.


그리고 현행법으로 제어한다면, 무력으로도 사용할 줄 알아야만 한다고 보는 쪽이다. 그러므로 일반 매체에서만 제기하는 여러 미약한 논쟁들은 힘도 약하고, 또 없다고 보기 때문에, 우리는 실천할 수 지식을 연구할 수 있는 지역 혁명가들에게 의존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같은 문제에 대해서는 갈등이나 혼란으로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만 만드는게 아니라, 프롤레타리아라는 본질을 파악하고 또 꾸준하게 제기해야만 한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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